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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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만
身上情報
出生 1954年 10月 30日 ( 1954-10-30 )
大韓民國 江原特別自治道 鐵原
死亡 2022年 12月 31日 ( 2022-12-31 ) (68歲)
職業 寫眞作家
學歷 니스 國立裝飾美術學校 西洋畫科
受賞 '兒를 國際 寫眞 페스티벌' 젊은 作家賞
配偶者 오수미 (離婚, 1978~1986) [1]
子女 2男(애니,네오) [2]
主要 作品
影響

김중만 (金重晩, 1954年 10月 30日 ~ 2022年 12月 31日 )은 大韓民國 寫眞作家 利子 映畫 포스터 廣告 寫眞 監督 이다.

1975年부터 寫眞家로 이름을 알리기 始作했다. 2020年 現在 淸潭洞 스튜디오 '벨벳언더그라운드' 代表이자 NEOLOOK 編輯人이다. 보그 , 엘르 프랑스 雜誌社에서 프리랜서로도 活動하였다.

生涯 [ 編輯 ]

어린 時節 [ 編輯 ]

江原特別自治道 鐵原 에서 出生하여 지난날 한때 慶尙南道 金海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고 그의 아버지는 小兒科 醫師 豫備役 大韓民國 陸軍 中尉 였다. 1971年 中學校 3學年 때 政府派遣醫師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 로 떠나 아프리카의 삶이 始作되었다. [3] 70年代 技術支援으로 派遣된 醫師들의 子女들 大部分은 마땅한 高等敎育機關이 없어 프랑스나 美國으로 留學가는 境遇가 많았다. 그도 1972年 프랑스로 떠난다

大學 生活 [ 編輯 ]

니스 國立應用美術大學 에 들어가 西洋畫를 專攻했다. [4] 니스 國立應用美術大學에서 西洋畫를 專攻하던 中 寫眞作家로 人生을 修正했다. 1977年 프랑스 '兒를 國際 寫眞 페스티벌'에서 젊은 作家賞을 受賞했고, 滿 23歲에 프랑스 '오늘의 寫眞作家 80人'에 最年少 作家로 選定됐다. [5]

寫眞作家 [ 編輯 ]

1977年 서울에서 첫 展示會를 開催했다. 김중만은 展示會를 마치고 다시 파리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6] 1979年 大韓民國 으로 歸國해 1984年 映畫 고래사냥 》으로 映畫 포스터 廣告 寫眞 監督 으로도 데뷔하는 等 寫眞 活動을 하다가 1985年, 1986年 두 次例 國外로 追放됐다. 1988年 韓國으로 國籍을 다시 바꾸고 寫眞作家 最初로 아프리카 사진집을 出版하여 人氣作家로 발돋움했다. 2000年부터 商業 寫眞을 찍기 始作했다. 1990年 김현식 6輯 앨범의 寫眞을 찍기도 했다. 映畫 《 怪物 》, 《 타짜 》, 《 달콤한 人生 》 等의 映畫 포스터와 全度姸 , , 元嬪 , 정우성 , 裵勇浚 , 이병헌 , 고소영 , 강수연 , 金正恩 , 손예진 等 1000餘 名에 이르는 스타와 함께 패션, 廣告 等 多樣한 分野의 寫眞을 찍었다. 2006年 寫眞으로는 돈을 벌지 않겠다며 商業活動 中斷을 宣言했다. 以後 飢餓와 疾病으로 苦生하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後援하면서 世界 奧地와 極地를 오가며 藝術 寫眞에 專念하고 있다가 2022年 12月 31日 死亡했다.

