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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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인모
出生 1917年
日帝强占期 朝鮮 咸鏡南道 豐山郡
死亡 2007年 6月 16日
國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特異事項 非轉向 長期囚
罪名 6.25戰爭 中 逮捕
刑量 總 收監期間은 34年
現況 1993年 3月 19日 非轉向 長期囚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으로 送還
逮捕일자 1952年

리인모 (李仁模, 標準語 : 이인모 , 1917年 8月 24日 ~ 2007年 6月 16日 )는 朝鮮人民軍 의 言論人이다. 從軍記者 出身으로, 南韓에서 34年間 非轉向 長期囚 로 있다가 釋放된 後 1993年 3月 19日 最初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으로 送還된 사람이다.

生涯 [ 編輯 ]

1917年 8月 24日 咸鏡南道 豐山郡 蓋馬高原 地帶에서 火田民의 遺腹子로 태어났다. 日本 도쿄工業高等學校에 다니다 中退했을 程度로 인텔리였다. 先輩 및 親舊들과 함께 抗日運動에 뛰어든 後 스물한 살 때 서울로 옮겨 活動하다 45年 6月 日帝의 彈壓에 山속으로 避身한 後 解放을 맞는다.

解放 後 故鄕으로 돌아와 풍산, 興南 地域에서 朝鮮勞動黨 地域 宣傳局長으로 活動하던 中 韓國戰爭이 터졌다. 韓國戰爭 中 人民軍 文化部 所屬 從軍記者가 되어 戰線을 따라 洛東江 流域까지 내려왔다. 仁川上陸作戰 으로 人民軍이 後退하자 智異山으로 들어가 遊擊隊의 新聞을 發行하는 일을 하였다. 慶南道黨 宣傳副長 代理로 일하다가 52年 智異山 대성골에서 負傷을 입고 捕虜가 돼 光州 捕虜收容所에 收容되었다. 當時 36歲였다. 以後 34年間 服役하면서 轉向을 拒否하여 非轉向長期囚 가 되었다. [1]

韓國戰爭 當時 그의 役割을 두고 大韓民國 의 裁判 記錄은 義勇軍 强制 募集이나 빨치산 活動으로 摘示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서는 從軍記者로서 戰線 取材를 擔當한 것으로 主張해 相衝한다.

1952年 檢擧되어 7年間 服役했고 1959年 出所했지만 1961年 6月 釜山에서 地下黨 活動 嫌疑로 붙잡혀 國家保安法 違反으로 27年型을 宣告받았다. 76年 滿期가 지났지만 社會安全法에 依한 保護監護 處分으로 88年 10月까지 服役했다. 淸州保安監護所에서 出所한 後 그는 養아들 김상원의 慶南 金海 집에서 生活했다. [2]

出所 後 많은 글을 써서 非轉向長期囚의 存在를 國內外에 널리 알려 안재구, 류낙진, 최호경 等 組織 事件 關聯者와 손성모, 신광수 等 非轉向長期囚가 1999年 12月 31日까지 모두 釋放되는 等 南韓 政府의 人權 改善에 寄與했다. 送還 問題가 불거진 것도 1989年 月刊 말지에 北에 있는 家族을 그리워하는 手記 '내 靑春 統一에 묻어'를 連載하면서부터다. 이게 1991年 9月 21日子 勞動新聞 에 실리면서 北朝鮮은 1991年 9月 對南放送인 平壤放送 을 통해 리인모의 送還을 要求한다. 두 달 뒤 서울에서 열린 第5次 南北高位級會談(12月 10~13日)을 取材하러 내려온 北朝鮮 中央放送 記者가 夫人 김순임과 외동딸 里懸玉 等 北에 남아있는 家族의 答狀과 寫眞을 南側 取材陣에 傳해왔다. 以後 北朝鮮은 1992年 '南北高位級會談' 等에서 이를 줄기차게 送還을 要求했다.

