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羅달튼外國人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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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羅달튼外國人學校
Cheongna Dalton School
敎訓 Pioneering to Serve
個校 2010年 9月 1日
設立形態 外國人學校
校長 總校長

1代 박광민 Kwangmin Park

2代 박지호 Jiho Park


初等學校 / 中學校 校長

심옥令 Ok Ryung Shim (初等學校,中學校)
交感 空席
國家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位置 仁川廣域市 西區 尖端洞로 344 (靑羅桐)
象徵 鳳凰 Phoenix
學校法人 鳳德學院
웹사이트 http://www.daltonschool.kr
Map

靑羅달튼外國人學校 仁川廣域市 西區 靑羅國際都市에 位置한 外國人學校 이다. 學校法人 鳳德學院이 2011年 에 設立했으며, 大韓民國 의 外國人學校 中 最初로 國內 學歷이 認定되는 外國人學校이다. 國內 最初로 內國人 學校法人이 運營하는 外國人學校이며 敎育의 中心은 學生이어야 한다는 敎育理念을 바탕으로 個別 學生의 學習 能力과 關心, 適性 및 要求 等을 受容하고, 핀란드에서 實施하는 5學期制를 運營하며, 未來 社會에서 要求하는 學歷認證을 同時에 받을 수 있어, 韓國을 包含한 世界 英語圈 國家에 있는 大學으로의 進學이 可能하다.

學院歷史 [ 編輯 ]

靑羅달튼外國人學校(CDS)는 서울特別市 陽川區 牧童에 位次韓 自律型 私立 한가람 高等學校를 運營하는 學校法人 鳳德學院이 設立하였으며, 그 學院의 設立者는 고 이봉덕 (1921~2010) 女史이다.


韓國의 人材들을 敎育, 育成하려는 女史의 使命은 20世紀 日本 植民地와 韓國戰爭으로 인하여 荒廢化된 祖國에서 胚胎되었다. 1952年 文盲과 가난을 退治하고자 하는 切實한 使命感에서 女史는 幕舍를 지어 初等 學生들과 學父母들을 가르치기 始作하였다.


1959年 以後 女史는 女性들의 經濟的 地位와 勞動力 提高를 위하여 奉迎女子中學校, 永登浦女子商業高等學校(現 映像高等學校), 陽川女子高等學校(現 木洞高等學校)를 次例대로 設立하였으며, 1997年 한가람 高等學校를 設立하였다.


한가람 高等學校는 學生들에게 自律權을 大幅 擴大한 敎育課程을 運營하여 硬直된 學校 現場의 敎育틀을 脫皮하는데 至大한 貢獻을 하고 있다. 現在 鳳德學院은 學院 設立 以來 72,900名 以上의 學生을 교육시켜 社會로 輩出하였다.


글로벌 市民으로서 未來를 살아갈 能力과 資質을 갖춘 人材를 養成해야 할 時代的 要求에 副應하기 위하여 設立된 靑羅달튼外國人學校는 未來社會에 必要한 能力과 資質을 갖춘 리더를 길러내기 위하여 世界 最高 水準의 學校를 運營하고자 한다.


이에 靑羅달튼外國人學校는 未來 社會에 살아갈 國家 間의 境界를 뛰어넘는 意思疏通 能力, 適應力 및 뛰어난 創意力을 갖춘 人材를 育成하기 위한 世界的인 水準의 敎育 프로그램을 運營하며, 또한 共同體 社會와 世界 人類에 對한 獻身과 愛情을 갖춘 眞正한 리더를 길러내기 위하여 努力하며, 人類의 보다 나은 未來를 위하여 世界 平和와 文化 伸張에 寄與할 수 있도록 비전을 심어주고자 한다.


靑羅달튼外國人學校는 國內에서 唯一하게 非營利學校法人이 運營하는 外國人學校로서 優秀한 敎師陣과 함께 美國 뉴욕 달튼學校와 敎育哲學을 共有하여 달튼플랜에 立脚한 敎育프로그램을 運營하고 있다.


靑羅달튼外國人學校는 創意力, 適應力, 意思疏通能力, 팀웍, 協同心, 리더쉽 等의 價値와 敎育 目標를 具現하기 위하여 不斷히 努力하고 있다.