學歷 [ 編輯 ]

以外 經歷 [ 編輯 ]

著書와 寫眞集 [ 編輯 ]

單獨 著書 [ 編輯 ]

  • 《넋두리 김현식》 1991年 2月 1日 ISBN 2005436000059
  • 《인스턴트 커피》 1996年 10月 1日 ISBN   9788970590509
  • 《오키드》 2007年 4月 27日 ISBN   9788934924456
  • 《動物王國》 1999年 12月 31日 ISBN   9788934904663
  • 《아프리카 旅程》 2005年 3月 18日 ISBN   9788934917700
  • 《AFTER RAIN》 2003年 5月 15日 ISBN   9788973817313
  • 《AFTER RAIN 2》 2003年 5月 15日 ISBN   9788973817320
  • 《김중만 寫眞集 It's Alive for Every Child》 2005年 1月 15日 ISBN   9788995134771
  • 《INFINITY YOO SEUNG JUN》 2010年 9月 30日 ISBN   9788934908005
  • 《Sexually Innocent 섹슈얼리 이노선트》2006년 7月 25日 ISBN   9788990641151
  • WILD : 神話 누드集

共著, 寫眞參與 [ 編輯 ]

寫眞展 [ 編輯 ]

  • 1975年 니스 '쟝 피에르 小아르니' 데뷔 個人展
  • 2005年 SIPA 2005 參與

受賞 內譯 [ 編輯 ]

寫眞 關聯 [ 編輯 ]

  • 1977年 프랑스 ARLES 國際寫眞페스티벌 '젊은 作家賞' 受賞
  • 1976年 프랑스 오늘의 寫眞 80人中 最年少 作家로 選定
  • 2000年 패션寫眞假想
  • 2002年 모델라인 2002 베스트 드레서 白鳥上
  • 2010年 第5回 마크 오브 리스펙트上

기타 [ 編輯 ]

  • 2009年 仁川空港 名譽弘報大使
  • 2009年 11月 仁川國際空港 名譽 弘報大使
  • 2009年 9月 플랜코리아 弘報大使
  • 2000年 KOREA.COM 33人의 文化人에 選定
  • 2010年 11月 韓國國際協力團 弘報大使
  • 2010年 10月 G20 頂上會議 成功祈願 스타 서포터즈
  • 2010年 國際開發協力의 날 弘報大使
  • 2011年 5月 文化藝術 名譽敎師
  • 2011年 1月 韓國 文化願 聯合會 弘報大使

哲學 [ 編輯 ]

김중만은 自然 寫眞에서 얼마만큼 가까이 가느냐를 가장 重要한 點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死者를 4.5미터까지 다가가 찍은 적도 있다. 오랜 歲月 속에 野生動物을 찍는 法도 攄得하게 됐다. 野生動物 寫眞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다른 寫眞이 나오기 때문에 첫날 찍으면서부터 짜릿함을 느껴 빠져들었다. [6] 김중만은 100萬張을 찍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1000張 假量은 家族에게 주고 나머지는 國家에 寄贈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圖書館에 모두 展示해 모든 사람들이 마음대로 보고 쓸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7] 김중만은 또한 한 時代를 記錄한 作家가 되는게 꿈이라고 말했다. [6] 37年間 寫眞 生活을 하며 50萬張 以上의 寫眞을 찍었다.

일화 [ 編輯 ]