마침내 文民政府 出帆 直後인 1993年 3月 19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으로 送還되었다. 金永三 政府 는 '家族 訪問'이라는 名分으로 리인모의 訪北을 許容(送還)했다. 리인모는 肺炎으로 入院 中이던 부산대病院에서 警察헬기 篇으로 板門店에 到着했다. 板門店 中立國監督委員會에서 待機하고 있던 北朝鮮 家族들, 夫人 김순임과 딸 懸玉, 그리고 外孫주들과 만난 後 휠체어에 依支한 채 北으로 向했다. [3] 北朝鮮은 板門店을 거쳐 平壤 到着까지의 리인모 送還 實況中繼를 反復 報道한 가운데 이를 '金日成.김정일의 恩德' '資本主義에 對한 社會主義의 勝利' 等으로 表現하며 大大的인 宣傳攻勢를 펼쳤다. [4]

그의 北宋은 1992年 7.7宣言 4周年을 맞아 南北 間 相互主義 原則에 立脚, 離散家族 希望地域 定着 提議에 따라 이뤄졌다. 政府는 리인모가 法的으로 大韓民國 國民이라는 點을 勘案해 '長期訪北' 形式을 取했고 그의 住民登錄證을 回收하기도 했다. [5] 김영삼은 退任 後 인터뷰에서 리인모를 條件없이 北朝鮮에 보내게 된 것이 自身의 決斷이었음을 밝혔다. [6] 그는 1993年 3月 9日 各 言論社 編輯·報道局長을 靑瓦臺 晩餐에 招請한 자리에서 記事거리로 "膳物을 주겠다"며 리인모 北送 方針을 밝혔다. 政府와 靑瓦臺 參謀들과 한마디 協議 없이 敏感한 事案을 불쑥 터뜨렸다. [7] 北朝鮮이 리인모 送還을 要求할 때마다 政府는 離散家族 面會所 設置 等의 條件을 내세워 拒否해왔는데 就任 12日째인 김영삼이 느닷없이 "그냥 人道主義的 次元에서 보내줄 것"이라고 發表해버린 것이다.

北으로 送還 後 리인모는 韓國戰爭 前 婚姻했던 夫人과 딸과 함께 生活했다. 北朝鮮은 高位層이 사는 서장동에 單獨住宅을 마련해 주고 主治醫가 딸리고 몸 健康을 回復하기 위한 프로젝트도 進行했다고 한다. 96年 5月 末부터 6月 初 사이 美國에서 身病治療를 받기도 했다. [8] 2001年 8月 19日 `2001年 民族統一大祝典' 南側 代表團에 包含돼 訪北한 養아들 김상원과 8年 5個月 만에 만났다. [9] 2002年 6月엔 金剛山에서 열린 南北統一大會 行事 때 南側 딸을 比較的 健康한 모습으로 만났다고 알려졌다. [10] 2003年 9月 24日 植物人間 狀態라는 리인모를 만난 한완상은 1993年 北送 當時 時限附 判定을 받았는데 10年째 살고 있어서 놀랐다고 밝혔다. 한완상은 送還 當時 統一副總理였다. [11]

리인모는 2007年 6月 16日 89歲로 死亡, 人民張으로 치러져 平壤의 愛國烈士陵 에 安葬되었다. [12] [13] 北朝鮮은 放送을 통해 “前 朝鮮人民軍 從軍記者이고 非轉向 長期囚인 리인모 同志가 南朝鮮의 監獄에서 當한 拷問의 後果(後遺症)로 哀惜하게 逝去했다”고 밝혔다. [14] 夫人 김순임이 2015年 1月 12日 死亡하자 愛國烈士陵에 安置하는 等 葬禮式을 大大的으로 치렀다. [15]

리인모는 非轉向長期囚 첫 送還者로서 北朝鮮에서 줄곧 極盡한 待接을 받았다. '信念과 意志의 化身' '統一의 英雄' 等으로 일컬어졌다. `體制 및 政治宣傳'에 더할 수 없는 좋은 素材였던 것이다. 김일성은 送還 直後인 4月 15日 自身의 生日에 入院 中인 리인모를 찾아 激勵하고 勞動黨 黨員證을 授與했다. '김일성 勳章' '英雄稱號' '國旗勳章 1級'도 授與됐다. 文筆活動의 功勞로 北朝鮮 文筆家·言論人들에게 주어지는 `3·1月刊賞'을 受賞했고 또 統一部門 人士들이 榮譽로 생각하는 `祖國統一上'도 받았다. [16] 그를 主人公으로 한 短篇小說 '93年 3月19日'(著者 한웅嬪)李 95年 發刊됐고, 多部作 映畫 '民族과 運命'(第11~13部)이 만들어졌다. 歌謠와 記念 郵便葉書, 郵票도 나왔다. 2008年 平壤 統一거리에는 銅像이 建立되기도 했다. 兩江道 金亨稷郡에 있는 母校인 擺撥人民學校는 '리인모 人民學校'로 이름을 바꿔달았다. [17] [18] [19] [20]

