政治的 無關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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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的 無關心 (政治的 無關心, 英語 : political apathy )은 政治 的인 事件이나 運動에 對한 功績이거나 個人的인 無關心을 말한다. 해럴드 라스웰 데이비드 리스먼 에 따르면 政治的 無關心은 몇 가지 類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無黨派적 志向을 가진 사람들을 政治的으로 無關心하다고 看做하기도 하나, 嚴密히 말해서 政治的 無關心과 政黨에 對한 無關心이 一致하는 槪念은 아니다.

槪要 [ 編輯 ]

現代 大衆社會 理論은 人間이 반드시 政治的 動物인 것은 아니라고 밝힌다. 普通選擧權의 附與가 大衆으로 하여금 모두 政治에 參與케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政治에 關心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事實이다. 政治에의 參與와 이에 對한 無關心은 오늘날 많은 社會科學者들의 分析 對象이 되고 있으며 이 現象의 原因에 對한 糾明도 널리 進行되고 있다.

政治社會를 階層化 한다면, 아래와 같이 區分된다.

  1. 權力層,
  2. 權力 追求層,
  3. 政治的 階層,
  4. 非政治層 或은 政治的 無關心層

먼저 세 階層은 政治的 決定作用에 心理的으로 或은 行動的으로 干與하고 있는 사람들로 構成되는 反面, 非政治層은 政治過程의 全般에 對해서 關心을 갖지 않거나 反感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大部分의 西歐 民主主義 國家에 있어서 大衆의 政治參與度는 그리 높지 않다. 政治에 關心을 나타내는 部分은 모든 市民을 包含하는 것은 아니다. 先進 民主主義가 定着된 여러 나라에서도 많은 市民들은 政治에 無關하거나 受動的이다. 政治的 無關心은 個個 民主主義局에 따라 그 道의 振幅이 다르지만 이는 거의 普遍的 現象이 되고 있다. 人間은 政治體制 안에서 살고 또 살아야 하더라도 반드시 政治生活에 參與한다는 것은 아니다.

政治的 無關心 은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두 側面을 考慮하는 境遇에 우리들은 民主主義와 政治的 無關心 또는 그 反對로 政治參加와의 關係를 單純히 못박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理解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參加가 그대로 政治的 線(善)이라는 것도 아니지만 모든 無關心이 그대로 政治的 惡(惡)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問題는 無關心의 量(量)과 質(質)의 問題가 된다. 政治的 無關心을 具體的 實證的으로 어떻게 무엇으로 재는가 하는 데 이르게 되면 여러 가지 곤란한 問題가 나온다. 例를 들면 普通 無關心의 表現으로 되는 選擧時의 棄權率과 또는 一般 輿論調査市의 DK(Don't Know)의 퍼센티지에 내보아도 우리나라의 境遇에도 政治意識이나 知識이 더욱 높아 DK가 보다 적다고 하는 都市에서 보다 많은 기권수를 나타내므로 棄權率은 無關心의 程度를 나타내는 것보다 오히려 政治的 動員率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생각되는 것이다.

