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相敦
(高相敦,
1948年
12月 28日
~
1979年
5月 29日
)은 過去
大韓民國
의 山岳人이었다. 世界 最高峯
에베레스트 山
(8,848m)를 登頂한 最初의 韓國人이다. 本貫은
濟州
(濟州)이며
濟州特別自治道
濟州市
에서 出生하였고
忠淸北道
淸州市
에서 成長하였다.
學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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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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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대학교
經營學科 2學年을 마치고 中退하였다.
청주대학교
時節, 山岳班에서 專門的 登攀 訓鍊을 받았었다. 中退 後 淸州 煙草 製造廠에서 勤務하기 始作하며 職場 內에 '相當 山岳會'를 組織해 活動하였다.
1970年
3月
에는
對한 山岳 聯盟
會員으로 活動을 始作했고,
1974年
~
1977年
까지
에베레스트 山
遠征隊 訓鍊에 參加하였다.
1975年
엔 第1次 偵察隊로
에베레스트 山
現地 訓鍊에 參加하고
1977年
,
에베레스트 山
遠征隊 正規 隊員으로 選拔된다.
1971年
네팔
政府에 入山許可書를 提出한 지 6年 만인
1977年
에 登攀할 수 있었고, 그해
9月 15日
낮 12時 50分
에베레스트 山
을
韓國人
最初로 登頂하였다. 우리나라는 世界에서 여덟番째로 에베레스트를 登頂한 國家가 되었다. 當時 高相敦이 한 말은 “여기는 正常. 더 오를 곳이 없습니다”였다. 頂上의 눈을 손으로 파헤친 뒤
聖書
(
聖經
) 한 勸하고
寫眞
석 張을 묻음으로써 먼저 간 同僚들을 追慕했다고 한다.
1979年
알래스카 山脈의
디亂離 산
[1]
(6194m) 遠征隊에 參加하여
1979年
5月 29日
登頂에 成功하였으나 下山 途中, 이일교하고 함께 海拔 6,000미터 地點에서 1,000m
[2]
아래의 가파른 絶壁 아래로 墜落하여 30歲의 젊은 나이로 死亡하였다. 박훈규는 運이 좋게도 목숨은 건졌으나 10個의 발가락과 7個의 손가락을 잃는 重傷을 입었다.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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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拏山
海拔 1,100m 高地에 墓所가 있다. 그가 죽은 後,
高相敦隊員 記念事業會
가 組織되어 해마다 追慕事業을 벌이고 있다.
2002年
6月
에베레스트 山
에서 淸掃活動을 벌이던 團體에 依해 高相敦 遠征隊의 旗발이 發見되었는데, 旗발에는 '77 K.E.E(77: 登攀鳶島, K.E.E: Korea Everest Expedition)'라고 씌어 있다.
徐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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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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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킨리鳳이라고도 부르며,
에베레스트
에 비해 山勢가 엄청나게 가파른데다
北極圈
에 位置해 있어
强風
하고
블리자드
, 零下 40度 以下의 痼疾的인 酷寒으로 因해 登攀이 어려운 곳이다.
- ↑
250層
摩天樓
에 該當하는 높이로,
부르즈 할리파
보다도 더 높다.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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