論難 [ 編輯 ]

大韓民國 內 一部 脫北者의 主張에 따르면, 리인모의 末年에 關해 論難이 있다. 2007年 89歲로 死亡할 때까지 最高의 禮遇를 받았으며 죽은 後에도 '信念과 意志의 典型인 不屈의 統一愛國透寫'라고 稱頌받는 [21] 한便 保守 言論에서는 宣傳用 敎化所 發言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當局에 밉보여 외롭게 죽었다고 主張한다. 送還 當時에 이미 肺炎을 앓아 휠체어 身世였던 리인모는 2003年 9月 以後부터 死亡한 2007年 6月 16日까지의 行跡을 言論에서 이름을 찾기가 힘들다. 그 理由가 鬪病과 老衰함 때문인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當局에 밉보였기 때문인지 不明確하다.

리인모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當局에 밉보였다고 擧論되는 게 敎化所, 卽 受刑施設에서의 發言 때문이다. 問題의 發言은 2008年 펴낸 리준下衣 冊 ‘敎化所 이야기'에 처음 登場하며 劣惡한 環境의 敎化所에서 "3年度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該當 書籍의 事實 與否를 判斷하기 매우 어려우며, 一方的인 主張이 보이기에 信賴하기 어렵다.

參考資料 [ 編輯 ]

聯關 項目 [ 編輯 ]

各州 [ 編輯 ]

  1. “南北頂上會談 앞두고 생각나는 이름, 이인모 先生” . 오마이뉴스. 2018.03.13.  
  2. “‘北으로 간 養아버지 리인모 先生 墓所에 가고 싶다더니…’” . 오마이뉴스. 2015.10.15.  
  3. “[寫眞으로 보는 이주일의 素砂] <129> 非轉向 長期囚 이인모 北韓 送還” . 韓國日報. 2014.03.17.  
  4. “北韓,李仁模氏 送還後 大大的 宣傳 攻勢” . 聯合뉴스. 1993.03.20.  
  5. “死亡한 非轉向長期囚 리인모氏는 누구” . 聯合뉴스. 2007.06.17.  
  6. " 나는 이래서 全斗煥.노태우를 監獄에 보냈다 " . 聯合뉴스. 2007.11.29.  
  7. “[박관용 回顧錄] 大統領 홀로 뛰는 것은 危險千萬” . 시사저널. 2016.05.12.  
  8. “外國서 身病治療韓 北韓 高位 人物들” . 聯合뉴스. 2001.08.15.  
  9. “北送 리인모氏, 訪北 養아들 만나” . 2001.08.20. 2012.12.18.  
  10. “非轉向 長期囚 北送, 그 後 2年” . 2002.09.02. 2012.12.18.  
  11. “[길을 찾아서] 北韓 딸집서 10年째 生存한 리인모 老人” . 한겨레. 2012.12.18.  
  12. 《中央日報》 (2007.7.10) 韓國 言論이 처음 가 본 北朝鮮 '烈士陵' 〈하〉
  13. “北送 非轉向長期囚 리인모氏 死亡” . 聯合뉴스. 2007.06.17.  
  14. “北韓이 4年 前 發刊한 《統一大박論 무엇이 問題인가》 分析해 보니” . 월간조선. 2018.12.20.  
  15. “北韓, 첫 北送 非轉向 長期囚 아내 띄우기 나서” . 聯合뉴스. 2015.01.12.  
  16. “이인모氏의 바쁜 北韓 生活” . 聯合뉴스. 1999.02.24.  
  17. “非轉向 長期囚 夫人도 英雄 待接…北韓의 속셈” . sbs. 2015.01.18.  
  18. “北의 非轉向長期囚 評價와 待遇” . 聯合뉴스. 2005.10.02.  
  19. “北送 非轉向長期囚 '特別' 待遇” . 聯合뉴스. 2007.06.17.  
  20. “北送된 非轉向 長期囚 이인모氏 死亡” . 京鄕新聞. 2007.06.17.  
  21. “北韓, 非轉向長期囚 리인모 띄우기.."불굴의 革命戰士 " . 聯合뉴스. 2015.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