또 DK의 퍼센티지를 關해서도 共産國家는 0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賞讚(賞讚)할 것인가 하는 點에서 어떤 論者는 그것은 '無關心으로 있을 수 있는 自由'조차 認定치 않는 좋지 못한 政治主義로서 境遇에 따라서는 그것은 一種의 精神的 拷問이 될 수도 있다는 解釋을 내리고 있다. 그러니까 政治的 無關心의 問題는 이것을 抽象的인 理論으로서 展開하는 것은 相當히 進步되어 있다고 해도 그 나란 實情에 따라서 이것을 正確히 測定한다고 하면 只今 더욱 不完全한 手段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無關心의 質(質)의 問題에 對해서는 더욱 把握이 곤란하게 된다. 民主主義에 있어서 無害(無害)한 것 따라서 許容할 수 있는 또는 認定하지 않을 수 없는 無關心이란 것은 必要로 하는 政治的 關心과 表裏를 이루고 相互間에 辨證法的인 結合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실존적 無關心은 바로 이러한 性格을 갖는 것으로서 그 構造가 더욱 明確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民主主義 의 理論에 依하면 린제이( 1879年 - 1952年 :英國의 政治學者)가 말한 바와 같이 政治는 結局 우리 人生에 있어서는 第2의적(第二義的)인 것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 人生에 있어서는 다른 것에 보다 重要한 領域이 存在한다고 하는 것이고 그 領域에 對한 關心은 政治에의 關心을 最高의 義務로 하는 것을 拒否할 수 있을 것이다. 卽 民主主義의 理論은 그自身 속에 政治第一主義를 警戒하고 政治的 無關心을 許容하는 싹을 內包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政治的 無關心이 그 社會가 잘 되어 가고 있다는 徵兆이며 緊急한 解決을 요하고 있는 根本的 問題의 缺如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들은 오히려 政治社會의 正常性(正常性)의 指標로서 歡迎해야 될 것인지도 모른다. 政治的 無關心이 現代社會에 있어서 自己疏外의 徵候이고 그 結果라고 할 수 있는 境遇에만 우리들은 人間을 自己 疏外에서 解放하여 眞實로 사람답게 하기 위한 싸움의 一環으로서 政治的 無關心을 攻擊의 對象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政治的 無關心의 要因 [ 編輯 ]

現代型의 無關心은 政治에 對한 知識을 풍부히 갖고 있는데도 不拘하고 意識的으로 政治에 無關心하며 私的 生活에로 逃避하려는 것과 같은 無關心이다. 政治的 無關心은 1次 世界大戰 以後로부터 생겼는데, 19世紀 自由主義者는 大體로 一般民衆의 政治的 無關心과 受動性은 그들이 政治에 參與할 수 있는 權利와 機會를 갖지 못하는 데서 생겨진 것이므로, 選擧權을 擴大시키는 한便 敎育을 통한 啓蒙을 斷行하며 自然히 一般民衆은 政治的으로 自覺하게 될 것이며 또한 積極的으로 政治的 活動도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現實은 選擧權의 擴大로 인해 一般民衆으로 하여금 政治的인 無關心과 受動性을 가져왔다. 現代社會에 直接的인 政治的 無關心의 要因으로는 다음과 같다.

  1. 現代 政治過程의 複雜化: 現代時代의 政治過程의 複雜化는 大衆에게 無力함이나 疏外感을 갖게하였다. 自身들의 生活에 重要한 政治的 決定임에도 不拘하고, 參與할 수 없음이 一種의 無力感으로 다가 오게된다.
  2. 分業에 따른 各種疲勞와 생각의 受動化: 現代時代 社會內部에서 보이는 各種 分業은 政治的 無關心을 가져오게 한다. 分業으로 因해 똑같은 일을 機械的인 反復은 心身의 疲勞함을 提供하여, 職場 밖에서의 充分한 休息을 要求한다. 또한, 分業은 創意的인 생각을 할 餘裕가 없어 생각이 漸漸 受動化 된다.
  3. 大衆媒體에 依한 痲醉的 機能: 現代의 다양한 大衆媒體와 大衆娛樂의 發達은 政治的 無關心을 가져오게 한다. 이른바 3S(screen, sports, sex)政策은 大衆의 關心을 非政治的 領域으로 돌림으로써 政治的으로 無關心케 하려는 政策이었다.
  4. 삶의 質 向上: 消費經濟體制가 繁榮함으로써 삶의 質도 上昇하며 不滿의 餘地가 없어지면서, 政治와 같은 公共의 問題에 對해 無關心하게 된다는 것이다.

無政治的 態度·脫政治的 態度·半政治的 態度 [ 編輯 ]

政治에 對한 態度를 해럴드 라스웰 (H. D. Lasswell, 1902年 - 1978年 :美國의 政治學者)은 無政治的 態度·脫政治的 態度·半政治的 態度의 셋으로 區別했다.

