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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癌私製1棟
岩寺第1洞
암사제1동주민센터
癌私製1洞住民센터

로마字 表記 Amsa 1(il)-dong
行政
國家 大韓民國
地域 서울特別市   江東區
行政 區域 39個 , 370個
法定洞 암사동
官廳 所在地 서울特別市 江東區 올림픽로98가길 57
지리
面積 1.01km 2
人文
人口 34,401名(2022年 2月)
世代 15,869世代
人口 密度 34,100名/km 2
地域 富豪
웹사이트 岩寺1洞 住民센터
癌私製2棟
岩寺第2洞
암사제2동주민센터
癌私製2洞住民센터
로마字 表記 Amsa 2(i)-dong
行政
國家 大韓民國
地域 서울特別市   江東區
行政 區域 19個 , 165個
法定洞 암사동
官廳 所在地 서울特別市 江東區 上岩로3길 28
지리
面積 1.18km 2
人文
人口 15,123名(2022年 2月)
世代 6,293世代
人口 密度 12,800名/km 2
地域 富豪
웹사이트 강동구 암사2棟 住民센터
癌私製3棟
岩寺第3洞
암사제3동주민센터
癌私製3洞住民센터
로마字 表記 Amsa 3(sam)-dong
行政
國家 大韓民國
地域 서울特別市   江東區
行政 區域 20個 , 213個
法定洞 암사동
官廳 所在地 서울特別市 江東區 高德로 137
지리
面積 2.51km 2
人文
人口 17,846名(2022年 2月)
世代 6,178世代
人口 密度 7,110名/km 2
地域 富豪
웹사이트 강동구 암사3棟 住民센터

암사동 (岩寺洞)은 서울特別市 江東區 에 位置한 法定洞 으로 8號線 의 終點인 癌使役 이 있다.

東쪽으로는 千戶1棟 ˙ 明逸洞 과 隣接하고, 西쪽은 漢江을 건너 廣津區 , 南쪽은 區 岩寺市場이 자리한 千戶2棟 , 北쪽은 九里岩寺大橋 를 건너 九里市 가 있다.

歷史 [ 編輯 ]

암사동이라는 이름은 三國時代의 9個의 査察(절터)李 位置해 있어서 구암사(九岩寺), 俗稱 바위절이라 하던 것이 암사동으로 變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三國時代 草創期 백제 佛敎의 嚆矢인 백중사가 位置했던 자리라 推定한다. 以後 高麗 時代에 이르기까지 7個의 査察이 더 增築이 되었다고 傳하였다. 朝鮮時代 구암事理로 불리다가 1914年 住所 事業으로 볕우물, 불縣마을, 店마을, 새장터 等을 合하여 구천면 암사리로 이름붙여졌고, 以後 서울에 編入되며 只今의 암사동이 되었다. [1]

新石器時代에 사람이 살던 痕跡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으며, 이 암사 先史遺跡地는 史跡으로 指定되어 保護받고 있다.

自然마을 [ 編輯 ]

오늘날 先史遺跡地에 該當하는 江邊 地帶는 漢江 水路의 뱃길과 맞닿아 배가 쉬어가는 곳이기도 했는데, 이들을 相對로 장사하는 사람이 많아 現金의 流通이 빠르고 구천면의 다른 地域보다 富裕했다고 傳해진다.

