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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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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융 (?融, ? ~ 195年 )은 中國 後漢 末의 政治家  · 宗敎 指導者로, 洋酒 丹陽郡 사람이다. 西周 에서 佛敎 勢力을 펼쳤다.

行跡 [ 編輯 ]

이름 착융(?融)
時代 後漢
生沒 ? ~ 興坪 2年( 195年 )
本館 · 出身 洋酒 丹陽郡
官職 하비상(下?相)〔道兼〕
作爲
所屬 道兼 → 獨立 → 柳腰 → 獨立

처음에는 道兼 을 섬겨 광릉 · 팽성 · 하비 에 糧食을 실어나르는 일을 監督하였다. 그러나 輸送 業務를 끊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며 物資를 着服하였으며, 佛敎 寺院을 크게 일으켰다. 社員은 樓閣이 겹겹이 있고 角度를 만들어, 3千 名이 들어갈 수 있었다. 또 黃金으로 사람의 形象을 만들어, 緋緞 옷을 입혔다. 近處 地方에서 佛敎에 關心이 있는 者들로 佛經을 듣고 佛敎를 받아들이게 하니 그 數爻는 5千 名에 이르렀다. 每番 浴佛할 때마다 엄청난 費用을 들여 술과 飮食을 많이 차리고 數十 里 길에 자리를 깔아 두니 1萬 名이 와서 보고 먹었다.

曹操 가 道兼을 치자 西周 一帶가 騷亂해졌다. 착융은 當時 하비상이었는데, 男女 1萬 名과 말 3千 疋을 거느리고 광릉으로 逃走했다. 광릉 태수 趙昱 은 착융을 손님으로 待接했으나, 착융은 광릉의 財物을 탐하여 趙昱이 술 醉한 사이 죽이고 兵士를 풀어 왕창 털어 광릉을 떠났다.

興坪 2年(195年), 팽성 설례 와 함께 洋酒 自社 柳腰 를 盟主로 받들고 있었는데 怨讐 손책 을 보내 柳腰를 치게 했다. 설례는 말陵城을 지키고, 착융은 現 南쪽에 駐屯했다. 손책은 먼저 착융을 攻擊했고, 착융은 맞서 싸웠으나 이롭지 못하여 城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손책이 番능 과 싸우다 화살에 傷處를 입었는데, 착융은 손책이 죽었다는 말을 곧이듣고 長壽 愚者(于慈)를 보내 손冊을 치게 했다가 크게 졌다. 착융이 다시 견고히 籠城하니 손책은 착융은 내버려두고 柳腰를 攻擊하여 完全히 무찔렀다. 柳腰가 逃走하다가 藝場 으로 向해 烹擇에 駐屯하자 착융은 이를 좇았다.

착융은 설례와 예장태수 주호(朱皓)를 죽이고 藝場君을 占據했다. 《獻帝春秋》(獻帝春秋)에 따르면, 當時 藝場에서는 後漢 朝廷이 任命한 태수 주호와 遊標 가 任命한 태수 제갈현 이 對立하고 있었다. 柳腰는 주호를 支援해, 주호가 男唱 (南昌)에 들어가고 제갈현은 서성으로 물러났었다. 柳腰는 착융에게 주호를 도와 제갈현을 討伐하게 했는데, 착융은 주호를 속여 죽였다.

착융은 攻擊해 온 柳腰를 한 番 물리쳤으나, 柳腰가 다시 攻擊해 오자 敗北하여 逃走했다가 百姓들에게 殺害당했다.

《三國志演義》의 착융 [ 編輯 ]

柳腰의 部下 將帥로 登場하며, 柳腰를 섬기기 前의 行跡은 나타나지 않는다. 穀蛾 戰鬪 에서 장영 이 손책에게 깨져 禹저를 잃고 돌아오자, 장영을 죽이려는 柳腰를 설례와 함께 겨우 말렸다. 柳腰가 손책에게 지고 藝場으로 달아날 때 따라가, 以後로는 登場하지 않는다.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