  1. 無政治的 態度(無政治的態度,emipolitical)라는 것은, 政治에 對해 價値를 認定치 않고 오히려 藝術과 科學 等의 領域에서 얻을 수 있는 保守와 價値의 便이 政治에서 얻는 그것보다 貴하다고 생각하는 境遇 政治에 參加하든가 關心을 보이든가 하지 않는다는 態度이다.
  2. 脫政治的 態度(脫政治的態度,nonpolitical)라고 하는 것은 政治에 對한 要求와 期待가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實現하는 手段과 影響力이 모자라기 때문에 幻滅을 느끼고 따라서 政治에서 脫落 乃至 人退(引退)한다고 하는 態度이다.
  3. 半政治的 態度(反政治的態度,unpolitical)는 무엇인가의 宗敎的·道德的·思想的인 立場에서 政治에 反對하고 이것을 否定하는 立場으로서 이러한 境遇에는 오히려 政治에 對하여 否定的인 關心이 되어서 나타난다. 이것에 對하여 無政治的 및 脫政治的 態度는 政治的 無關心의 形態를 取한다고 보겠다.

政治的 無關心의 形態에 따른 分類 [ 編輯 ]

敎育 水準이 向上된 先進産業社會에서 大衆의 政治的 無關心이 遍在하고 深化하는 原因은 複合性을 지닌다.

제各其 原因의 特徵에 따라 政治的 無關心의 形態로 內容을 分類하면 다음과 같다.

전통형 無關心(傳統型無關心) [ 編輯 ]

政治問題가 自己에게는 異質的인 것이며, 政治는 높은 사람만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처음부터 政治를 權力者·支配者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政治에 關心을 보이지 않는 態度가 傳統兄 無關心이다. 特히 女性에게는 政治가 男性의 特權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下流層에 있어서는 政治는 上流層의 責任이라고 看做된다. 이처럼 '政治는 他人의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態度를 데이비드 리스먼 (D. Riesman, 1909年 - 2002年 :美國의 社會學者)은 '傳統志向型의 無關心'이라고 規定한다.

이 無關心의 背後에는 權力에 對한 高度의 忠誠과 服從心이 政治的 社會化의 過程에 依해서 養成되어 있다는 것에 注意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거기에는 權力者는 恒常 庶民層(一般國民)의 일들을 생각해서 苦生해 준다고 하는 權力者 自身의 생각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態度의 現代版은 專門家 過信에서 오는 無關心에서 볼 수 있다.

卽 政治는 政治家에게 맡겨 버리면 되고 우리는 말參見을 할 必要도 없다는 態度에서 오는 無關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政治家를 뽑는 選擧만은 投票하지만 다음은 一切 無關心하게 되어 投票가 無關心의 隱蔽나 口實에 不過하다. 例를 들면 日本의 農村 等地에서는 投票率에 있어 都市보다 훨씬 높으나 政治的 關心度에 있어서는 그 反對가 되는 結果가 보인다. 따라서 投票라고 하는 政治參加와 政治的 關心의 度數는 반드시 平行하지 않다.

信賴型 無關心(信賴型無關心) [ 編輯 ]

個人의 參與 없이도 政治的 結果가 만족스럽다고 여길 때 사람들은 政治에 關心을 갖지 않는다고 로버트 달 (R. Dahl)은 主張한다. 어떤 政治的 決定이 重大하다고 믿음에도 不拘하고 한 市民은 그 結果가 좋을 것이라고 自身을 갖게 되면 그 決定에 干與하지 않게 되는 수가 있다. 自己의 政治的 效率性에 對해서 自身이 없을 境遇 政治에 參與하지 않는 것처럼, 政治體制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決定作成의 公正性과 그 正統性에 對한 깊은 信賴는 個人의 政治參與를 不必要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政治的 或은 經濟的 不安이 惹起되면, 無關心했던 市民들은 다시금 政治나 社會運動을 통해서 事態의 改善을 企圖하게 된다. 繁榮期에는 有權者의 政治參與率이 減退하나 經濟的 不況期에는 上昇한다는 것이 美國社會에서 볼 수 있는 現象이다.

