倉租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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倉租利
倉租利
第7代 高句麗 國相
任期 294年~未詳
前任 상루
後任 未詳

身上情報
出生日 未詳
出生地 高句麗 南部
死亡日 未詳
死亡地 未詳
國籍 高句麗
性別 男性

倉租利 (倉租利, ?~?)는 高句麗 의 管理로 봉상왕 , 미천왕 臺의 人物이다. 三國史記 에 列傳이 실려 있다.

生涯 [ 編輯 ]

倉租利는 南部 出身으로, 봉상왕 3年인 294年 國相 상루(尙婁)가 죽었을 때 大使者 (大使者)의 職位에 있었다. 이때 상루의 뒤를 이어 國喪이 되었고, 作爲는 代主婦 (大主簿)가 되었다.

當時 高句麗 선비족 毛用部 의 首長 慕容廆 의 侵略에 시달리고 있었다. 봉상왕 5年인 296年 에는 고국원(故國原)까지 侵入하여 서천왕 의 무덤을 파내려고 試圖하기까지 했다. 이에 봉상왕은 倉租利를 불러 對策을 論議하였다. 이에 倉租利는 "北部의 大型(大兄) 高奴子 (高奴子)가 어질고 勇敢하다"고 答했다. 이에 王이 高奴子를 東北部 邊境의 神聖(新城)의 太守로 삼자 慕容廆는 侵略을 멈추었다.

慕容廆로부터 安全해진 다음부터 高句麗에는 異常한 일들이 벌어졌다. 봉상왕 7年인 298年 가을에는 雨雹이 내려 農事를 망쳤으며, 이듬해 가을에는 鬼神이 出沒하고 客星(客星)이 달을 가렸다. 이러한 狀況에서도 봉상왕은 宮闕을 改築하고 自身의 조카 을불 (乙弗)을 죽이려 하는 等의 行爲로 臣下들의 不滿을 샀다.

봉상왕 9年인 300年 에도 怪異한 일은 繼續되었다. 正月부터 地震이 나고, 6個月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8月이 되자 王은 15歲 以上의 男女 [1] 를 뽑아 宮室을 受理하였는데, 이로 인해 百姓들의 生活이 더욱 더 窮乏해졌다.

이에 倉租利는 百姓이 塗炭에 빠진 狀況에서 土木 工事를 進行하는 것은 君王의 道理에 어긋나는 行爲라고 諫하였다. 이에 王은 "임금은 百姓을 우러러 보는 자리인데, 宮闕이 華麗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威嚴을 보이겠는가?"라고 答했다. 그러고는 오히려 自身을 批判하여 百姓들의 信望을 얻고자 함이냐고 되물었다. 이에 倉租利는 다시금 "임금이 百姓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어진 임금이 아니요, 臣下가 임금에게 諫하지 않으면 忠臣이 아닙니다."라고 答했다. 이에 王은 웃으며 "그대는 百姓을 위해 죽고자 하는가?"라며 倉租利의 말을 無視했다.

王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안 倉租利는 다른 大小臣僚들과 廢位를 論議하였다. 論議 끝에 乙불을 새 王으로 세우기로 하고 倉租利는 北部의 造佛 (祖弗)과 東部의 小雨 (蕭友)를 派遣하여 乙불을 찾게 하였다. 을불은 처음에 拒絶하였으나 이들의 說得에 結局 倉租利를 찾아 왔다. 倉租利는 一旦 그를 숨겨 두고 支持派를 모으기 始作하였다.

9月이 되자 봉상왕은 臣下들과 함께 사냥을 떠났다. 이때 倉租利가 "나와 뜻을 같이 하는 者는 나를 따라 하여라."라고 宣言하며 갈대잎을 冠에 꽂았다. 그러자 모두들 이를 따랐다. 自身의 支持勢力을 確認한 倉租利는 봉상왕을 別室에 가두고 乙불을 맞아 玉璽를 바치고 王位에 오르게 하였다.

各州 [ 編輯 ]

  1. 倉租利 列傳에는 男女가 아닌 壯丁을 뽑았다고 한다.

參考 資料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