慧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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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可
생각하는 慧可. 10世紀 北宋時代의 畫家 夕刻(石恪)이 그린 그림.
出生 487年
入寂 593年
俗名 狂(光) 또는 身光(神光)
稱號 腺腫 2代 調査
達磨에게 팔을 바치는 慧可. 1496年 셋슈가 그린 그림으로, 日本 아이치縣 度코나메시 第年史(?年寺)에 所長 되어 있다.

慧可 (慧可, 487年 ~ 593年 )는 隋나라 禪僧 이며 腺腫 (禪宗)의 第2對照이다.

老子와 莊子를 工夫하다가 마흔이 넘어서야 菩提達磨 의 弟子가 되었다. [1]

中國 禪宗 1代祖인 菩提達磨 의 弟子가 되기 위해 팔을 자른 이야기가 有名하다. [2]

生涯 [ 編輯 ]

무뢰(武牢: 허난省 뤄양 附近)에서 出生하여 어릴 때 이름을 狂(光) 또는 身光(神光)이라 하였다. 姓은 희씨(?氏)였다.

젊었을 때에는 노장 (老莊)의 戰績과 佛殿을 工夫하고 後에 뤄양의 용문(龍門) 향산(香山)에 가서 補正船社(寶靜禪師)를 따라 出嫁하여 英牧師(永穆寺)에서 戒律을 받았다. 그 後 各地를 돌아다니며, 높고 밝은 學問을 接하며 知識을 쌓다.

32歲에 다시 향산에 돌아가 8年間을 冥想으로 보냈다. 520年 嵩山 小林寺 를 찾아 禪宗의 第1代祖인 菩提達磨 의 弟子가 되어 이 곳에서 8年 동안 首都에 精進하였다.

552年 에 法을 弟子인 승찬(僧璨)에게 傳授하였다. 그 뒤에 業道에서 선(禪)을 펴기 34年, 迫害(迫害)에도 屈하지 않고 各地를 돌면서 圖們(屠門)과 株價(酒家)에도 出入을 하였다 한다. 鑛區社(匡救寺)에서 涅槃經을 剛하여 많은 學僧이 모였다.

마지막에는 僧侶 變化(辨和)의 미움을 받았고, 邑長(邑長)인 적中間(翟仲侃)에 依해 處刑되었다고 한다.

일화 [ 編輯 ]

팔을 자르다 [ 編輯 ]

慧可는 每日 小林寺를 찾아가 達磨大師에게 法을 물었다. 그러나 達磨大師는 입을 열지 않았다. 慧可는 목숨을 바칠 覺悟로 達磨大師의 房門 밖에서, 눈을 맞으며 날을 꼬박 새웠다. [3]

아침에 慧可를 發見한 達磨大師는 눈 속에 서서 무엇을 求하느냐고 물었다. 慧可는 눈물을 흘리며, 甘露의 門을 열어 衆生을 濟度해달라고 했다. 達磨大師는 부처의 智慧를 여러 怯을 遂行해야만 얻어지는 것이라며, 작은 뜻으로는 큰 法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4]

慧可는 自身의 왼쪽 팔을 칼로 잘라, 達磨大師에게 내놓았다. 達磨大師는 부처와 菩薩은 法을 求할 때, 몸을 몸으로 보지 않고, 목숨도 목숨으로 보지 않았다며, 慧可가 팔을 잘랐으니 法을 求할 만하다고 했다. 이렇게 慧可는 達磨大師의 弟子가 되었다. [5]

마음을 가져오너라 [ 編輯 ]

어느 날, 慧可가 達磨大師에게 마음이 不安하니, 마음을 便하게 해달라고 했다. 達磨大師는 마음을 가져오라고 했다. [6]

慧可는 마음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達磨大師는 찾는 다고 찾아지면, 어떻게 그게 마음이겠냐며, 나는 이미 너의 마음을 便하게 해주었다고 했다. [7]

達磨大師는 다시 慧可에게 나는 이미 너의 마음을 便하게 해주었는데, 보고 있느냐고 물었다. 慧可는 활짝 깨달았다. [8]

偈頌 [ 編輯 ]

本來 땅이 있는 까닭에
땅으로부터 씨앗 꽃 피나니
萬若 本來로 땅이 없다면
꽃이 어느 곳으로부터 피어나리오. [9]

各州 [ 編輯 ]