無政治型 無關心(無政治型無關心) [ 編輯 ]

다른 人間的 活動에서 期待하는 報酬에 比해서 政治的 干與에서 얻는 補修를 낮게 評價하는 境遇 사람들은 政治에 介入하지 않게 된다고 라스웰과 달은 主張한다. 例를 들면 藝術이나 科學과 같은 活動에 對한 높은 評價는 權力에 對한 無關心으로 結果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政治活動이 輸入과 安定 그리고 興味面에서 얻는 것이 멀고 曖昧하다. 사람들은 直接的이고 具體的인 結果를 바라는 傾向이 크기 때문에 政治的 干與로 치르는 代價는 너무나 크다고 여겨지기 쉽다. 無政治的 無關心은 人間이 本能的으로 合理的인 市民이 아니라는 것을 說明해 준다고 로버트 달 은 말했다. 人間의 가장 큰 欲求와 가장 强力한 滿足感은 生理的이고 生物的인 衝動과 欲求, 그리고 欲望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苦痛과 不便을 避하려는 欲求와 性慾, 愛情, 安定에 對한 欲求는 本來的이며 持續的이다. 이러한 제 欲求의 迅速한 充足의 手段은 一般的으로 政治生活의 밖에서 찾아 볼 수 있다.

現代型 無關心(現代型無關心) [ 編輯 ]

現代型 無關心은 두 가지 點에서 傳統兄 無關心과 다르다.

  1. 近代 以後의 民主主義 理論에 依해서 모든 市民이 政治에 關心을 가지고 政策決定에 무엇인가의 形態로 參加하는 것이 道德的 前提이며 市民 本分으로 되어 있는데도 不拘하고 거기에 現象(現象)으로서 볼 수 있는 無關心이라는 點에서 그러한 前提가 없던 社會에서의 無關心하고는 다르다.
  2. 現代社會의 構造와 特質 그 自體가 無關心을 助長한다고 하는 것에 依해서 나타난 無關心이라는 點에서 그것은 傳統型과 다르다. 卽 所謂 大衆社會라든가 大衆 消費社會라고 불리는 現代社會의 社會學的 特質과 그러한 社會에 살고 있으면서 특수한 心理病理的 性格(心理病理的 性格)을 발달시키는 個人의 心理學的인 特質이 어울려 政治的 無關心을 增大시키고 있다고 하는 意味로서 그것은 現代型인 것이다.

脫政治型 無關心(脫政治型無關心) [ 編輯 ]

脫政治型 無關心 또는 屈折的 無關心(屈折的無關心)이라 불리는 것은 本來 强烈한 政治的 關心이 存在했었는데도 不拘하고 政治에 對한 要求와 期待가 뜻대로 實現되지 않기 때문에 幻滅을 느끼고 그로 인해 政治的 關心이 얕아져 버린 境遇를 가리킨다.

屈折的 無關心이라는 말에는 本來의 關心이 꺾어지고 삐뚤어져서 無關心으로 電話(轉化)하고 있다고 하는 意味가 包含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屈折的 無關心은 일정한 條件이 具備되어 屈折의 原因을 除去해 주면 斷然 또다시 政治的 關心으로 되돌아오는 可能性이 있다. 그런 意味로 이 屈折型은 처음부터 無關心과 區別되지 않으면 안 된다. 屈折型 無關心은 실존적 無關心과 더불어 一種의 潛在的 關心이라는 것에 注意할 일이다.

해럴드 라스웰 은 政治的 影響力의 行事에 있어서의 期待充足의 挫折로 個人의 政治的 活動의 減退를 招來한다고 말한다. 美國 社會에서 實施된 經驗的 調査에 依하면 個人의 政治的 效率性과 그의 政治參與度間에는 뚜렷한 關聯性이 存在한다.

政治的 事件에 影響을 미치는 自己의 能力에 對해서 悲觀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는 것과는 關係가 없기 때문에 이를 避한다고 로버트 달 은 說明한다. 有權者들은 때때로 그들의 한 票가 投票結果를 左右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棄權하게 된다. 이 脫政治性은 政治的 疏外로 特定지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疏外는 統合에 對한 反對 槪念으로서 政治體制로부터 所願해 나가는 意識現象을 가리킨다. 政治人들의 行動에서 볼 수 있는 無規範性이든가 政治過程에 있어서의 個人이 肥效率性은 政治的 疏外로 表現되기 쉽다.