  • 프랑스에는 아는 사람 없이 아버지의 同僚가 다녔던 學校에 홀로 가게 됐다. 그러나 留學을 보낸 後 아버지도 收入이 없어 學費를 보내주지 못했다. [8] 州에서 가장 큰 1500名이 다니는 高等學校로 進學한 김중만은 唯一한 外國人이라 差別을 받을 걸로 豫想했으나 시골의 學校 親舊들은 外國人인 김중만을 神奇해하며 오히려 關心을 보였다. 1500名中 千名假量은 와인집 아이들이었다. 프랑스는 未成年者도 와인을 購入하거나 마실 수 있으며 다들 와인을 물처럼 마셨다. 學校에서는 女子親舊들이 많이 생겼다. 프랑스語를 가르쳐주겠다고 接近한 것이었다. 그때문에 1年만에 프랑스語를 모두 習得했다. [9] 김중만을 嫉妬하는 男學生들도 거의 없었고 오히려 더 많이 接近해 親舊가 많았다. 시골學校에서 東洋人이 왔다는 게 神奇해한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10] 放學과 週末에는 食堂에서 그릇닦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寄宿舍 費用과 學費를 全部 負擔했다. 點心 食事를 마치고 食堂에 가면 식기가 4미터 程度 쌓여있고 그것을 다 닦으면 저녁食事 그릇이 들어오는 等 일감이 많았다. [8]
  • 부르키나파소 에 가게 된 김중만은 정글이 우거지고 野生動物이 많은 浪漫的인 世界를 想像하고 좋아했다. 하지만 나무 한그루 없이 沙漠밖에 없어 失望했다. 아버지가 그런 곳에 派遣을 가게 된 것에 對해 김중만은 "아버지가 自由主義者였던 것 같다"라고 回顧했다. 아버지는 1999年 死亡했다. 屍身은 아버지의 뜻대로 아프리카와 故鄕에 나눠 묻었다.
  • 美大 在學 中 寫眞을 趣味로 하는 法大에 다니는 親舊가 寄宿舍의 暗室에서 印畫를 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다. 김중만은 5分만에 印畫紙에 그림이 입혀지는 모습을 보고 衝擊을 받았다. [7] 暗室에서 나오고 곧바로 親舊 留學生 집으로 갔다. 그 뒤로 카메라를 빌려 잠잘때와 샤워할때를 除外하고 카메라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寫眞機를 들고 처음 찍은것은 女子親舊의 寫眞이었다. [11] 길에서 누드를 찍기도 했다. 처음에 김중만을 變態로 생각하던 親舊들도 김중만의 뛰어난 寫眞을 보고서는 그러한 誤解를 풀었다. 그래서 學校 女學生들의 모든 누드寫眞을 찍었다.
  • 大學 時節 敎授들은 "그림이 더 힘이 있다"라는 理由로 김중만의 寫眞을 말렸다. 寫眞藝術은 1990年代에 들어서야 藝術로 認定된 分野로써 1970年代엔 프랑스에서도 關心이 없었다. 그러나 20年이 지난 1990年代에 敎授를 찾아갔을때는 敎授들이 "네가 그때 寫眞 하길 잘했다. 只今 同僚들中에 밥먹고 사는 사람이 너 하나밖에 없다"며 弄談調로 激勵하기도 했다. [12]
  • 1977年 서울에서 첫 展示會를 열게 된 契機는 칸 美術祭 參席을 위해 프랑스에 간 大韓民國 代表 畫家들이 김중만의 집에 起居하다가 그의 寫眞을 보고 "韓國에 이런 寫眞이 없다"며 展示會를 해달라고 要請했기 때문이었다. 그 要請을 받아들여 展示會를 위해 서울에 들어갔다.
  • 1985年 추방당한 理由는 外貌 때문이었다. 就職을 위해 프랑스 國籍을 取得했는데 當時 外國 國籍者가 事前 申告 없이 展示會를 하면 追放을 當한다는 規定이 있었다. 김중만은 寫眞을 팔지도 않았고 찍는것에만 關心이 있었다. 모든 作家들이 追放되지는 않았지만 김중만은 當時 長髮의 머리에 韓國人 最初로 男子가 귀고리를 한 自身의 모습이 破格的이라 物議를 일으켰다는 理由로 追放된 것 같다고 말했다. [13] 追放이 確定되면 밤에 公務員들이 찾아와 짐을 싸서 只今 出國해야 한다고 말하며 바로 空港으로 데려가 追放시킨다. 目的地에 相關 없이 첫 飛行機 아무곳에나 넣어 出國시켰다. 그렇게 아는 사람이 한名도 없는 日本으로 간 김중만은 도쿄 하네다 空港에서 近處 하네다 호텔까지 걸어서 移動해 "돈이 없으니 來日 親舊가 오면 내줄테니 재워달라"라고 하여 하룻밤을 묵었다. 그러던중 窓門 밖으로 水泳場이 보였는데 바닥이 갈라진 틈 사이로 雜草가 나 있는 것을 보며 "나와 같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다른 스타일의 寫眞을 찍게 되는 轉換點이 되었다. [14] 以前까지는 밝고 즐거운 寫眞을 찍었으나 以後로는 憂鬱한 느낌에 그냥 스쳐지나갔던 것들에 關心을 갖기 始作했다. [15]
