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聖泰 (191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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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聖泰
金聖泰
基本 情報
出生 1910年 11月 9日 ( 1910-11-09 )
일제강점기 日帝 强占期 京城府
死亡 2012年 4月 21日 ( 2012-04-21 ) (101歲)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性別 男性
職業 바이올린 演奏者
作曲家
指揮者
大學 敎授
장르 西洋 古典 音樂
活動 時期 1934年 ~ 2012年
樂器 바이올린 , 指揮
學歷 서울대 大學院
宗敎 改新敎

金聖泰 (金聖泰, 日本式 이름: 金城聖泰 哥네時로 세이타이 [ * ] , 1910年 11月 9日 ~ 2012年 4月 21日 )는 大韓民國 바이올린 演奏者 , 作曲家 , 指揮者 , 音樂敎育家이다. 號는 악席(樂石), 要石(謠石), 落石(洛石), 山南(山南)이다.

生涯 [ 編輯 ]

京城府 改新敎 家庭에서 出生하였고 更新中學校 연희전문학교 를 卒業했다. 이때까지는 獨學으로 音樂을 工夫했으며, 연희전문에서 만난 현제명 의 影響으로 大學 卒業 後 日本 으로 留學하여 도쿄 高等音樂學院 에서 作曲을 專攻했다. 韓國人으로는 最初로 日本에서 作曲을 工夫한 音樂家였다. [1]

歸國한 뒤 京城保育學校 音樂主任을 始作으로 高麗交響樂團 指揮者를 지내며 홍난파 , 玄濟明 等과 더불어 韓國의 西洋音樂 發展에 큰 寄與를 했다.

解放 後에는 玄濟明이 서울大學校 에 音樂大學을 設立했을 때 함께 參與하였다. 1955年에는 美國 인디애나 州立大學校 音大에서 作曲 理論을 硏究하였고, 연세대에서 名譽文學博士 學位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音大 學長, 大韓民國 藝術院 會員, 韓國 音協 拷問, 高麗 및 서울交響樂團 客員指揮者를 歷任하였다. [2]

所屬 [ 編輯 ]

以外 經歷 [ 編輯 ]

  • 新民黨 文化藝術行政特任拷問(1977年 6月 ~ 1978年 3月)

著書 [ 編輯 ]

著書로는 《惡田》, 《和聲法》, 《對位法》 等이 있으며 樂譜 出版으로서는 藝術 歌曲集人 《交響的 綺想曲》,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等이 있다. [2]

代表作 [ 編輯 ]

作品으로는 〈交響的 綺想曲〉을 비롯하여 〈絃樂 4重奏〉, 〈絃樂合을 위한 모음曲〉,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等이 있으며, 交聲曲(交聲曲) 〈비바람 속에〉와 連歌曲(連歌曲) 〈꽃〉, 〈素月(素月) 歌曲集〉, 〈산유화〉, 〈離別의 노래〉 外 數十 曲의 歌曲 等이 있다. [2] 〈즐거운 우리집〉, 〈동심초〉, 〈못잊어〉 等의 歌曲도 有名하다. 童謠 잘자라 우리아가 가 있다.

受賞 [ 編輯 ]

韓國放送倫理委員會 委員(1971)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理事長(1973) 職位를 지냈고, 예음문화재단 會長(1984), 대한민국예술원 院長(1993)을 지냈다. 文化勳章 모란장과 國民勳章 동백장을 徐薰 받았으며, 대한민국예술원上, 3·1文化相 , 5·16民族賞 도 受賞했다.

親日 論難 [ 編輯 ]

日帝强占期 末期에 御用 音樂인 團體 朝鮮音樂協會 에 參與했고, 김생려 等이 組織하여 '國民音樂'을 普及한 京城厚生室內樂團 에서도 活動했다. 滿洲國 에서 國策 樂團으로 組織된 滿洲新京交響樂團 에 入團하여 《사랑과 怨讐》의 映畫 音樂을 作曲하기도 했다.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친일인명사전 에 收錄하기 위해 整理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音樂 部門에 選定되었고, 같은 해 서울大學校 校內 團體가 發表한 '서울대학교 出身 親日人物 1次 12人 名單'에도 들어 있다. [3]

學歷 [ 編輯 ]

名譽 博士 學位 [ 編輯 ]

各州 [ 編輯 ]

  1. 李世基 (2000年 11月). “늘 謙虛하게 藝術家의 期待와 自尊心 지켜온 音樂의 巨木” . 《웹진 아르코》.  
  2. 韓國音樂/韓國音樂/韓國의 西洋音樂家/作曲家/金聖泰, 《글로벌 世界 大百科》
  3. 조호진 (2005年 4月 7日). “서울大 日帝淸算位, 1次 親日人物 12名 發表” . 오마이뉴스 . 2008年 5月 28日에 確認함 .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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