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욱
(高在旭,
1903年
5月 3日
~
1976年
6月 22日
)은
日帝强占期
와
大韓民國
의 言論人으로,
東亞日報
社의 主筆, 社長, 會長 等을 歷任했다.
金性洙
의 妻조카로, 그의 本妻
고광석
의 조카였다. 號 심강(心崗). 全南 潭陽(潭陽) 出生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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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性洙
의 妻조카로 그의 本妻
고광석
의 親庭 오빠
고광준
의 아들이자, 開化派 官僚였던
고정주
의 孫子였다.
日本
에 遊學, 1930年 日本 교토大學(京都大學) 經濟學部를 卒業하였다. 1931年 동아일보사에 入社, 1940年 編輯局長이 되었으나 같은해 日本이 《東亞日報》를 强制로 廢刊瑕疵, 故鄕에 돌아가 農業에 從事하며 抗日(抗日) 民族主義의 立場을 굽히지 않았다. 1945年 8 ·15光復 以後 동아일보가 復刊되자 동아일보 編輯局長이 되었다가
韓國 戰爭
을 거친 뒤
東亞日報
의 主筆(主筆)李 되었다. 社主인
송진우
,
장덕수
,
金性洙
의 연이은 죽음으로 恐慌狀態에 빠진
東亞日報
의 混亂을 收拾하고 다시 再建하였다.
1961年
에 副社長을 겸하고, 1965年에 國際言論人協會(IPI) 韓國委員長이 되었으며, 그 해 동아일보社 社長이 되었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민주당系 言論을 志向하면서 軍事 政權과 摩擦하였고, 그때마다 그는 軍事 政權 關係者들을 說得하여
東亞日報
의 廢刊 危機를 謀免케 하였다. 1966年에 인촌記念事業會(仁村紀念事業會) 理事長, 1968年에 동아일보사 社長 兼 發行人이 되고, 1971年에 東亞日報社 會長에 就任하였다.
以後 親政府 性向으로 變身하여
1969年
國土統一院 顧問으로 活躍하였으며, 全國記者協會長 ·한국신문편집인협회腸 ·新聞倫理委員會委員長 等 言論 關聯 團體의 張으로 委囑되어 活動했다. 서울市文化相을 受賞하고, 政府로부터는 文化勳章 國民葬을 받았다.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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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言論暢達을 위하여 努力하였으며, 또 自由言論의 實現과 言論人의 地位向上에 크게 貢獻하였다는 評價가 있다. 事後
1977年
'고재욱記念言論賞'이 制定되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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