  • 참앞: 高麗, 朝鮮時代 나루터앞길이나 마을앞길을 참(站) 앞이라고 부르던 데서 由來했는데, 너른나루에서 배를 기다리던 場所였다. 아랫나루터길가라는 뜻으로 下進參(下津站)이라고도 불리었다. 只今의 신암초등학교 方向이다.
  • 餘門骨(餘뭇骨): 朝鮮 成宗때 直提學을 지낸 정성근(鄭誠謹)李 父親喪을 當하자 암사동 高德山一帶 父母墓所 밑에다 盧막을 짓고 3年間 侍墓하다가 成宗이 逝去하자 3年을 또 보내어 廬墓骨(6年 侍墓-餘門骨)이라는 말이 지어지게 되었다. 그는 以後 情事에 나가 燕山君에게 直言을 많이 하였는데 正直한 그를 보고 阿附하던 臣下들에게 미움을 사 謀陷을 받고 죽게 되었으니 以後 그를 侍墓하던 그의 아들도 3年喪을 치르다 마찬가지로 죽게 된다. 仁祖反正 以後 仁祖가 그의 孫子에게 代代로 집안에 자랑인 正門을 내리는데 보기 드물게 한집에서 王에게 6正門을 받았고, 侍墓살이를 6年씩 2番 한 곳이라 하여 餘門骨 또는 廬墓骨, 우뭇골이라고도 한다. 位置는 只今의 岩寺取水井首長이다.
  • 점말: 陶瓷器를 만드는 點(店)이 있었던 데서 由來했는데 백제時代 때부터 宮闕에 쓰일 그릇을 구워냈던 곳으로 오래 前 光州分院과 함께 陶瓷器 生産으로 有名했던 곳이다. 只今의 書院마을이다.
  • 섬말(섭말): 새陵말과 안마을 사이에 있는 아주 작은 마을로, 狹小한 地形이 마치 불꽃 模樣과 같으며 옛 길이 지나고 있다. 周邊이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어 隣近 마을보다 따뜻하므로 漢字로 따뜻할 섭(?)을 쓰고 發音만 섬말이라고 했다고 傳해지는데, 마을 앞 논에 섬을 팠기 때문에, 또는 비가 많이 오면 섬처럼 보이기 때문에 도촌(島村), 卽 섬말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새陵말: 陵말이나 넘말이라고도 하는데, 朝鮮 仁祖 時節 壬辰倭亂 때의 功臣이던 임숙영의 忠節이 커 墓를 王族의 墓(陵)처럼 크게 만들었다 해서 새陵말이라 한다. 임숙영이 살던 곳도 암사동 一帶라고 傳하며, 墓는 只今은 다른 곳으로 移葬되었다. 只今의 都市空間建物 앞이다.
  • 갯말(갯모루): 민물 개펄 (韓江)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므로 갯모루 또는 갯물이라 한 것이다.
  • 書院말: 朝鮮時代에 구암사 等 절터 옆으로 서원 이 들어섰고, 그 山 아래 기와집들이 자리잡아 마을을 이루었으므로 由來된 이름이다. 只今의 店마을 윗쪽인데 現在 같다.
  • 양지말: 볕이 잘드는 한밭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양지말이라고 하였다. 現在 店마을 아래 陽地마을로 남아있다.
  • 福祉말: 本디 이 땅은 日本人들이 복숭아나무와 梅花나무, 果樹와 조림地域으로 使用했다고 한다. 그러나 洪水以後 1957年에 이석겸(李錫謙), 金在洪(金在弘) 두 사람이 北韓에서 내려온 越南 避難民을 위하여 새로 農場을 만들고 福을 받은 마을이란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 現在의 岩寺圖書館 윗쪽이다.
  • 볕우물마을: 양지마을과 점말 사이에 있던 우물로서 百濟人들이 築造했던 우물이라 口傳해서 내려온다. 먼 過去 암사동 土城을 짓을때부터 마을과 함께 우물이 생겨났다고 傳하는데 물맛이 맑고 特異했다 한다. 볕우물 마을에는 萬石꾼(富農) 김종택이 살았는데 집이 99칸이나 되는 拒否로서 1920年 朝鮮地圖에서도 그의 집의 規模가 보인다. 1950年 그와 그의 家族들은 그 家勢를 믿고 戰爭이 나도 避難하지 않았는데 結局 拉北되어 蹤跡이 묘연히 사라졌다. 現在의 대명아파트자리이다.
  • 部處고개: 암사동에 있는 고개로 돌부처가 있어 部處고개 또는 불縣(佛峴)이라 했다. 돌부처賞은 日本人들에 盜掘당해 사라졌다 한다. 只今의 明逸洞 순복음敎會 옆地域으로 推定된다.
  • 토막나루: 구리시 토평리로 건너가는 나루로 나무토막으로 배를 만들어 건너 다녔다고 해서 붙은 名稱. 只今의 九里岩寺大橋 南端쯤이다.
  • 度唐材: 只今의 신암중學校 앞 언덕을 일컫는다 福祉마을이 大擧 생기기 前 農繁期때 祈禱하는 新黨神과 여러 庵子가 많이 있었던 언덕이라고 傳한다. 只今의 신암중學校 건너便이었다.
  • 구암사地(九岩寺址): 一名 癌會社로 新羅時代에 절이 9個나 있어, 구암사 또는 俗稱 바위절이라 하였으며 그 漢字名으로 암사리라 한데서 緣由되었다. 只今의 암사동과 高德山끝에 있는 바위절터라고 남아 傳한다.

