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聖泰
(金聖泰,
日本式 이름:
金城聖泰
哥네時로 세이타이
[
*
]
,
1910年
11月 9日
~
2012年
4月 21日
)는
大韓民國
의
바이올린 演奏者
,
作曲家
,
指揮者
, 音樂敎育家이다. 號는 악席(樂石), 要石(謠石), 落石(洛石), 山南(山南)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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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京城府
의
改新敎
家庭에서 出生하였고
更新中學校
와
연희전문학교
를 卒業했다. 이때까지는 獨學으로 音樂을 工夫했으며, 연희전문에서 만난
현제명
의 影響으로 大學 卒業 後
日本
으로 留學하여
도쿄 高等音樂學院
에서 作曲을 專攻했다. 韓國人으로는 最初로 日本에서 作曲을 工夫한 音樂家였다.
[1]
歸國한 뒤
京城保育學校
音樂主任을 始作으로
高麗交響樂團
指揮者를 지내며
홍난파
, 玄濟明 等과 더불어 韓國의 西洋音樂 發展에 큰 寄與를 했다.
解放 後에는 玄濟明이
서울大學校
에 音樂大學을 設立했을 때 함께 參與하였다. 1955年에는 美國 인디애나 州立大學校 音大에서 作曲 理論을 硏究하였고, 연세대에서 名譽文學博士 學位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音大 學長, 大韓民國 藝術院 會員, 韓國 音協 拷問, 高麗 및
서울交響樂團
客員指揮者를 歷任하였다.
[2]
所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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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外 經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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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前
新民黨
文化藝術行政特任拷問(1977年 6月 ~ 1978年 3月)
著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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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書로는 《惡田》, 《和聲法》, 《對位法》 等이 있으며 樂譜 出版으로서는 藝術 歌曲集人 《交響的 綺想曲》,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等이 있다.
[2]
代表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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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品으로는 〈交響的 綺想曲〉을 비롯하여 〈絃樂 4重奏〉, 〈絃樂合을 위한 모음曲〉,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等이 있으며, 交聲曲(交聲曲) 〈비바람 속에〉와 連歌曲(連歌曲) 〈꽃〉, 〈素月(素月) 歌曲集〉, 〈산유화〉, 〈離別의 노래〉 外 數十 曲의 歌曲 等이 있다.
[2]
〈즐거운 우리집〉, 〈동심초〉, 〈못잊어〉 等의 歌曲도 有名하다. 童謠
잘자라 우리아가
가 있다.
受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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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放送倫理委員會
委員(1971)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理事長(1973) 職位를 지냈고,
예음문화재단
會長(1984),
대한민국예술원
院長(1993)을 지냈다.
文化勳章
모란장과
國民勳章
동백장을 徐薰 받았으며, 대한민국예술원上,
3·1文化相
,
5·16民族賞
도 受賞했다.
親日 論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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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强占期
末期에 御用 音樂인 團體
朝鮮音樂協會
에 參與했고,
김생려
等이 組織하여 '國民音樂'을 普及한
京城厚生室內樂團
에서도 活動했다.
滿洲國
에서 國策 樂團으로 組織된
滿洲新京交響樂團
에 入團하여 《사랑과 怨讐》의 映畫 音樂을 作曲하기도 했다.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친일인명사전
에 收錄하기 위해 整理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音樂 部門에 選定되었고, 같은 해 서울大學校 校內 團體가 發表한 '서울대학교 出身 親日人物 1次 12人 名單'에도 들어 있다.
[3]
學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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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譽 博士 學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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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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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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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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