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홀름 피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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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 피바다

스톡홀름 피바다 ( 스웨덴語 : Stockholms blodbad ) 또는 스톡홀름 大虐殺 1520年 11月 7日 부터 11月 9日 까지 덴마크 크리스티안 2歲 國王이 이끄는 덴마크 軍隊가 스웨덴 스톡홀름 에서 스웨덴人들을 虐殺 , 肅淸 한 事件이다.

背景 [ 編輯 ]

칼마르 同盟 의 支配를 받고 있던 스웨덴에서는 自由 選擧를 통해 스웨덴의 攝政으로 任命된 스텐 스투레 덴 윙레 (Sten Sture den yngre, 年少者 스텐 스투레)가 이끄는 스웨덴 民族主義 陣營과 웁살라 大主敎를 歷任하고 있던 구스타브 트롤레(Gustav Trolle)가 이끄는 친(親)덴마크 陣營이 對立하고 있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世 國王은 2次例에 걸쳐 軍隊를 動員하여 스웨덴人들의 叛亂을 鎭壓하려고 했지만 失敗했고 프랑스 , 獨逸 , 스코틀랜드 出身 傭兵들을 投入하게 된다.

1520年 1月 19日에 일어난 寶偈順드 戰鬪(Bogesund)에서 덴마크 軍隊는 스텐 스투레가 이끄는 스웨덴 軍隊의 叛亂을 鎭壓했고 스텐 스투레를 肅淸시켰다. 크리스티안 2世는 1520年 3月 31日에 덴마크 樞密院과 締結한 協定을 통해 스웨덴의 法律, 慣習에 따라 스웨덴을 統治한다는 條件을 받으면서 스웨덴의 國王으로 卽位했다.

虐殺과 肅淸 [ 編輯 ]

1520年 11月 4日에는 크리스티안 2歲가 스톡홀름 主敎座 聖堂에서 구스타브 트롤레에 對한 기름부음 意識을 進行하면서 스웨덴의 法律대로 나라를 通治하겠다고 宣言했다. 크리스티안 2世는 11月 7日 저녁에 晩餐을 열었다.

1520年 11月 7日에는 크리스티안 2歲가 스웨덴의 主要 人士들을 스톡홀름의 王宮으로 召喚했다. 11月 8日에는 덴마크의 兵士들이 스웨덴의 主要 人士들을 處刑하면서 스톡홀름의 中央廣場은 피바다로 變하게 된다. 11月 9日에는 구스타브 트롤레 大主敎가 異敎 信者로 몰린 사람들을 處刑했다. 11月 10日까지 約 80名에서 90名에 達하는 스웨덴의 貴族들, 聖職者들이 處刑되었는데 이 가운데에는 스텐 스투레의 아내였던 크리스티나 귈렌스티에르나(Christina Gyllenstierna)가 包含되었다.

事件의 餘波 [ 編輯 ]

크리스티안 2世는 스웨덴에서 大規模 叛亂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스웨덴의 獨立 戰爭을 觸發시키는 契機가 된다. 크리스티안 2世는 스웨덴人들이 罪를 容恕한다는 條件으로 降伏을 받아들였지만 스웨덴의 獨立을 主張하는 사람들을 處刑하면서 스웨덴人들의 憤怒를 사게 된다. 1521年 부터 1523年 까지 일어난 스웨덴 解放 戰爭 에서 구스타브 바사(Gustav Vasa, 구스타브 1歲 바사 )가 이끄는 스웨덴 軍隊가 덴마크 軍隊를 물리치면서 스웨덴은 칼마르 同盟에서 獨立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