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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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창 (金吉昌, 1892年 11月 11日 ~ 1977年 )은 日帝侵略期 親日反民族行爲者로서 韓國 長老敎 牧師 이다. 釜山 경성대學校 設立者다. 本貫은 金海 이다.

生涯 [ 編輯 ]

慶尙南道 高聲 出生으로 慶南聖經學校와 平壤神學校 에서 神學을 工夫했다. 1923年 平壤神學校를 卒業하고 이듬해 牧師 按手를 받아 牧會者가 되었다. 부산부 居昌郡 等 慶南 地域에서 牧會 活動을 하다가, 도쿄 의 留學生 敎會를 거쳐 1933年 釜山 降書敎會 에 赴任하여 死亡할 때까지 33年間 이 곳에서 在職했다.

1933年 朝鮮基督敎聯合會 會長이 되는 等 基督敎界의 巨物級 人士로 活動하였는데, 日帝强占期 末期에 神社參拜 强要 에 同調해 率先한 일이 있다. 1938年 長老敎 敎壇이 神社參拜를 決意할 때 長老敎總會 副會長으로서 이 決定을 이끌었고, 可決 直後 盧會 任員들을 引率해 그 길로 平壤神社를 參拜했다. 基督敎界 指導者를 代表하여 逃逸한 뒤 神宮 을 直接 參拜하기도 했다. 慶南 長老界 皇民化의 先鋒將이었다는 評價가 있다. [1]

特히 神社參拜를 贊成하거나 實踐한 데에서 그치지 않고 反對하는 사람들을 密告했다는 嫌疑까지 받아 光復 後인 1949年 反民族行爲處罰法 에 依해 逮捕되었다. 反民特委 起訴意見書에는 김길창이 敎人의 皇民化를 主導的으로 推進했고, 神社參拜를 통한 民族精神 抹殺에 앞장섰으며 警察과 結託하여 神社參拜 反對 牧師와 敎人을 彈壓했다는 內容이 들어 있다. 김길창은 3·1 運動 에 參加한 民族代表 33人 에 對해 敎會를 私利私慾에 利用하다가 失敗한 것이라고 評價하며 卑下하기도 했다.

反民特委에서 起訴猶豫로 풀려나온 뒤 여러 學校 財團의 設立과 運營에 參與하며 敎育界에서 活動했다. 釜山 경성대學校 의 全身이 된 慶南師範대숙을 1955年 設立해 1966年 漢城女子失業初級大學으로 발전시킨 것이 代表的이며, 釜山신學校 남성초등학교 , 男性女高 , 帶同中學校 , 광성工業高等學校(現 경성전자고 ), 大同高等學校 , 勳性女高(現 계성女子商業高等學校 ), 巨濟中學校(現 巨星中學校 )를 設立하는 等 釜山 私立敎育의 礎石을 다진 功勞者였다. 김길창은 日帝 末期의 行跡에 對해서는 回顧錄 《말씀따라 限平生》을 통해 敎會를 살리기 위해 不可避한 일이었다고 解明하였다. [2]

2002年 發表된 親日派 708人 名單 의 其他 部門과, 2008年 公開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의 宗敎 部門에 選定되었다. 2009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 包含되었다.

後孫 [ 編輯 ]

아들 김근제(學長, 總長 歷任), 孫子 김대성(總長, 理事長 歷任), 曾孫子 김동기(現 理事長과 現 總長), 송수건(김동기의 姨母夫)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

  1. 안병기 (2007年 9月 19日). “혹 親日 淸算은 우리 歷史의 雨傘이 아닐까 - 全州 歷史博物館 '캐리커처로 보는 抗日과 親日戰'을 보고” . 오마이뉴스 . 2008年 6月 5日에 確認함 .  
  2. 조호진 (2004年 8月 14日). " 韓國 敎會 親日行跡 말할 때 됐다" - CBS-TV 8·15特輯 다큐 '韓國敎會의 親日을 말한다 ' . 오마이뉴스 . 2008年 6月 5日에 確認함 .  
  3. “釜山 '西歐 빛낸 人物'에 親日人士 登載…光復會 反撥” . 聯合뉴스. 2017.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