溫陽 鄭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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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陽 鄭氏
溫陽鄭氏
나라 韓國
貫鄕 忠淸南道 牙山市 온양동
時調 정보천(鄭普天)
集姓村 忠淸南道 牙山市 인주면
忠淸南道 天安市 광덕면
忠淸南道 泰安郡 소원면
忠淸北道 忠州市 가금면
主要 人物 정순붕 , 精油 , 貞廉 , 정두경 , 정창순 , 정민시 , 정만석 , 鄭炳昰 , 정상희 , 정재은 , 정창현 , 鄭甲潤 , 鄭溶鎭 , 鄭有慶 , 정현철
人口(2015年) 29,761名

溫陽 鄭氏 (溫陽鄭氏)는 忠淸南道 牙山市 온양동 을 本館으로 하는 韓國의 姓氏 이다.

歷史 [ 編輯 ]

溫陽 鄭氏(溫陽鄭氏)의 始祖 정보천(鄭普天, 900年生)은 高麗 初 戶部尙書(戶部尙書)를 歷任하고, 金紫光祿大夫(金紫光祿大夫)에 책록되었다고 한다. 정보천은 社로(斯盧) 眞摯富村長(珍支部村長) 지백호 (智伯虎)의 34世孫이고, 아버지는 正司盟, 어머니는 免賤 福씨 (卜氏)이며, 外祖父는 복지겸 (卜智謙)이라고 한다.

10歲 呈戱, 11歲 精進, 12歲 정득진은 朝鮮의 벼슬을 拒否하고 高麗에 忠節을 지켜 杜門節祀(杜門節死) 하였다. 12世孫 正득량(鄭得良)의 孫子인 정충기(鄭忠基)가 1450年(世宗 32年)에 文科에 及第하였다. [1] 정충기의 孫子인 정순붕 (鄭順朋)은 1504年(燕山君 10) 別試文科에 及第하여 右議政 에 이르렀고, 溫陽府院君(溫陽府院君)에 封해졌다.

溫陽 鄭氏는 朝鮮朝에 文科 及第者 43名, 右議政 2名( 정순붕 · 정만석 ), 功臣 1名을 輩出하였다. 精油 (知中樞府事), 정예남 (領中樞府事), 정뇌경 , 정광진 (大司憲), 정기안 (知中樞府事), 정유악 (刑曹判書), 정민시 (吏曹判書), 정광한 (禮曹判書), 정창순 (禮曹判書), 鄭泰浩 (吏曹判書) 等 10名이 鄭2品에 올랐고, 정뇌경 (衷情), 정기안 (孝헌), 정민시 (충헌), 정만석 (淑獻) 等 4名이 諡號를 받았다.

世界 [ 編輯 ]

  • (2歲) 정작眞(贊成事), 정작鄭(贊成事)
  • (3歲) 正尊舅(登第 獻納공)
  • (4歲) 精子準(諫議大夫)
  • (5歲) 正氣散(登第 贊成事)
  • (6歲) 正達尊(登第 怪館 贊成事)
  • (7歲) 정응人(登第), 정응休(監察御史)
  • (8歲) 正規(太醫院 勝同情)
  • (9歲) 定窯(領海백兼 都巡問使) : 아들 - (1)年 (2)희(中郞將, 大司成, 杜門節祀)
  • (10歲) 停年(精算監務) : 아들 - (1)순우 (2)復航 (3)乙名(中郞將) // 精進(寶文閣 學士, 杜門節祀)
  • (11歲) 정순우(軍起訴尹, 左右衛補乘郎將) : 아들 - (1)得眞(삼등현令, 寶文閣 學士, 杜門節祀) (2)得展(순흥부사) (3)득량
  • (12歲) 正득량(鄭得良; 高麗 中郞將(中郞將), 朝鮮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大匡輔國崇祿大夫(大匡輔國崇錄大夫)) : 아들 (1)면(冕) (2)砲(袍) (3)大(帶)

分派 [ 編輯 ]

  • 정득진(12世孫, 杜門節祀) → 三登公派
  • 정득展(12世孫) → 府使公派
  • 正득량(12世孫) → 少尹公派
    • 鄭誧(13世孫) → 高城公派
      • 정충근(14世孫) → 正?公派
        • 정예종(16世孫) → 水使公派
        • 정인조(16世孫) → 禁衛公派
        • 정순조(16世孫) → 通政公派
      • 정충본(14世孫) → 司直公派
      • 정충기(14世孫) → 持平公派
        • 정수붕(16世孫) → 桂香堂公派
        • 정백붕(16世孫) → 叢桂堂公派
        • 정순붕 (16世孫)
          • 貞廉 (17世孫) → 北窓公派
          • 政敵(17世孫) → 琴松堂公派
          • 情談(17世孫) → 十竹軒公派
        • 정구붕(16世孫) → 僉正公派
      • 怔忡間(14世孫) → 校理公派
  • 정대(13世孫) → 判官公派
  • 井州(11世孫) → 展力公派
  • 精油(17世孫) → 溫溪君公派
  • 정희번(18世孫) → 溫城君公派
  • 呈戱(10世孫, 杜門節祀) → 大司成公派