  1. 佛敎新聞, 佛敎新聞 (1998年 3月 24日). “船社들의 禪問答-達磨와 慧可大使” . 《佛敎新聞》. 佛敎新聞 . 2023年 9月 21日에 確認함 . 慧可는 元來 老莊學을 익히다가 40歲가 넘어 達磨大師를 만나 스승으로 섬겼다.  
  2. 백, 星湖 (2021年 4月 14日). “[백성호의 賢問愚答] 慧可는 왜 칼로 自己 팔을 잘랐나, 達磨가 알려준 마음의 正體” . 《中央日報》. 中央日報 . 2023年 9月 21日에 確認함 . 이 말을 들은 身光의 反應이 놀랍습니다. 그는 칼을 빼서 自身의 왼팔을 잘라버렸습니다.  
  3. 佛敎新聞, 佛敎新聞 (1998年 3月 24日). “船社들의 禪問答-達磨와 慧可大使” . 《佛敎新聞》. 佛敎新聞 . 2023年 9月 21日에 確認함 . 慧可는 小林寺에 와서매일 法을 물었으나 達磨大師는 全혀 입을 열지 않았다. 慧可는 생각했다."옛사람들은 法을 求하기 위해 自身의 목숨도 아끼지 않았는데 나 또한 무엇을 아끼랴" 慧可는 達磨大師의 房門 앞에서 밤새 눈을 맞으며 꼼짝도 않고 날을 새웠다.  
  4. 佛敎新聞, 佛敎新聞 (1998年 3月 24日). “船社들의 禪問答-達磨와 慧可大使” . 《佛敎新聞》. 佛敎新聞 . 2023年 9月 21日에 確認함 . 이윽고 東이 트고 꼼짝도 않고 있는 慧可의 모습을 發見한달마대사가 말했다."너는 눈속에 서서 무엇을 求하려 하느냐."혜가는 꼿꼿이 선 채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바라옵건대 甘露의 門을 활짝 열어 뭇 衆生을 널리 濟度해 住所서."이에 達磨大師가 말했다."부처님들의 위없는 智慧는 여러 怯을 遂行해야만 얻어지는 것이다. 너의작은 뜻으로는 큰 法을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다.  
  5. 佛敎新聞, 佛敎新聞 (1998年 3月 24日). “船社들의 禪問答-達磨와 慧可大使” . 《佛敎新聞》. 佛敎新聞 . 2023年 9月 21日에 確認함 . "이말을 듣고 慧可는 卽時 날카로운 칼을 뽑아 自身의 왼팔을 잘라 達磨大師앞에 놓았다. 그제사 達磨大師는 입을 열었다."여러 부처님들과 菩薩들이 法을 求할 때 肉身을 肉身으로 보지 않았고 목숨을 목숨으로 보지 않았다. 네가 이제 팔을 끊었으니 法을 救할만 하다."이렇게 해서 慧可는 達磨大師의 弟子가 됐다.  
  6. 佛敎新聞, 佛敎新聞 (1998年 3月 24日). “船社들의 禪問答-達磨와 慧可大使” . 《佛敎新聞》. 佛敎新聞 . 2023年 9月 21日에 確認함 . 하루는 慧可가 達磨大師에게 말했다."저의 마음이 不安하니 부디 제마음을 便케 해주십시오."달마대사가 말했다."그 不安한 마음을 가져오너라. 내 마땅히 便케 해주리라."  
  7. 佛敎新聞, 佛敎新聞 (1998年 3月 24日). “船社들의 禪問答-達磨와 慧可大使” . 《佛敎新聞》. 佛敎新聞 . 2023年 9月 21日에 確認함 . 아무리 찾아도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그렇지, 찾아지면 그것이 어찌 너의 마음이겠느냐. 나는 벌써 너의 마음乙便케 해주었느니라.  
  8. 佛敎新聞, 佛敎新聞 (1998年 3月 24日). “船社들의 禪問答-達磨와 慧可大使” . 《佛敎新聞》. 佛敎新聞 . 2023年 9月 21日에 確認함 . 達磨大師는 이렇게 말하고 慧可에게 되물었다."너의 마음을 이미 便하게 해주었는데 너는 보고 있느냐."이말에 慧可는 활짝 깨달음을 얻었다.  
  9. 慧能, 慧能. “육조단경”. 29. 傳偈 - 偈頌을 戰艦.  

參考 資料 [ 編輯 ]

前任
菩提達磨
第2代 中國 腺腫 調査
528年 ~ 593年
後任
승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