  • 1986年 두 番째 追放을 當한 것은 1次 追放을 當한 지 6個月 뒤였다. 신상옥 監督의 아이들을 김중만이 데리고 살았는데 어느날 安企部에서 公務員들이 새벽에 들어와 "北韓에서 최은희, 申相玉 夫婦가 脫出했다"라고 말했다. 김중만은 막내딸이 아버지를 본적이 없으므로 잘됐다고 생각했다. 집에는 俳優 오수미와 아이들 둘이 있었다. 신상옥 監督의 아이들은 김중만을 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다. 安企部 職員들은 理由도 알려주지 않으며 追放했고 亦是 첫 番째 飛行機인 美國 LA로 갔다. [16] 김중만은 只今도 追放된 理由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두 番째 追放에 김중만은 精神的 苦痛을 받았다. 아는 사람도 없고 멍하니 空港에 있었다. 그러던중 空港에 리무진이 서더니 黑人이 "왜 여기 앉아있느냐"라고 묻는데 프랑스語 發音의 英語라 김중만은 반가워 프랑스語로 "돈이 없어서 여기에 앉아있다"라고 對答했다. 그러자 黑人이 놀라며 "내가 프랑스系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라며 LA에서 第一 싼 호텔로 데려다주었고 그곳에서 8個月을 머물렀다. [6] 하루 6달러의 低廉한 價格을 支拂하기 위해 김중만은 1週日에 한 番씩 寫眞 現像所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1章 印畫할 때마다 1달러를 벌 수 있었는데 하루에 100張 假量씩 했다. 너무 힘들어 카메라를 들고 밖에 나가 寫眞을 찍었다. 1986年 當時만 해도 觀光客들은 길에 다니면 다 털릴 程度로 治安이 좋지 않았으나 多幸히 김중만은 外貌 때문에 8個月 동안 한番도 攻擊을 받은 적이 없다. 美國에서 生活하던 中 어느날 車 한臺가 언덕에서 올라왔다. 그 車는 헤드라이트가 하나 故障난 外燈次였다. 寫眞을 찍었다. 외눈박이 自動車가 어둠을 헤쳐가는 모습을 보고 죽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17] 김중만은 두 番의 追放을 當했지만 韓國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어렸을적 프랑스에서도 혼자 다니며 韓國이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追放된 것도 自身이 잘못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거라고 생각한다. 追放에 對해서는 "좋은 寫眞을 찍으라고 그런 經驗을 시켜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7]
  • 김중만은 2000年 以前까지 寫眞을 商業的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2000年이 지나서 생각해보니 마흔이 넘은 自身이 아직도 집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扶養하고 있는 家族들에게 未安해져 名銜을 만들고 스튜디오를 設立했다. [18] 김중만은 熱心히 일했고 20팀 以上이 김중만의 寫眞 撮影을 기다리기도 했다. 이때 全度姸, 비, 元嬪, 정우성, 裵勇浚, 이병헌, 고소영, 강수연, 金正恩, 손예진 等等 1000餘 名에 이르는 스타와 패션寫眞, 廣告, 映畫 포스터 等 多樣한 分野의 寫眞을 찍었다. [19] 이 外에도 風光·動物·꽃 等의 寫眞도 찍고있다.
  • 김중만은 大韓民國 最高의 女俳優는 全度姸이라 생각한다. 다른 俳優들도 나름대로 카리스마가 있는데 전도연은 寫眞 찍기 前에도 '正말 배우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모습을 봤다. [18]
  • 2006年 商業寫眞을 抛棄한다고 宣言한 理由는 50臺가 훨씬 넘어선 나이임을 생각해 뭔가 다른 寫眞價의 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只今도 輸入이 全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날 한국관광공사에서 電話가 오더니 大韓民國 葉書를 만들어달라는 付託을 받았다. 그러면서 全國을 다니며 寫眞을 찍으며 韓國의 아름다운 곳이 많다는 것을 깨달으며 너무 밖으로만 나가려 했구나 하며 反省하게 됐다. 그래서 文化財廳 等에서도 連絡이 와서 일을 하며 收入을 얻고있다. [20]
  • 김중만의 寫眞은 大韓民國 寫眞作家 最初로 소더비 競賣 에 登載되어 最小 2萬달러 以上의 價格에 팔리고 있다. [21] * 조선희 를 가르친 것으로도 有名하다.