行政 區域 [ 編輯 ]

法定洞 行政洞
암사동 癌私製1棟
癌私製2棟
癌私製3棟

主要 施設 [ 編輯 ]

交通 [ 編輯 ]

올림픽大路 가 隣接해 있어서 交通이 便利하다. 岩寺大橋가 開通되어 있으며, 地下鐵 8號線이 癌使役에서 구리를 거쳐 진접新都市까지 延長 開通이 計劃 中이다.

文獻 [ 編輯 ]

구암사 中 오랫동안 命脈을 維持해 온 백중사(伯仲寺)가 岩寺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하였으며, 徐居正이 읊은 「백중사」 [2] 詩가 傳한다.

백중사라는 절의 位置에 對해서는 朝鮮時代 執筆된 新增東國輿地勝覽 第 6卷 廣州郡 部分에서 백중사 라는절은 下進參(下津站) 東쪽에 있다라고 傳하였다.

高麗末에서 朝鮮初期때까지 이 절은 位置하였으나 中宗때 僧科를 없앴고, 以後

임란을 맞이한 뒤 儒林들이 繁昌했던 1700年代 즈음 사라진것으로 推定이 된다.

아래의 詩는 京畿道 廣州郡 구천면 암사리 (只今의 서울市 강동구 암사동) 고지봉옆

漢江 沿岸에 있던 一名 岩寺(岩寺), 또는 癌會社(岩回寺) - 백중사(伯仲寺)를 素材로 한 徐居正의 査察과 風流依恃이다.

            伯仲寺 백중사에서

招提架蒼獻 (醮祭歌唱헌)

何日側金開 (河一側금개)

落葉無人掃 (落葉無人소)

空堂有客來 (公黨留客래)

山形臨水斷 (山形임手段)

水勢觸山廻 (수세觸散會)

坐共高僧話 (좌공고승화)

胸襟自不埃 (胸襟自不愛)

      <四佳亭  : 四家詩集 - 保有 . 3>

[3]

査察이 푸른 벼랑에 걸렸는데,

언제쯤 金을 펼쳐 저리 지었나.

落葉이야 쓰는 사람 없을망정

절집에 찾아오는 길손 있구나.

山勢는 못물에 이르러 끊겼고

물굽인 山에 부딪쳐 굽度누나.

앉아서 高僧과 함께 對話하니

마음은 第兩 世俗 티끌 사라져.

벼랑(蒼獻)에 매달린 듯한 査察(招提), ‘금개’는 ‘부처님을 蓮花臺에 모셨는가’란 뜻이니, 祁連 1.2具는 예사롭지 않은 寺刹의 全景으로 詩想을 열었다. 對句인 3.4具는 ‘없고 : 있음’으로, 對를 맞춰 고즈넉한 山寺의 精密頃, 이른바 世俗과의 差別性을 前提로 法界의 位相을 設定했다.

5.6具 亦是 ‘山 : 물’의 形象으로 對를 맞추되 ‘山 다한 곳, 그러니 山자락 다하자 물이 모인 못이요, 모인 물은 山자락 굽이굽이 굽돌아 흐른다는 백중사의 實景 描寫로 7.8具의 主題를 誘導했다.

곧 佛者와 유가와의 禪問答이 아니라, 儒佛불이(儒佛不二)의 法文, 或은 淸淨法文이었대도 좋다. 워낙 道란 相對에 對한 人情이요, 詩文의 例도 亦是 다름 아니다.

各州 [ 編輯 ]

  1. “암사동 由來” . 2014年 7月 2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9月 14日에 確認함 .  
  2. 徐居正의 詩集 - 四家詩集 中 詩 (詩) - 백중사(伯仲寺)
  3. “서거정 : 四家詩集 中” . 2014年 7月 2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4年 7月 24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