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 (企業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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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
身上情報
出生 1918年 8月 13日 ( 1918-08-13 )
日帝强占期 朝鮮 慶尙南道 蔚州郡 언양면 어음리
死亡 1996年 7月 5日 ( 1996-07-05 ) (77歲)
性別 男性
本館 月城
經歷 三道그룹 創業者, 初代 會長
所屬 三道그룹

김만중 (金萬重, 1918年 8月 13日 ~ 1996年 7月 5日 )은 大韓民國 의 企業人이다. 三道그룹 의 創業者이자 初代 會長으로 衣類加工輸出의 先驅者役割을 맡아 온 纖維業界 元老企業人으로 잘 알려져있다. 三道그룹 은 韓國 最初로 衣類 輸出을 일궈낸 企業으로, 纖維 및 지퍼 輸出, 開發, 建設, 電子, 化學, 自動車部品, 호텔 經營 等을 中心으로 14個 國家에 系列社 및 事務所와 約 9千名의 社員을 둔 財界 50位 안에 드는 大企業이었다. 金萬重은 生前에 大韓民國의 産業 發展 및 國威宣揚에 寄與한 財界人物로 뽑힌다.


生涯 [ 編輯 ]

出生 및 學歷 [ 編輯 ]

1918年 陽曆 8月13日, 陰曆 7月7日, 慶南 蔚州郡 언양면 어음리에서 父親 金泳鎭 功過 母親 이봉순 女史 사이의 5男2女 가운데 네째 아들로 태어났다.

本貫은 慶州 月城 이고 新羅王朝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 의 셋째아들 領分共의 後孫으로 領分公派 37代孫이다. 金萬重의 曾祖父때 까지는 慶州 에 살았으나 조부 때 언양 으로 移住했다.

언양公立普通學校 (現 언양初等學校), 釜山第2商業學校 (現 開城高等學校 ) 卒業 後 就業前線에 뛰어들었다.

初期 經歷 [1] [ 編輯 ]

日本 오사카 로 건너가 日本綜合貿易商社 도멘 (現 도요타通常 )에 入社하였고, 泰國 等 東南아시아 一帶에서 勤務하였다.

방콕 에서 第2次 世界 大戰 의 終了를 맞았던 金萬重은 가진 모든 돈을 銀行에 貯金을 했다. 다른 사람은 金, 銀, 寶石을 사는데, 身邊의 安全을 생각해서 내린 決定이었지만 뒤돌아보니 미련했다고, 이를 記憶하며 70年代 基準으로 쌀 100섬 相當의 1千 7백바트가 들은 낡은 預金通帳을 繼續 간직했다고 한다.

光復 後에는 歸國해 經驗을 土臺로 朝鮮絹織韓國生死에 入社, 纖維 외길만 걸어왔다.

1951年 貿易業에 進出하여 身光商事를 創立하였다.

삼도물산 設立 - 國內 最初 衣類 輸出 [2] [ 編輯 ]

金萬重 會長

1960年 4月에 資本金 500萬원으로 삼도물산 을 創立 하여 國內 最初로 衣類 輸出의 길을 열었다. 천우사와 함께 國內 縫製品 輸出의 큰 軸을 擔當하였다.

衣類의 境遇는 1961年 貿易會社인 천우사 전택보 會長과 삼도물산 金萬重 會長이 처음 保稅加工으로 始作해 個當 4달러짜리 바지를 輸出한 것이 韓國 衣類의 첫 輸出이었다. [3]

金萬重 會長은 平素에 한段階씩 오르는 誠實과 他企業에 害를 주지 않는 經營을 强調하였다.

『每事를 自身의 陵域에 알맞게 맞춰 해나간다는 것이 平素의 所信입니다. 이것은 企業뿐만 아니라 家庭이나 個人에게도 適用될수 있는 原理입니다. 남이 場에 간다고 빈 지게 지고 따라갈 수는 없는 일이죠』


金萬重 會長은 謙遜함, 그리고 專門人 爲主 經營을 이루어 왔다.

『恒常 欲心안내고 아는체 하지 않으려고 힘쓰고 있읍니다. 선무당이 사람잡는 式의 愚를 犯하지 않기 위해 專門人들에게 맡겨 그들의 能力을 十分發揮하도록 努力하고 있읍니다』


또한 그는 時代에 앞서 女性 人力 問題에 對한 硏究도 깊었다.