各州 [ 編輯 ]

  1. 輪禍 死亡 오수미氏 긴 事緣 짧은 生涯로 비운 1992年 7月
  2. 신상균(남)과 神勝利(女)는 오수미와 그女의 招魂 男便 申相玉이 사이에서 낳은 子女들이다. 故 신상옥 監督 딸 神勝利, 寫眞作家와 結婚 뉴시스 2006年 9月
  3. 김중만 “그女 앞에선 名品 時計가 부끄러웠다” 中央日報 2009年 6月
  4. 김중만 "많은 女子親舊들 옷 벗겨" 거침없는 發言 話題 韓國經濟 2009年 6月
  5. 仁川空港 名譽弘報大使에 寫眞作家 김중만氏 파이넨셜뉴스 2009年 11月
  6. 《黃金漁場》 <무릎팍道士> 2009年 7月
  7. 寫眞作家 김중만, "最高의 女俳優는 全度姸" 마이데일리 2009年 6月
  8. 김중만 “프 留學 時節 學校 女學生들 다 벗겼다” 爆彈發言 Archived 2016年 3月 4日 - 웨이백 머신 뉴스엔 2009年 6月
  9. 韓國男子 귀고리 1號' 김중만 "나의 佛語實力은 수많은 女子親舊 德分 Archived 2016年 3月 4日 - 웨이백 머신 오토타임스 2009年 6月
  10. 김중만 "留學時節 女學生들 다 벗겼다" 무릎팍 道士 깜짝 스포츠傾向 2009年 6月
  11. 무릎팍道士’ 出演 김중만, “카메라만 들면 精神줄 놓아…” 財經一步 2009年 6月
  12. 김중만 “學校에 있는 女子들 다 벗겼다” 서울新聞 2009年 6月
  13. 김중만, '大韓民國 男子 귀고리 1號' 追放 通報! Archived 2013年 12月 20日 - 웨이백 머신 아트뉴스 2009年 6月
  14. 김중만, “두 番의 追放, 하지만 나는 祖國을 사랑한다 osen 2009年 6月
  15. 김중만, 두 番의 追放 '絶望속에서 希望은 寫眞' Archived 2013年 12月 19日 - 웨이백 머신 깜뉴스 2009年 6月
  16. 김중만, '무릎팍道士' 出演 後 前婦人 俳優 오수미 '關心急增 Archived 2016年 8月 13日 - 웨이백 머신 맥스뉴스 2009年 6月
  17. 김중만, “두 番의 追放, 하지만 나는 祖國을 사랑한다” osen 2009年 6月
  18. 김중만, "最高의 女俳優는 全度姸!" Archived 2016年 3月 4日 - 웨이백 머신 아츠뉴스 2009年 6月
  19. 예스24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009年 6月
  20. 김중만, “最高의 女俳優는 全度姸” osen 2009年 6月
  21. 뉴칼레도니아 寫眞展 여는 김중만 每日經濟 2008年 12月

外部 링크 [ 編輯 ]

深層 記事와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