鳳德學院의 靑羅干拓事業 [ 編輯 ]

이명수(1991年 死亡 當時 72歲)展 鳳德學院 理事長은 夫人 이봉덕(2010年 死亡 當時 89歲)展 理事長 外 1名(김모형 (財)서울성로원 理事長)과 함께 1964年 9月 9日 청라도 公有水面(1千275㏊) 埋立免許權을 農林水産部로부터 따냈다. 事實 이명수 前 理事長의 청라도 埋立免許圈은 日本서 水産養殖業을 배운 김옥창(2000年 死亡 當時 71歲)氏의 事業權을 넘겨받은 것이었다.


김옥창 氏는 이명수 前 理事長이 埋立免許權을 따내기 前인 1963年 10月 25日 청라도 隣近 公有水面(1千425㏊)의 埋立免許를 이미 申請해 놓았다.


이명수 前 理事長은 5·16 軍事政變으로 誕生한 共和黨 各 地區黨 改編 當時인 그해 8月 19日 서울 영등포 乙(乙)區 地區黨委員長으로 任命된 狀態였다. 政權을 등에 업고 工事費와 工事 完了 後 土地 分配 條件을 내세워 김옥창 氏 代身 自身을 埋立免許 申請者로 바꾼 것이었다. 名目은 失鄕民 失業 救濟와 臨해 養殖場 造成, 仁川海洋大學 設立 等이었다. 美國 民間救助團體인 ‘케어(CARE)’가 美公法 480-Ⅱ에 따른 勤勞者調査業으로 청라도 埋立事業에 밀과 옥수숫가루를 支援한 理由다.


黃海道가 故鄕인 이봉덕 理事長은 서울, 仁川 等地에서 가난의 굴레 속에서 힘들게 사는 故鄕사람 1000餘名을 모아 이 事業의 趣旨를 說明한다. 그들에게 工事期間 中 生活費를 대주고 工事가 끝나면 家口當 2情報의 땅을 주기로 約束한다. 人夫들은 경서동 隣近에 天幕이나 板子집을 짓고 居處를 마련한다.


그들은 특별한 裝備도 없이 곡괭이와 삽 그리고 지게와 손수레를 利用해 하루 10餘m씩 堤防을 쌓아나갔다. 그나마 세찬 潮流에 밀려 아침에 나가보면 半 以上이 바다에 쓸려나갔다. 工事가 제대로 進陟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死傷者도 續出했다. 石山 爆破 때 돌에 맞아 죽거나 떠내려가는 作業船을 건지려다 물살에 휩쓸려가는 等 17名이 목숨을 잃었다. 人夫들은 甚하게 動搖했고 一部는 새 일터를 찾아 仁川 市內로 빠져나갔다. 이 消息을 들은 仁川市는 65年부터 3年 동안 每年 700t의 밀가루를, 67年에는 쌀 400t을 支援했다.


한동안 遲遲不進하던 公社는 學校와 姊妹結緣 맺은 韓美76工兵隊의 도움으로 急進展되었다. 工兵隊는 불도저 3代, 트럭 5代, 크레인 2臺 等 工事 裝備로 물막이 作業을 돕는 한便 駐韓美軍港灣司令部에 要請, 67年 8月부터 上陸艇을 動員해 每달 100代 트럭分의 돌을 실어다 주었다. 6年에 걸친 難工事 끝에 1970年 10月 700~800m짜리 물막이 工事의 끝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竣工을 不過 2個月 앞두고 建設部로부터'1년 안에 380萬坪을 海拔 9m 높이로 追加 埋立하라'는 公文이 날아온다. 百方으로 뛰면서 努力했지만 메울 흙과 裝備를 마련하지 못하고 結局 工事는 中斷되었다.


이 땅은 以後 迂餘曲折 끝에 동아그룹으로 넘어간다. 80年代에 들어서자 國內 經濟는 中東建設 沈滯로 인해 惡化 狀況으로 치닫는다. 政府는'나라 밖에서 놀리는 重裝備를 干拓 等 埋立 目的으로 國內에 들여올 땐 關稅를 물리지 않는다'는 特別對策을 내놓는다.


이에 副應하기 위해 리비아 大水路 工事를 끝낸 동아건설이 解決士로 나섰다. 80年 1月 3500萬餘㎡의 埋立免許를 取得하고 6月 30日부터 工事를 始作한다. 여기에는 鳳德學院이 堤防을 쌓고 물을 빼놓은 干拓地도 包含되었다.