個人의 政治知識과 政治現實間에 不一致가 存在하는 境遇, 政治體制로부터의 所願과 이에 對한 反感이 惹起된다. 政治的 疏外는 個人으로 하여금 旣存體制에 對한 否定的 態度를 形成케 함으로써 때로는 無政府的인 破壞行動으로까지 이끌게 한다. 體制로부터의 人退를 消極的인 政治的 疏外라고 한다면 體制에 對한 攻擊的 態度는 能動的 疏外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政治的 或은 經濟的 惠澤을 剝奪當한 市民들은 投票를 통해서 또는 過激한 境遇에는 體制의 顚覆을 祈禱함으로써, 權力者에 對한 不滿을 表示한다. 疏外된 市民들은 社會가 權力者와 無力者와의 陽極으로 分離된다고 믿는다. 한便 消極的 疏外는 權力과의 一方的인 政治的 決定을 지속시키고 助長하게 된다. 大衆의 疏外는 現狀維持를 許容케 하고 權力의 暴力化를 可能케 한다.

私生活火刑 無關心(私生活化無關心) [ 編輯 ]

現代社會는 複雜하고 專門化가 進行됨에 따라서 社會全體를 깊이 注目하든가 或은 어느 問題를 社會 全體와의 關聯에서 把握하든지 하는 일은 漸漸 곤란해졌다. 巨大한 組織과 機構가 우리들의 無力함과 軟弱함을 맛보인다. 이러한 巨大社會案에 있어서 우리는 자칫하면 私生活의 逃避를 計劃한다. 現代社會의 沙漠(砂漠) 속에서 私生活은 오아시스가 된다. 그래서 私生活에 對한 關心은 社會全體에 對한 無關心과 比例하기에 이른다. 私生活에 依한 조그마한 幸福이 繼續되는 限 사람은 政治나 國家의 趨勢에는 無關心해진다.

그는 私生活에 直接 關係가 있는 理解에는 敏感해도 그 以外의 보다 公共的인 利益과 問題에 關해서는 그다지 關心이 없다. 例를 들면 술이나 담배의 값이 올라가는 데는 敏感하게 反應을 보이나 選擧法의 改正이나 對外援助의 問題에 關해서는 아무런 關心도 보이지 않는다. 卽 이러한 私生活火刑의 無關心에 認定되는 것은 日常的 理解에 關한 受益者적(收益者的) 關心 뿐이다. 身邊의 利益이나 눈앞의 利益에만 敏感한 關心은 그러한 理解關係에 따라서만 政治行動을 일으킬지 모르나 그 境遇에는 認識보다는 情緖의 便이 支配的이 되고 앞뒤를 가리지 않는 '段落型(短絡型)'의 政治行動에 빠지기 쉽게 된다. 더욱 이러한 兄의 關心에 對해서는 操作이 極히 容易하다.

卽 確實한 模樣을 갖추어서 눈앞에 利益을 提供함으로써 受益者(收益者)의 感覺을 만족시켜 주면서 한便으로 눈치채지 않게 긴 眼目으로 決定的인 不利益이 되게 하는 重要한 政治的 決定을 行하는 境遇가 있다. 이것이 所謂 '懷柔와 强壓'의 政策으로서 私生活火刑 無關心의 境遇는 쉽게 그 犧牲이 되기가 쉬운 것이다.

消費型 無關心(消費型無關心) [ 編輯 ]

消費型 無關心이라 불리는 것은 私生活火刑 無關心과 極히 가까운 關係에 있다. 왜냐하면 私生活에 對한 關心은 同時에 消費와 레저에 對하는 關心이기 때문이다. 現代社會는 漸漸 大量消費의 社會로 發展되어 왔다. 私的 生活의 幸福은 消費의 增大가 가져오는 豐富한 幻想과 威信의 滿足에 依存한다. '政治的인 疏外感'은 쉽게 經濟的인 充足感에 依해 메꾸어지고 大衆社會의 不安感은 大衆娛樂의 氣分풀이로 解消된다. 娛樂도 레저도 모두 大量消費와 連結되어 있다. 그래서 '惡化가 養子를 構築한다'고 하는 經濟學의 命題(命題)에 따른다면 '政治라고 하는 경화(硬貨)'는 '大衆娛樂이라는 紙幣'의 濫發에 依해서 構築되기에 이른다.

