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濟州 夫氏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濟州 夫氏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濟州 夫氏
濟州夫氏
나라 韓國
貫鄕 濟州特別自治道
時調 부을나 (夫乙那)
中始祖 附言頃(夫彦景)
主要 人物 부종인, 부완혁 , 夫佐炫 , 不僧官 , 부성철 , 부지영 , 不다혜
人口(2015年) 10,222名

濟州 夫氏 (濟州夫氏)는 濟州 를 本館으로 하는 韓國의 姓氏 이다. 時調는 耽羅 開國說話에 登場하는 부을나 (夫乙那)이다. 朝鮮 秒에 進勇校尉(進勇校尉) 후령別莊(後領別將)을 지낸 附言頃 (夫彦景)을 1世祖로 한다.

起源 [ 編輯 ]

濟州 不氏는 濟州 양氏 , 濟州 高氏 와 함께 耽羅 국성 으로, 같은 由來를 가지고 있다.

耽羅 開國說話에 依하면 始祖 부을나 (夫乙那)는 耽羅 (耽羅) 漢拏山(漢拏山) 北쪽 某興穴(毛興穴)에 솟아나온 세 新人(神人) 中의 한 名이다.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은 狩獵을 하여 살았는데, 하루는 바다에 異常한 箱子가 떠내려와 건져 보니 세 美女와 五穀의 種子,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세 新人은 세 美女와 各各 結婚하여 農事를 지으며 살게 되니 그로부터 耽羅는 開拓되었다. 後에 벽랑국(碧浪國)으로부터 五穀(五穀)의 種子(種子)와 6軸(六畜)을 가져온 세 公主를 아내로 삼고 활을 쏘아 화살이 닿는 곳를 일도(一徒), 이도(二徒), 三道(三徒)라 부르고 生活의 터전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高麗史 고기(高麗史 古記)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耽羅는 南海 가운데 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三神人이 땅에서 솟아나니 맏이를 양을나, 버금을 고을나, 셋째를 부을나라 하였다. 三人은 거친 들판을 돌아 다니며 사냥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붉은 진흙으로 봉한 나무 箱子가 東쪽 바닷가로 떠내려 온 것을 發見하고 나가서 열어 보니 그 안에 또 石函(石函)이 있고 붉은 띠에 紫朱빛 옷을 입은 獅子(使者)가 한 사람 따라와 있었다. 石函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處女 3人 및 망아지 송아지와 五穀 씨앗 等 여러가지가 있었다. 이에 獅子(使者)가 말하기를 "나는 벽랑국 使臣입니다. 우리 王이 이 3王女를 낳고 이르되 西海 한가운데 있는 山에 信者(神子) 3人이 降生(降生)하여 將次 나라를 세우려는데 配匹이 없다 하시고 이에 神(臣)에게 命하여 3王女를 모시게 하였습니다. 마땅히 配匹로 삼아 大業(大業)을 이룩하시옵소서"하고 忽然히 구름을 타고 떠나가 버렸다. 3人은 나이 次例로 나누어 配匹을 삼고 샘물이 달며 땅이 기름진 곳에 나아가서 활을 쏘아 터를 定하니 良乙那가 사는 곳을 第一도(第一徒), 高乙那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徒), 夫乙那가 사는 곳을 第三道(第三徒)라 하고 비로소 五穀을 播種하고 또한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로 富裕하고 繁榮하였다.

東國通鑑(東國通鑑)은 成宗15年(1484) 刊行되어 長曰良(章曰量)이라 하고 長爲良說(長位兩舌)李 굳어졌으며, 以後에도 살펴보면 孝宗4年(1654)에 李元鎭(이원진)牧使(牧師)도 三姓穴條(三姓穴兆)에 良高夫(量古阜)라고 썼고 肅宗29年(1703)에 李衡祥(이형상)牧使(牧師) 亦是 三姓祠 上樑門(三聖祠 上樑文)에 良高夫(量古阜)로 썼다. 이때 祠宇(祠宇)를 完成하고 三神人(三神人)의 位牌(位牌) 順位를 定함에 있어서 三星新人 降生(三姓神人 降生)의 私的文獻과 國事를 널리 上告(詳考)韓 끝에 양을나(良乙那)를 第1位에 모시고 고을나(高乙那)를 第2位에, 부을나(夫乙那)를 第3位로 決定한 後 祭文(祭文)을 지어 位牌(位牌)를 모시고 祭祀를 올리었다. 王朝實錄(王朝實錄 42~P.163)에 依하면 英祖5年(1771)에 高漢俊(고한준)等이 主上(主賞)께 奏請(奏請)하는 上疏文에도 良高夫(量古阜)로 썼다. 또한 李丙燾(李丙燾)著의 韓國史(韓國史)에도 良高夫(量古阜)요, 金泰能(김태능)著의 濟州島史論攷(濟州島司논고)에도 良高夫(量古阜)라 했으며 國史大事典(國師大辭典)?韓國事大事前 等에도 良高夫(量古阜)라고 記錄하였으며, 玄容駿(현용준)著 「濟州島神記(濟州島신기)」에도 良高夫(量古阜)라 收錄이 되어 있다.