『人力難 時代를 맞아 인譯 및 生産管理 面에서도 새로운 技法이 講究되지 않으면 안될 時點에 이르렀읍니다. 美國이나 「유럽」에 가보면 10年 以上의 經驗을 가진 高齡의 女工들이 眞摯하게 作業하고 있는 光景을 쉽게 目擊할 수 있읍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고작 1,2年 일하고는 그만두거나 結婚해버려요. 큰 人譯의 浪費가 아닐수 없읍니다. 따라서 經驗者들의 人役을 어떻게 效率的으로 活用할수 있느냐를 인譯 管理面에서 硏究하고 있읍니다』


1963年 80萬 달러, 1965年 270萬 달러, 1973年 3,500萬 달러로 高度成長을 거듭하여, 國內 第 1位의 縫製輸出業體와 衣類專門 輸出業體 成長하였다.

1974年 9月 지퍼工場을 建立하였고, 1979年 11月 衣類 單一 品目으로는 最初로 輸出 1億弗을 이루었다.

三道그룹 ? 經營의 多角化 및 經營權 承繼 [4] [ 編輯 ]

1980年 삼도물산 創立 20周年 理事會에서 會長으로 推戴되었고, 三道綜合開發 및 三道綜合建設을 本格的으로 推進하며 會社의 規模를 擴張하였다. 中東地域 에서 부터 工事를 始作하게 되어 國內에서도 社屋으로부터 始作, 各種 建設을 展開하였다.

三挑戰者로 오디오 物品을 輸出하고, 메리야스 工場을 建設하며 經營의 多角化를 推進하였다.

1987年부터 삼도물산 및 系列社 의 經營權을 아들들 김상헌, 김재헌, 김재하 社長에게 물려주었다.

經營難 [ 編輯 ]

海外 쿼터制와 外換危機 等에 依한 經營難이 加重되면서 三道그룹은 90年代 後半 法定管理를 申請하였다. 字句를 위하여 系列社 가운데 東海터미널, 風無엔지니어링, 三道 괌(호텔業) 等 3個社를 賣却하고 系列社가 保有한 不動産을 處分하는 것 等을 骨子로 한 計劃書를 法院에 提出했다.

死亡 [ 編輯 ]

1996年 7月 5日 午後 3時30分頃 서울대학교 病院 에서 享年 78歲로 他界하였다. 葬禮式은 서울特別市 강남구 일원동 所在 三星서울病院 에서 치루어졌다. [5]

賞勳 [ 編輯 ]

輸出의 날 行事에서 여섯 次例나 大統領 表彰 을 받으며 韓國 輸出 産業의 功勞를 認定 받았다.

1968年 銅塔産業勳章 , 1976年 은탑産業勳章 을 받았고, 1977年 第14回 輸出의 날에는 輸出業體 最高의 榮譽인 金塔産業勳章 을 받았다. 1979年에는 纖維製品 單一品目으로 最初 輸出 1億 불을 이룬 寄與度를 認定받아 "1億 불 塔"을 받았다.

그가 他界한 後에도 三道그룹은 1998年에 두番째 은탑産業勳章 (代身通商)을 받았다.

家族關係 [ 編輯 ]

  • 配偶者: 추영수(秋永壽) (1926~ 2012)
    • 長男: 김상헌 (1948 ~ )
    • 長女: 김의순 (1950 ~ )
    • 次男: 김재헌 (1954 ~ )
    • 三南: 김재하 (1955 ~ )

기타經歷 [ 編輯 ]

  • 韓國衣類輸出組合 理事長 [6]
  • 한국보歲加工品輸出協會 會長/副會長 [7]
  • 財團法人 백양奬學會의 第 1代 歷代 理事長 [8]
  • 도멘 (現 Toyota Tsusho Corporation ) 名譽顧問 (1992)

各州 [ 編輯 ]

  1. “必勝社長學三道그룹社長 김만중” . 1979年 1月 22日 . 2023年 5月 10日에 確認함 .  
  2. “必勝社長學三道그룹社長 김만중” . 1979年 1月 22日 . 2023年 5月 10日에 確認함 .  
  3. “≪TIN 뉴스≫ 纖維 單一 業種 最初 100億弗 輸出 30돌(1)” . 2023年 5月 10日에 確認함 .  
  4. “三道그룹 2歲經營體制로” . 1987年 12月 1日 . 2023年 5月 10日에 確認함 .  
  5. “김만중 三道그룹會長 別世” . 1996年 7月 6日 . 2023年 5月 10日에 確認함 .  
  6. “他界한 김만중 삼도물산會長 衣類輸出 開拓..."纖維代父 " . 1996年 7月 6日 . 2023年 8月 26日에 確認함 .  
  7. “會長전택보氏選出 保稅加工水協定總” . 1968年 2月 19日 . 2023年 8月 26日에 確認함 .  
  8. 修正: 2013-06-05 14:32:56, 入力: 2013-06-05 10:59:50. “盧武鉉 前 大統領 '자랑스런 백양引上 ' . 2023年 5月 10日에 確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