政治的 爭點을 둘러싼 鬪爭은 體面과 威信을 둘러싼 競爭으로 바꿔지고 있다. 現代人에 있어서는 欲求의 인스턴트韓 充足이 幸福의 代名詞가 된다. 그러므로 에리히 프롬 ( 1900年 - 1980年 :美國의 精神分析學者·社會學者)이 말하는 것과 같이 '欲求 不滿이 없다는 것'李 現代人이 自己의 同一性을 끊임없이 確認해 가기 위한원리로 된다. 거기서 人間은 單純한 '欲望과 充足의 體系'로 빠진다. 더욱이 그 欲望은 宣傳과 廣告에 依해서 人爲的으로 만들어진 欲望일 境遇가 많고 우리들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를 現代의 '숨은 說得者'는 우리들의 마음의 深層(深層)에 스며들어 의식하지 못할 만큼 살짝, 그러나 拒否할 수도 없을 만큼 强力하게 알려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消費에 沒頭하면 할수록 理解하기 힘든 政治에 對해서는 無關心하게 된다. 그것은 政治는 現代人이 求하는 인스턴트韓 欲望의 充足에는 該當되지 않기 때문이다.

現代社會의 이러한 無關心은 政治權力, 經濟權力에도 좋은 機會이므로 이러한 消費型 無關心을 造出(造出)하는 것에 共同工作을 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政治權力과 經濟權力은 相互間에 손을 잡고 더욱 매스 미디어 를 가지고 消費型 無關心을 助長하여 이 無關心을 지레로 하여 大衆操作을 活潑히 進行하게 된다. 現代型의 無關心은 무엇이나 私生活火刑과 消費型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現代社會에 놓인 生活의 斷片化·細分化에 따라서 全體的 視野를 갖는 것이 漸漸 곤란해지면 곤란해질수록 自己의 좁은 領域에 틀어 박혀서 무엇인가에 沒頭하고 政治的 無關心을 그 結果로서 招來하는 일이 많아진다. 거기에 사람은 政治에 時間과 에너지를 投入하여도 그 效果가 적고 따라서 自己의 政治的 效率이 나쁜 것을 알고 政治 以外의 領域에서 얻어지는 價値와 報酬가 높다고 믿는 境遇에는 自進해서 政治에 關心을 보이지 않게 된다.

실존적 無關心(實存的無關心) [ 編輯 ]

'政治에 精神을 팔고 있다'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政治的 自己疏外의 表現이 될 수 있다. 政治的 無關心도 政治的 自己疏外의 表現일 境遇가 많다. 그러나 政治的 自己疏外가 아닌 政治的 無關心도 생각할 수 있다. 卽 無關心으로 있어도 관계없고 無關心으로 있을 수 있는 限은 無關心이지만 無關心으로 지나쳐 버릴 수가 없는 問題가 일어났을 때는 斷然 關心이 일어난다는 狀態와 같이 極히 실존적인 性格을 가진 政治的 無關心이 있다. 그것이 '실존적 無關心'이라 불리는 性質의 것이다.

오늘날 社會에는 여러 가지 것이 우리들의 關心을 이끈다. 따라서 職業的인 政治家가 아닌 한 우리는 24時間 中 恒常 政治에 對해서 높은 關心을 지속시키고 있을 수는 없다. 政治에 對한 關心만을 特히 剛하게 지속시키려는 國家는 往往 全體主義的 傾向을 보인다. ' 全體主義 (全體主義)' 國家에서는 政府와의 協力과 忠誠을 여러 가지 手段으로 人民에게 불어넣지 않으면 存續(存續)의 基礎가 威脅당하기 때문에 政治的 關心의 有無를 따질 것 없이 보지(保持)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데이비드 리스먼 이 指摘한 것과 같이 政治的 無關心은 全體主義 體制의 完全한 勝利에 있어서 主要한 障礙를 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에 對해서 民主主義의 社會에서는 生活의 全部가 정치화되는 것이 아니고 多元的인 價値의 追求가 非政治的 領域에서 行하여질 수 있다. 그러한 데에서는 社會의 基礎를 이루는 基本的 合意·一致 所謂 國民的 合意(내셔널 컨센서스, national consensus)가 確固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政治가 잘 되어가고 있다고 하는 信賴와 安心이 있으므로 政治에 對해서는 無關心으로 있을 수 있다고 하는 境遇가 있다. 그 反對로 社會의 基本的 一致와 價値가 威脅된다고 생각되었을 때는 이 無關心은 明確한 政治的 關心으로서 登場한다.

