苦痛 (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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苦痛의 哲學 神學 , 哲學 , 文學 等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아픔 或은 苦痛 (모두 pain)을 取扱한다.

아픔에 對해서는 生物學者, 心理學者, 醫學者 等 自然科學 分野 硏究者들 뿐만 아니라 人文學 分野에서의 哲學者 神學者 等도 자주 論해 왔다. 近來에는 人間의 經驗 (이나 現象 )이라는 것이 가지는 基本的인 性質에 關해서 哲學的인 論議(特히 영미哲學 系統의 心理哲學 )를 展開할 때, 例를 들면 意識 現象으로서의 感覺質 에 對해 硏究할 때 자주 言及되고 있다.

苦痛에 對한 哲學的 論議 [ 編輯 ]

18世紀 19世紀 제러미 벤담 마르키 드 사드 는 이 問題에 對해 매우 다른 見解를 갖고 있었다. 벤담은 아픔·苦痛과 氣分 좋음·쾌락 (pain and pleasure)을 客觀的인 現象으로 看做해, 그 原理에 根據해 功利主義 을 定義했다. 그러나, 마르키 드 사드는 完全히 다른 見解를 提示했다. 그는, 아픔·苦痛은 그 自體로 倫理性 을 가진다고 해, 아픔의 追求와 强要는 有用하며 氣分 좋다고도 말할 수 있고, 그것은 實로 國家 의 目的, 卽 報復的으로 苦痛을 주고 싶다는 欲求를 채우는 것, 例를 들면 을 利用하고 그것을 實施하니까 (그의 時代에는, 實際, 刑罰 은 苦痛을 分配하는 것이었다), 라고 보았던 것이다. 19世紀 유럽에서는 벤담의 見解가 普及해, 새디즘의 (아픔으로 가득 찬) 見解가 너무나 剛하게 抑制되었으므로, 사드가 豫見한 것처럼, 19世紀의 見解는 耽溺하는 快樂 그 自體가 되었다. 빅토리아 時代 는 자주 이러한 爲先 의 例로서 들 수 있다.

여러 有名한 20世紀 의 哲學者 (例를 들면 J. J. C. 스마트 , 데이비드 루이스 , 데이비드 암스트롱 )는 아픔이 가지는 意味에 對해 말했으며, 아픔에 依해 아는 人間의 經驗 의 性質이라는 것에 對해서도 探究했다. 또, 아픔은 여러 가지 社會 哲學 敵 論究의 主題이기도 했다. 例를 들면 미셸 푸코 는 아픔의 生物 醫學的 모델과 苦痛을 일으키는 刑罰의 回避라는 것은, 人類라는 것이 大體로 안기 十常인 啓蒙思想 의 範疇에 들어간다고 보았다.

精神哲學에서 '사람은 마음 의《내적 世界》에 居住하는 것에 依해서, 自己 自身의 意識 에 對한 內在的인 認識을 가진다' 라는 것이, 자주 先驗的(아프리오리) 原理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內的 世界와 外的 世界를 根本的으로 다르다고 보는 이러한 見解라는 것은 르네 데카르트 가 데카르트的 二元論 의 原理를 確立한 것에 依해서 哲學의 歷史에서 有名해졌다. (데카르트와 같이) 自身의 意識만이 確實한 知識의 中心으로 자리잡게 되면, 《 다른 사람의 마음 》이 存在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것이 哲學의 根本的인 問題로서 發生하게 된다. 다른 말로 表現하면 '唯我論'의 問題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다른 사람의 마음》李 存在하는가의 問題에 對한 論議는 자주 《苦痛》의 槪念을 中心으로 展開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많은 認識論的 懷疑主義者들 사이에서 論議되어 왔다.

現代의 心理哲學的 硏究 [ 編輯 ]