91年 1月 마침내 10餘年에 걸친 大工事를 마친 이 땅은 '金浦埋立地' 或은 '동아埋立地'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동아는 農業用地였던 이 땅의 折半이 넘는 2000餘萬㎡를 首都圈쓰레기埋立地터로 環境部에 넘기고 남은 땅의 用途變更을 위해 그룹의 死活을 걸고 全方位 로비戰을 펼친다.


그러나 農林部와 環境團體의 頑剛한 反對에 부딪혀 番番이 失敗하자 及其也 '마이클 잭슨' 카드를 들고 나와 世上을 깜짝 놀라게 한다. 1998年 2月 김대중 大統領 就任式에 온 마이클 잭슨을 會長 自宅으로 招請해 晩餐을 베풀고 다음 날 埋立地 現場을 둘러보게 한다. 동아側은 그가 埋立地에 大單位 慰樂團地 開發을 할 것이라고 發表한다. 이 計劃도 進陟이 되지 않으면서 資金難에 몰린 동아건설은 農業基盤公社에 땅을 팔지만 2000年 11月 끝내 最終 不渡處理 되고 만다. 以後 이 땅은 仁川經濟自由區域 청라地區가 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鳳德學院은 이 땅에 對한 아쉬움이 컸는지 1993年 경서동에 靑少年修鍊院 京仁유스호스텔을 開院한다. 그러나 이 施設은 2005年에 청라地區로 編入되면서 이마저도 閉鎖된다.


달튼外國人學校의 敎訓은 'Pioneer to Serve(奉仕하는 開拓者)'다. 鳳德學院은 달튼外國人學校 設立을 契機로 1960年代 靑羅에서 펼치다 暫時 접었던 開拓精神을 다시 불사르고 있다.

關聯 記事 [1]

理事長 이옥식 女史 [ 編輯 ]

大韓民國에서 가장 推進力이 剛한 敎育者다. 어머니 이봉덕 女史가 세운 鳳德學院을 이어받아 敎育者의 길에 들어섰다. 서울師大附高와 弘益大學校 數學敎育學科를 卒業한 後 1980年 영등포女子商業高等學校에서 敎師生活을 始作했다. 서울 한가람高等學校, 仁川 靑羅달튼學校를 設立했다. 영등포여상에서는 1999年 6月까지, 한가람고에서는 2011年 8月까지 校長으로 일했고, 以後 鳳德學院 理事長을 맡고 있다.

學校가 社會 變化를 이끌어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學校는 제자리에 머물면서 學生들끼리만 競爭시키는 敎育에 反對한다. 敎科敎室制, 敎科 選擇制, 半바지에 티셔츠 校服, 直營給食 等 韓國 敎育을 바꾸는 劃期的인 變化를 여럿 主導했고, ‘前例가 없다’는 敎育界 곳곳의 抵抗과 惰性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이러한 努力은 아직도 進行形이다.


2011年 이옥식 理事長은 敎育科學技術部(現 敎育部 & 科學技術情報通信部) 學校敎育支援本部長(1級 待遇 契約職) 자리를 公募한 結果 이옥식 한가람高 校長을 本部長으로 內定, 身元朝會 等을 거쳐 來週 初 人事 發令을 낼 豫定이라고 밝혔다.

學校敎育支援本部長은 敎育課程, 敎員政策, 自律高 및 特目高, 幼兒敎育 等 全國 幼初中等 敎育政策을 總括하는 자리로 私立高 敎員 出身이 內定된 것은 처음이며, 女性이 敎科部 1級 자리를 맡은 것도 처음이어서 破格的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校長은 오랫동안 敎員評價, 敎科敎室制 等을 推進해 現場 經驗이 豐富하다는 點 等이 審査過程에서 좋은 評價를 받았다.


하기만 이옥식 理事長은 過去 한가람高等學校 校長 時節, 學校生活記錄簿(學生簿) 無斷 訂正을 幇助해 서울市敎育廳의 懲戒 對象이 된 狀態에서 敎育科學技術部 學校敎育支援本部長(1級 待遇 契約職)에 內定돼 論難을 낳았고, 敎育科學技術部 學校敎育支援本部長職을 辭退하였다.

한겨레 - (이옥식 校長, 敎科部 幹部職 自進辭退) [2]

朝鮮日報 - (이옥식, 學校敎育支援本部長 自進 辭退) [3]

東亞日報 - (이옥식 한가람高 校長 “敎科部 本部長職 辭退) [4]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