人物 [ 編輯 ]

  • 正득량 (鄭得良, ? ~ 1412年) : 12世孫. 高麗 中郞將(中郞將)을 지내고, 朝鮮 開國 後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를 歷任하고, 大匡輔國崇祿大夫(大匡輔國崇錄大夫)에 이르렀다. 墓는 京畿道 이천시 백사면 조읍리. 配 貞敬夫人 晉州姜氏.
  • 정수붕 (鄭壽朋, 1474年 ~ 1534年) : 1494年(成宗24) 司馬試에 及第하여 世子翊衛司(世子翊衛司)를 지냈다.
  • 정백붕 (鄭百朋, 1478年 ~ ) : 정수붕의 동생. 1504年(燕山君 10年) 文科에 及第하여 正憲大夫 刑曹判書에 이르고 左贊成에 贈職되었다.
  • 정순붕 (鄭順朋, 1484年 ~ 1548年) : 燕山君 10年 文科에 及第하여 共助(工曹)·兵曹判書(兵曹判書) 等을 거쳐 中宗 때 戶曹判書(戶曹判書)를 歷任하고, 知中樞府事(知中樞府事)가 되었을 때 明宗(明宗)이 卽位하자 소윤(小尹)으로서 大尹(大尹)을 除去하는 데 活躍했다. 그 功으로 保翼功臣(保翼功臣) 1等이 되고 右贊成兼知經筵事(右贊成兼知經筵事)에 昇進하여 온양부원군에 封해졌으며 理解 右議政(右議政)에 올랐다.
  • 精鬼붕 (鄭龜朋) : 1525年 進士試에 合格하여 金化縣令을 歷任하고, 中直大夫(中直大夫)에 올랐다.
  • 貞廉 (鄭?, 1506年 ~ 1549年) : 鄭順朋의 아들. 1537年(中宗 32) 進士試에 合格하였고, 留意로서 1544年 中宗의 病患에 藥을 짓기 위하여 內醫院提調들의 推薦을 받아 入津(入診)하였다. 處方을 모아 『정북창房(鄭北窓方)』을 編纂하였다.
  • 정현 (鄭?) : 1545年 乙巳士禍 때 尹임(尹任) 一派를 除去한 공으로 衛社功臣(衛社功臣) 3等에 올라 社蟾蛇職場(司贍寺直長)李 되었으며 1551年 忠勳府道士(忠勳府都事)가 되고 다음해 大護軍을 거쳐 成川府使(成川府使)에 이르렀다.
  • 정창순 (鄭昌順) : 1757年 庭試文科에 乙科로 及第하고, 正祖 때 大司諫, 大司憲(大司憲), 觀察使(觀察使) 等을 歷任하고 禮曹判書(禮曹判書)에 이르렀다.
  • 정예남 (鄭禮南) : 1596年(宣祖 29) 上議院 主婦(尙衣院主簿)를 지내고, 1608年(光海君 卽位) 語의(御醫)로서 僉知中樞府事(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醫學에 밝아 許浚(許浚) 等과 의방신서(醫方新書)의 編纂에 着手했으나 丁酉再亂으로 中斷하였다. 六家雜詠에 그의 詩(詩)가 傳한다.
  • 정뇌경 (鄭雷卿, 1608年 ~ 1639年) : 鄭順朋의 玄孫. 1630年(仁祖 8) 別試 文科에 壯元으로 及第해 佐郞, 修撰, 地平, 정언 等의 言官을 歷任하였다. 丙子胡亂 以後 소현세자(昭顯世子)를 陪從하여 瀋陽(瀋陽)에 갔다가 斬刑을 當해 殉國하였다. 事後 議政府(議政府) 贊成(贊成)에 追贈되었다. 諡號는 衷情(忠貞).
  • 정유악 (鄭維岳, 1632年 ~  ?) : 정뇌경의 아들. 1666年(玄宗 7) 別試文科에 丙科로 急하여 左承旨(左承旨), 共助參判(工曹參判), 都承旨(都承旨) 等을 歷任하고, 1680年(肅宗 6) 庚申大黜陟(庚申大黜陟)에 男인(南人)으로서 極邊에 安置되었다. 1689年 己巳換局(己巳換局)으로 京畿道 觀察使(京畿道觀察使)에 登用되었고, 이듬해 刑曹判書(刑曹判書)가 되었다. 1694年 甲戌獄事(甲戌獄事)로 다시 珍島(珍島)에 安置되었다가 1697年 田里에 방귀, 1699年 放送(放送)되었다.
  • 정광한 (鄭光漢, 1720年 ~ 1780年) : 1754年 增廣文科에 乙科로 及第하여 大司憲(大司憲)과 大司諫(大司諫)을 歷任하고, 正祖(正祖) 때 禮曹 判書(禮曹判書)에 이르렀다.
  • 정기안 (鄭基安, 1695年 ~ 1767年) 鄭順朋의 6代孫. 1728年(英祖 4) 別試 文科에 丙科로 及第하여 1766年(英祖 42) 漢城府 右尹·知中樞府事를 지내고 耆老所(耆老所)에 들어갔다. 著書로 1834年(純祖 34) 아들 정만석이 編輯·刊行한 『慢侮遺稿(晩慕遺稿)』가 있다.
  • 정창순 (鄭昌順, 1727年 ~ ?)  : 1757年(英祖 33) 庭試文科에 乙科로 及第하여 大司憲(大司憲), 觀察使(觀察使), 吏曹判書(吏曹判書) 等을 歷任하고 判中樞府事(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 정민시 (鄭民始, 1745年 ~ 1800年) : 鄭順朋의 後孫이자 創社(昌師)의 아들. 1773年(英祖 49) 增廣文科에 兵科로 及第하여 大司成 等을 지내고, 禮曹·戶曹·이조·刑曹·共助·兵曹의 判書와 議政府左參贊 等을 歷任하였다. 正祖(正祖)의 銃身이며 詩派(時派)의 거두였으므로 1801年(純祖 1) 碧波(僻派)인 英祖妃 정순왕후(貞純王后)에 依해 官爵이 追奪(追奪)되었으나 아들 聲優(性愚)의 上疏로 復官되었다. 右議政(右議政)에 追贈되었다. 諡號는 충헌(忠獻).
  • 정만석 (鄭晩錫, 1758年 ~ 1834年) : 정기안의 아들. 1783年(正祖 7)文科에 及第하고, 1829年 右議政에 올랐다. 諡號는 淑獻(肅獻).
  • 鄭泰浩 (鄭泰好, 1837年 ~ ?) : 1858年(哲宗 9) 庭試文科에 丙科로 及第하여 觀察使(觀察使) 等을 歷任하고, 1890年 吏曹判書(吏曹判書)가 되었다.
  • 政術校 (鄭述敎, 1845年 ~ 1915年) : 通仕郞(通仕郞)李 되고 高宗 때 義禁府都事(義禁府都事)를 歷任했다. [2]
  • 정재은 (鄭在恩) : 정상희의 次男. 犯蔘聲價로 불리는 族閥의 後孫이며 新世界 名譽會長을 지냈다.
  • 鄭溶鎭 (鄭溶鎭) : 정재은의 長男. 犯蔘聲價로 불리는 族閥의 後孫이며 新世界 副會長을 지냈다.
  • 정현철 (鄭鉉哲) : 現代 世紀의 音樂家다.

