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앙
(趙?, ? ~
219年
?)은
中國
後漢
末의 政治家로,
者
는
僞裝
(偉章
[1]
, 偉璋
[2]
)이며 翁主(雍州) 天壽群(天水郡) 사람이다.
[3]
私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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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어서는 動向
兩部
(楊阜) ·
윤봉
(尹奉)과 함께 名聲이 있었고, 함께 양주종社(凉州從事)가 되었다.
[1]
강도령(羌道令)을 歷任했다.
[2]
建安
(建安) 17年(
212年
),
마초
(馬超)가
동관 戰鬪
에서 敗走한 後
江
(羌) 等
西戎
(西戎)의 支持를 바탕으로 勢力을 再建하여 農商으로 쳐들어오자, 基(冀)
[4]
를 除外한 모든 郡縣이 마초에게 呼應했고, 州와 君의 地方官吏들은 旣成에서 籠城하며 마초와 싸웠다. 그러나 여덟 달 동안 包圍를 當하고도 救援軍이 오지 않자 洋酒自社(凉州刺史)
胃腔
(韋康)은 百姓들과 官吏들이 다치는 것을 불쌍히 여겨 降伏을 考慮했고, 조앙의 諫言을 받아들이지 않고 結局 마초와 强化를 맺고 城門을 열어 降伏했다.
[3]
[2]
[5]
그러나 마초는 和議를 깨고 胃腔 等 地方 官吏들을 屠戮했으며,
[3]
조앙은 마초에게 劫迫되어 아들 繰越(趙月)李 볼모로 잡혔으나 아내 왕이의 謀略으로 마초의 信賴를 얻어 登用될 수 있었다.
[2]
後에 養父가 外形 江西(姜敍)와 함께 마초를 치기로 計劃하고 조앙 · 윤봉 等에게 사람을 보냈으며 이들은 모두 養父의 謀略에 參與했다. 조앙은 윤봉과 함께 起算을 지켰고, 講書는 養父와 함께 魯省에서 擧兵하였으며, 마초가 講書를 치러 나간 사이 洋館(梁寬) · 조구(趙衢) 等이 奇聲을 占據하고 마초의 妻子를 屠戮하였다. 마초는 一旦 韓中으로 달아났다가
長老
(張魯)의 兵士를 얻어 돌아와 起算을 包圍하기를 30餘日 間 했으나, 조앙 · 윤봉 等은
下後燕
(夏侯淵)李 보낸 援軍이 올 때까지 버텨냈다. 마초는 援軍이 오자 달아나면서 繰越을 죽였다.
[2]
[3]
[5]
時期는 不明確하나, 익주自社(益州刺史)를 歷任했다.
[1]
[2]
建安 24年(
219年
)
劉備
(劉備)가 韓中을 쳐 下後緣과 익주自社 槽甕(趙?) 等을 죽였는데,
[6]
이 槽甕은 조앙으로 여겨진다.
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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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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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가
나
다
御患(魚?), 《偉略(魏略)》
- ↑
가
나
다
라
마
바
황보밀(皇甫謐), 《列女傳(列女傳)》
- ↑
가
나
다
라
진수
(陳壽), 《三國志(三國志)》 卷25 神秘養父古堂륭前(辛毘楊阜高堂隆傳)
- ↑
漢陽群(漢陽郡)의 續絃
- ↑
가
나
진수, 《三國志》 卷9 第하후弔電(諸夏侯曹傳)
- ↑
진수, 《三國志》 卷32 船主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