時調 [ 編輯 ]

부을나 以後의 相計가 失傳되어 朝鮮 秒에 進勇校尉(進勇校尉) 후령別莊(後領別將)을 지낸 附言頃 (夫彦景)을 日世祖(一世祖)로 하여 世界를 이어오고 있다.

本館 [ 編輯 ]

耽羅國이 498年에 百濟 에 依해 服屬되었고, 朝鮮 時代에는 全羅道 濟州목 이었다.

世宗實錄地理志에 濟州목 (濟州牧)에 對해 다음과 같이 說明되어 있다.

本註(本州)는 全羅道의 南쪽 바다 가운데 있다. 그 株(州)의 고기(古記)에 이르기를,"태초(太初)에는 사람과 物件이 없었는데, 新鮮[神人] 세 사람이 땅으로부터 솟아나왔다. 只今도 珠算(主山) 北쪽 기슭에 ‘모興(毛興)’이라 하는 구멍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곳이다. 맏을 양을나(良乙那), 둘째를 고을나(高乙那), 세째를 부을나(夫乙那)라고 하였다.

1946年 全羅南道에서 分離되었고, 2006年 濟州特別自治道 로 昇格되었다.

分派 [ 編輯 ]

附言京義 曾孫 附蔘로(夫三老)가 世宗 때 通訓大夫(通訓大夫)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兄弟 中 첫째 아들 不油殮(夫有廉)은 禦侮將軍(禦侮將軍)으로 濟州島를 지켰고 禦侮將軍(禦侮將軍)을 歷任한 그의 아들 不세영(夫世榮)의 아들 浮刻(夫恪), 不協(夫協), 部熱(夫悅), 副腎(夫愼), 不幅(夫幅), 부홍(夫弘) 6兄弟는 濟州6波(濟州六派)의 罷朝(派祖)가 되었으며, 附蔘로의 막내 아들 浮遊性(夫有成)李 陸地로 건너가 京畿道(京畿道) 漣川(蓮川)에 世居하였다.

科擧 及第者 [ 編輯 ]

濟州 不氏는 朝鮮時代 文科 及第者 1名, 武科 及第者 2名을 輩出하였다. [1]

人物 [ 編輯 ]

  • 부종인 (夫宗仁, 1767年 ~ 1822年 ) : 29歲 되던 해인 1795年 (正祖 19) 濟州 別試 文科에 入格해 展示직부의 特權을 얻고선, 乙卯(乙卯) 式年試(式年試) 甁과(丙科)로 及第하였다. 官職은 대정縣監(大靜縣監)?成均館四星(成均館司成)?禮曹正郞(禮曹正郞) 等을 歷任하였다. 부종인은 오랫동안 相對(霜臺:司憲府)의 檢察官으로 在職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높았다. 司憲府 地平으로 해치를 쓰고 法部를 지켰으나, 淸廉 剛直하여 많은 사람들이 欽慕했다고 한다. 부종인이 漢陽으로 올라와 처음으로 正祖 임금을 謁見했는데, 賃金이 "이 사람은 耽羅의 큰 집안 子孫"이라고 말하고선 有關(儒官)만이 맡을 수 있는 別檢에 除授했다는 逸話가 傳해온다. 1797年 朝廷에서 現職官僚를 對象으로 應製할 때, 부종인이 首席으로 合格했고 正祖 임금이 그를 淸要職 中 하나인 禮曹佐郞으로 拔擢했다. 이때부터 부종인은 侍從臣으로 正祖의 信任을 얻게 되었다.
  • 부수언(夫守彦, 1938年 ~ ) : 서울大學校 디자인學部 敎授
  • 부경생(夫庚生, 1940年 ~ ) : 서울大學校 應用生物化學部 敎授
  • 부만근 (夫萬根, 1942年 ~ ) : 第6代 제주대학교 總長
  • 부구욱 (夫龜旭, 1952年 ~ ) : 영산대학교 總長
  • 夫佐炫 (夫佐炫, 1956年 ~ ) : 第19代 國會議員
  • 浮腫休(夫宗休 1926∼1980年) : 生物學者,敎師
  • 不다혜(1988年 ~ ) : 現代音樂 作曲家 (dahaeboo.net)
  • 不僧官 (夫勝寬 1998年 ~ ) : 세븐틴 멤버

人口 [ 編輯 ]

  • 2000年 9,440名
  • 2015年 10,222名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資料 [ 編輯 ]

  • 뿌리찾기운동본부 編著 (1998年 4月 25日). 《한글版 우리집의 族譜》. 서울: 民衆서원. 附錄 9~10쪽쪽.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