卽, 社會의 根本이 위협당하지 않는 限 無關心하게 있을 수 있는 일에 關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儀式으로서 平常時는 無關心한 것 같으면서 憲法이나 戰爭과 平和의 問題라고 하는 基本的인 政治問題가 爭點이 될 때에는 强力한 關心과 行動으로 履行(移行)한다고 하는 性格을 가지고 있다. 恒常 高度의 政治的 關心을 持續하는 것이 相當한 心理的 負擔이 되는 것 같은 現代 社會에서는 必要한 最小限의 政治的 關心과 그리고 反對로 말하면 許容될 수 있는 最大限의 政治的 無關心을 狀況에 따라서 表明하는 실존적인 政治에의 關聯이 더욱 더 要求되는 것이다.

政治的 無關心의 問題點 [ 編輯 ]

政治的 無關心이라는 말이 흔히 問題가 되는 境遇가 많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투표하지 않는 사람' 또는 '政治에 參加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問題로서 다루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調査할 때 '모른다' '알 수 없다'고 對答하는 所謂 'D. K. 層(Don't Know 層)'의 問題로서 생각하고 다시 그것을 넓혀서 '政治的 無知(政治的無知)'의 問題로 取扱하고 있다.

또 다른 論者(論者)는 政治에서 疏外되어 있는 人間 或은 政治의 立場에서 疏外感을 가지고 있는 人間에 注目하여 '政治的 疏外(政治的疏外)'의 問題에다 焦點을 맞추고 있다. 때문에 表現은 다르지만 政治에 對한 '無關心'·'悲慘가(非參加)'·'무지'·'소외(疏外)' 等은 全部가 大體로 같은 問題意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도 좋다.

그래서 問題가 되는 것은 이런 것의 現象이 實際로는 어떠한 模樣 또는 範圍로 나타나 있는가, 그러한 것이 나오는 社會的 原因과 主觀的 動機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것이 政治와의 關係에서 어떠한 效果 乃至 結果를 나타내는가 하는 여러 點이다.

政治的 疏外 [ 編輯 ]

政治的 疏外 (政治的疏外)란 政治에 對한 無力感·無意味감·不滿感·不信感·違和感(違和感) 等으로서 체험되고 政治의 世界에서 自己 現實이 빠져 있다고 하는 挫折感으로도 體驗된다. 그러나 問題는 이러한 疏外感이 마침내 느낄 수 없을 程度로 疏外가 進行하여 政治에서 隱退해 버린다든가 政治에 對해서 無關心이 되어 버리는 일이 있다. 그 境遇에는 政治的 隱退와 無關心은 政治的 疏外의 結果이며 同時에 또 그 表現이기도 하다.

勿論 政治的 效果를 合理的으로 判斷해서 政治에서 隱退하든지 無關心이 되는 境遇에는 政治的 疏外가 아니니까 政治的 隱退와 無關心에는 政治的 疏外로서 매듭져 버릴 수가 없는 것도 있다. 棄權者나 政治參加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同一하다. 그 사람들 가운데도 理性的 判斷에서 棄權하든가 政治에 參加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므로 그 全部가 政治的으로 疏外된 사람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政治的 無知 [ 編輯 ]

政治的 無知 (政治的無知)와 政治的 無關心 및 政治的 悲慘가(非參加)의 사이에는 相關關係가 있다. '關心이 없으니까 잘 모른다', 그러니까 "行動도 안한다" 라고 말하는 것 같이 이들 사이에는 相互間에 關係가 있다. 그렇지만 이 3者가 모두 政治的 疏外의 表現이라고 簡單히 말해 버릴 수는 없다.