아픔과 苦痛은 오늘날 여러 哲學者에 依해서 다양한 種類의 心理哲學 敵 分析의 槪念으로 硏究되고 있다. 데이비드 루이스 는 그의 論文 ' 狂人의 苦痛과 火星人의 苦痛 ' 中에서, 그류의 機能主義 를 證明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타입의 아픔의 例示를 들고 있다. 假令 그는 狂人 中에서 생기는 아픔의 한 種類에 對해서 定義한다. 그 狂人은 우리가 普通 '아픔'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를 膈痛 가운데 외쳐 구르게 하는 原因만이 되지 않고, 오히려 生産的인 힘, 例를 들면 매우 集中시켜 數學에 剛하게 시키는 原因이 되기도 하는데, 그는 이러한 現象을 가리켜 '配線이 어긋나'("wires crossed") 있다고 表現한다. 한便 또다른 事故實驗에서 火星人 의 苦痛은 그에게, 우리의 아픔과 같은 因果 敵 役割을 차지하고 있는 아픔이지만, 그 아픔에 對해서는 매우 다른 生理學的 認知 器具를 가지고 있다 (例를 들면, 火星人은 人間처럼 軸索 의 發火에 依해서가 아니라, 體內의 複雜한 水壓 시스템의 活性化에 依해서 아픔을 느끼는 것도 可能한 것이다). 루이스가 主張하는 바는 이러한 現象 의 兩쪽 모두가 아픔이며, 마음에 對한 어떤 一貫한 理論에서도 考慮돼야 한다는 點이다.

苦痛과 宗敎 [ 編輯 ]

  • 그리스도교 는 苦痛을 하나님의 성도를 성숙시키는 데 必要한 道具의 하나로 본다.
  • 佛敎 에서는 삶은 本來 苦痛이며 持續的인 遂行과 窮極的인 解脫을 통해서 克服된다고 한다.

그리스도교와 苦痛 [ 編輯 ]

1. 美國의 精神과 醫師이자 神學者인 스콧 펙 (Margan Scott Peck)은 自身의 著書인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이렇게 썼다. [1]

삶은 苦痛의 바다, 卽 苦海苦海다. 이것은 삶의 眞理 가운데 가장 確實한 眞理다. 그러나 이러한 平凡한 眞理를 理解하고 받아들일 때 삶은 더 以上 苦海가 아니다. 다시 말해,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이를 理解하고 受容하게 될 때, 삶은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비로소 삶의 問題에 對해 그 解答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大部分의 사람들은 삶이 어렵다는 이 분명한 眞理를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삶이란 대수롭지 않으며 쉬운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問題와 어려움이 苛酷하다며 挫折하고 抛棄해 버리고 만다.

그는 삶에서 發生하는 必然的이고 不可避한 苦痛을 能動的으로 甘受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不可避한 苦痛을 避하려고 하면 結果的으로는 더 많은 苦痛을 겪게 된다고 主張한다.

삶이 고통스럽다는 事實을 眞情으로 理解하고 받아들이면, 삶은 견디지 못할 짐이 아니다. 또한 삶은 問題의 連續이다. 삶이 힘든 것은 問題를 直面하고 解決하는 過程이 苦痛스러워서다. 하지만 當面한 問題를 解決하는 이 모든 過程 속에 삶의 意味가 있다. 精神的/靈的으로 成長하는 길은 오로지 問題를 통해서만 可能하다. 問題란 사라지지 않는다. 問題는 부딪쳐서 解決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靈魂의 成長과 發展에 永遠히 障礙가 된다.“그것은 내 問題가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問題를 解決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이 代身해 問題를 解決해주기를 바라면서 問題를 解決할 수는 없다. 우리가 우리 行動에 책임지는 것이 어려운 理由는 그 行動의 結果로 따라오는 苦痛을 避하고 싶어서다. 삶이란 온통 個人的 選擇과 決定의 連續임을 알아야 한다. 完全히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자유로워진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限, 各自는 永遠히 犧牲者로 남을 뿐이다.
[2]

스콧 펙이 보는 남에게 苦痛을 주는 惡한 사람들의 特徵들 [ 編輯 ]

自身이 惡하다는 것을 스스로 認定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 罪責感을 避하고 完璧한 自我像을 維持하려는 意圖로 持續的으로 自己欺瞞的이다.
  • 自己欺瞞의 結果로 남을 속인다.
  • 自身의 惡과 罪를 매우 特定한 標的( 犧牲羊 )에 透射한다.(Peck, 1983/1988, p 105 )).
  •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만큼 自己欺瞞을 目的으로 흔히 사랑을 假裝하여 미워한다.
  • 濫用 政治 (感情) 電源 ( "明白한 또는 隱密한 强制로 다른 사람에 따라 自身의 意志의 賦課를"(펙, 1,992分의 1,978, P298 ))
  • 높은 水準의 尊敬을 維持하고 끊임없이 거짓말을 한다.
  • 自身의 罪에 一貫性이 있다. 惡한 사람들은 그들의 罪의 크기가 아니라 그들의 一貫性(破壞의 程度)에 依해 특징지어진다.
  • 被害者의 立場에서 생각하지 못함 (犧牲羊 )
  • 批判과 다른 形態의 自己愛的 傷處에 對해 隱密한 偏狹함을 가지고 있다.

