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해이사금
(訖解泥師今,
249年
? 또는
253年
? ~
356年
4月
,
在位:
310年
6月
~
356年
4月
)은
新羅
의 16代 王이다.
性
은 釋氏로
內海 尼斯今
의 孫子이고 아버지는
角干
석우로
(昔于老), 어머니는
鳥糞 尼斯今
의 딸 名元婦人(命元)夫人이다.
석우로
의 말에 따르면 外貌가 매우 훌륭하고, 膽力이 있으며 총명하고 敏捷하여 일 處理가 普通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1]
그러나 迂路의 死亡 時 갓난아이였던 그가 310年에 卽位해서 356年까지 在位한 것이 論難의 餘地가 있다. 다른 이름은 席욱(昔郁)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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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난 때는 正確히 알 수 없으나, 三國史記 석우로 熱戰에 依하면, 석우로가 죽은
249年
或은
253年
에 갓난아기였다 한다.
이덕일
에 依하면 그와 석우로와의 連帶 差異가 많이 나서 그의 아들이 아니라 後孫일 것이라는 見解도 있다.
석우로
가
日本
에서 죽을 當時 그가 갓난아기였다면 310年 卽位할 때 흘해의 나이는 61歲 或은 57歲가 된다. 或은 遺腹子로 보더라도 卽位 當時 나이는 60歲 或은 56歲가 된다. 그러나 臣下들이 論議해 말하기를, “흘해는 비록 어리지만 經驗이 많고 나라를 잘 다스릴 德이 있다"는 말이 나와서 더욱 말이 안 되는 內容이 많이 나온다.
311年
正月 급리(急利)를
阿飡
으로 임명하였다. 다음해인
312年
왜
왕이 婚禮를 要請하자, 阿飡 급리의 딸을 보냈다.
314年
급리를
伊飡
으로 임명하였다.
317年
봄과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들어 罪囚들을 審査해 釋放하였고, 이듬해
318年
에는 지난해 가뭄 被害를 復舊하고 農業을 振興시키기 위해 全國에 百姓을 부려 勞役시키는 것을 禁止했다.
330年
처음으로
벽골지
에 물을 대기 始作하였는데, 이 둑의 길이가 1千 8百 보였다.
337年
陰曆 2月
百濟
에 使臣을 보냈다.
344年
陰曆 2月 倭王이 다시 公主와의 婚禮를 請하자 이미 結婚하였다는 理由로 拒絶하였다. 이에
345年
陰曆 2月 倭王이 國交를 끊는다는 使臣을 보내고,
346年
크게 軍士를 내어
金星
을 包圍했다. 新羅軍은 金星에서 籠城하며 倭軍의 食糧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倭軍의 退却 時點에 맞춰 騎兵을 내어 擊退하였다.
家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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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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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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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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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동 三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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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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所在不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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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尊된 王의 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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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굵은 글씨
: 被葬者가 明確하게 認定받는 王陵
- *
: 被葬者가 異說 없이 確實하게 認定받는 王陵
- 기울기
: 被葬者가 明確하다는 見解가 있는 王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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