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익원
(1940年 ~ 1999年 4月 20日, 徐翼源)은 第13代
水原地方檢察廳
檢査場을 歷任한 法曹人이다. 김수자와 사이에 2男 1女가 있다. 스포츠 아나운서
서기원 (1930年)
이 親兄이며 檢事 出身의 法曹人인
정용수
가 사위다.
[1]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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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年
京畿道
烏山市
에서 태어나
서울大學校
法學科를 卒業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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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익원은 1963年 第16回
高等考試
司法科에서 合格하고 1964年 空軍 法務官을 거쳐 1967年 12月 28日 發令받은
光州地方檢察廳
木浦支廳 檢事에 1968年 1月 1日子로 任用되었다. 조지워싱턴대학에서 比較法學으로 碩士學位를 取得하였다.
[3]
別名이 선비 檢事였던 서익원은 1987年
서울地方檢察廳
次長檢事로 있으면서
朴鍾哲
致死 事件 搜査를 指揮하여 拷問에 依한 造作된 事實을 밝혀냈다. 이때 서울地檢長이었던
정구영
은
光州高等檢察廳
檢事長으로,
서울地方檢察廳
次長檢事와 主任檢事였던 서익원과
신창언
이 모두 地方檢察廳으로 左遷되었다가 1990年 12月 6日에 第23代
檢察總長
에 就任한 以後에 있었던 1992年 7月 24日 人事에서 서익원과
신창언
이
大檢察廳
刑事部長과 公判訟務部長에 任命되어 모두
大檢察廳
에서 만나게 되었다.
[4]
서익원의 親舊였던
大檢察廳 中央搜査部長
을 歷任한
정성진
은 "
朴鍾哲
事件때 어려운 決斷을 내려 歷史에 큰 寄與를 했으면서도 한番도 내色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1993年 9月 申告한 公職者 財産으로 536,279
[5]
高等考試
同期生인
金道彦
이 檢察總長에 就任하면서 後輩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1993年 9月 16日
水原地方檢察廳
檢査場을 마지막으로 檢察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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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年에 2年前 發病한 癌이 再發하여 鬪病 中에 回顧錄 《따뜻한 날의 午後》을 남기고 1999年 4月 20日 死亡했다.
서익원은 出版한 回顧錄에서 "檢察이 透明하지 못한 搜査와 政權의 赦免權 濫用 等으로 庶民들만 法을 怯낼 뿐 높은 사람들은 法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檢査라는 職業 때문에 付託과 期待가 많았지만 大部分 못본체하고 넘겼다"며 "平生 法으로 밥을 먹고 살았지만 法 없이도 살 수 있기를 바랐다"고 했다. 또 檢察의 爆彈酒 文化에 對해서 "남의 괴로움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라며 批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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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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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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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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