2. 神學者 팀 켈러 도 人間事에 避할 수 없는 것이 苦痛이라고 말한다. 苦痛은 巨大한 수수께끼이지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解決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를 信者들에게 要請한다. 苦難까지도 다스리시는 萬物의 主權者心에도 不拘하고, 우리의 人生 풀무불에 뛰어들어 몸소 苦難當하신 예수님을 恒常 바라보라고 助言한다. 그분의 苦痛당하심으로, 우리도 그분과 함께 通過할 수 있다고 提言한다. [3]

苦難이 個人的인 成長과 訓鍊에 變化를 불러오지만 그렇다고 試鍊을 自身을 啓發하는 方法쯤으로 認識해선 안 된다. 그런 視角은 苦痛을 즐기는 一種의 마조히즘(masochism)과 다르지 않다. 心身이 괴로워야 비로소 高潔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굳이 그런 觀點을 갖지 않아도 苦難에는 스스로에게 沒頭하게 만드는 性向이 있다. 自身과 自身의 成長에 執着하면 逆境은 正말로 우리 목을 조르는 올무가 된다. 苦難은 하나님을 以前보다 더 알아 가는 길, 主님을 더 섬기고 닮아 가는 길로 받아들여야 한다.

苦痛과 文學 [ 編輯 ]

1. 윌리엄 셔익스피어는 自身의 有名한 4大 悲劇의 作品들 '햄릿', '리어王', '오셀로', '맥베스'를 통해 人間의 苦痛에 對한 圓熟하고도 冷酷한 洞察과 함께 人間 悲劇의 原因과 本質을 說明한다.

햄릿- 이 冊에서 To be, or not to be가 ‘있음이냐 없음이냐’로 飜譯된 것은 이 悲劇이 單純한 復讐劇이 아니라, 復讐라는 行爲가 人間의 存在와 道德性에 미치는 影響 및 그 行爲의 本質을 追求하는 劇이라는 解釋을 보여준다.
『오셀로』- 이 作品에서는 淸純한 女人 데스데모나와 가장 難解한 人物 이야고를 통하여‘보이는 것’ 卽, 實在와 겉모습 사이의 差異와 苦痛이 가장 重要한 主題를 形成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信賴와 名譽, 家父長的인 政治 狀況과 人種 問題 等 많은 主題와 다양한 解釋을 보여준다.
『맥베스』 - 野望의 늪에 빠진 正直한 靈魂이 惡의 化身으로 破滅해 가는 이야기로 良心의 苦痛, 宿命的 悲劇과 人間의 高貴함을 보여준다.
『리어王』 - 背反, 嫉妬, 憎惡, 欲望, 사랑과 ‘言語’ 사이의 葛藤이 빚어내는 廣大한 人間 內面의 世界에서 葛藤과 그로 인한 苦痛을 보여준다.

2. 詩人이자 哲學者였던 니체 는 自身의 人生 에서 長期間에 걸친 病과 아픔을 經驗한 後, 아픔의 意味라는 것을 삶의 意味 全般에 關聯되는 것으로서 取扱했다. 그의 널리 알려진 箴言들 속에는 아래와 같은, 分明하게 아픔에 關聯되는 것이 있다:

'너는 快樂에 對해 옳다고 말했던 적이 있나?
오오 내 親舊여, 그러면 너는 또 모든 아픔에도 옳다고 말했다.
모든 것은 서로 사랑 속에 結合되어 얽히고 있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보다 剛하게 한다.'

3. 現代 美國의 作家이자 文學評論家 수전 손擇 은 自身의 隨筆 <他人의 苦痛>에서 미디어를 통해 全世界에서 戰爭, 暴力, 疾病 等으로 苦痛받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大衆에게 쉽게 傳達되면서 오히려 他人의 苦痛에 무심해지고 그것을 單純한 憐憫의 感情으로 넘겨버리는 世態가 擴散되는 것을 指摘하며 이렇게 썼다.

"苦痛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憐憫을 느끼는 限, 우리는 우리 自身이 그런 苦痛을 가져온 原因에 連累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憐憫은 우리의 無能力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無辜함도 證明해 주는 셈이다.”

그女는 우리가 他人의 苦痛의 原因이 우리와 어떤 式으로든 連結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것을 깊이 省察하며 思惟하는 連帶의 精神이 必要하다고 力說한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