集姓村 [ 編輯 ]

人口 [ 編輯 ]

  • 1985年 5,689家口 24,134名
  • 2000年 7,599家口 24,897名
  • 2015年 29,761名

比較 [ 編輯 ]

  • 朝鮮時代 鄭氏 相臣 및 文科 及第者
順位 本館 相臣 大提學 文科 及第者
1 東來 鄭氏 (東萊鄭氏) 17名 2名 198名
2 連日 鄭氏 (延日鄭氏) 5名 3名 119名
3 溫陽 鄭氏(溫陽鄭氏) 2名 0 43名
4 淸州 鄭氏 (淸州鄭氏) 2名 0 20名
5 奉化 鄭氏 (奉化鄭氏) 2名 0 8名
6 晉州 鄭氏 (晉州鄭氏) 1名 1名 59名
7 河東 鄭氏 (河東鄭氏) 1名 1名 65名
8 哨戒 鄭氏 (草溪鄭氏) 0 0 60名

各州 [ 編輯 ]

  1. 정충기 - 韓國學中央硏究院
  2. 3.1運動을 準備하기 위한 朝鮮八道 兩班들에게 高宗의 密命을 傳達하다가, 日本의 官憲에게 알려져서, 事後에 日帝에 密告한 許氏들이 鄭氏로 僞裝하여 先祖들의 酸素와 財産들이 넘어가고, 아직도 許氏들이 鄭氏로 僞裝하여 살고 있는 것으로 推定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