政治的 無知에 對해서도 로버트 렌 (美國의 政治學者)은 여러 가지 主張을 披瀝하고 있다. 例를 들면 '葛藤을 避하기 위한 無知'가 있다. 마르크스주의 以外의 것을 읽으면 도리어 混亂된다고 하며 읽지 않는 共産主義者가 여기에 該當한다. 無知 때문에 心理的 葛藤을 避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相對의 좋은 곳을 모르는 便이 相對方에 對해서 도리어 攻擊的으로 行動해 버릴 수 있으므로 相對를 모르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 無知가 있다. 카타르시스 敵(感情을 純化시키기 위해서의) 무지라고 불리는 것이 이것으로서 이 無知는 强烈한 行動이나 參加와 맺어지는 것을 注意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社會的 現狀維持에 滿足하고 있는 사람은 現象變革的 志向(現狀變革的志向)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는 現象에 對하여 無知로 있을 수 있다. 또한 政治를 日常生活의 直接的 關心社로부터는 因緣이 먼 것이라 해서 自身의 個人的인 現狀維持를 重要視하는 사람도 政治에 對해서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無關心的 無知'라 불리는 것이다.

다음으로 政治的 意見은 때로는 親舊 사이를 금이 가게 하는 것으로 그것을 避한다고 하는 無知가 있다. 그것이 '社敎化(社交化)를 위한 無知'이다. 또 政治的인 일 때문에 自己를 내세우지 않고 가만히 놔둬 달라는 '私生活化(私生活化)를 위한 無知'도 생각될 수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政治的 無知와 無關心을 바로 民主主義의 威脅이라든가 市民으로서의 怠慢으로 생각해 버리는 性急함을 警戒함과 더불어 그것들이 不必要하고 病的인 形態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警告하지 않으면 안 된다.

政治的 無關心의 危險性 [ 編輯 ]

政治的 無關心의 마이너스面을 强調하는 論者(論者)의 말에 依하면 不參加(不參加)로 因해서 本來 政府가 받아들여 活用하여야 할 國民이 經驗이 政府에 依해서 대표되지 않게 되고 따라서 또 支配者는 不參加者의 必要와 理解를 無視해도 相關 없다는 것이 된다. 더욱이 實際問題로서는 이렇게 해서 대표되지 못할 憂慮가 있는 사람들은 實은 그 利益이 가장 대표될 必要가 있는 社會的 弱者와 貧困者이다. 더욱이 廣範한 無關心은 無責任한 支配者를 抑制하여 專制(專制)와 權力의 濫用에 抵抗하는 것을 妨害한다.

그 위에 政治的 無關心과 政治的 無知와 政治的 不參加와의 사이에는 이미 본 바와 같이 자칫하면 一種의 惡循環의 關係가 있다. 그 反對로 政治的 參加에로 誘導當한 사람은 그것 때문에 政治的 學習의 機會를 많이 하고 政治的 責任意識을 깊게 하여 自己의 政治的 效率에 對하여 차츰 自身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政治的 無關心이 어떠한 動機로 關心이나 行動에 轉換될 境遇에 때때로 '段落型(短絡型)'의 政治 活動이 되어서 極端的인 形態로 爆發하는 일이 있다. 따라서 無關心을 放置하는 것은 暴發의 可能性을 恒常 안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政治的 無關心과 民主主義 [ 編輯 ]

政治的 無關心과 그에 따른 政治不參가(政治不參加)가 民主主義에 있어서는 危險한 것일까. 그것은 大體 어느 만큼의 程度에서 그렇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모든 市民이 活潑하게 參加하는 民主主義라는 것은 民主主義의 以上이기는 하나 歷史的인 現實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로버트 달 이 指摘한 바에 依하면 直接民主制度(直接民主制度)의 典型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의 都市國家(都市國家)에 依한 民主主義의 境遇와 아테네에 對하여 아리스토텔레스 ( 紀元前 384年 - 紀元前 322年 :그리스의 哲學者)가 말한 바와 같이 市民의 議會參加는 반드시 滿足할 만한 狀態는 아니고 出席을 재촉하기 위해서는 一黨이 支給되었다고 하는 것으로서 더욱이 그 額數가 漸漸 뛰어오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또 美國 民主主義의 原形이라고 말하여지고 있는 開拓時代의 部落會議(타운 미팅)에서도, 例를 들면 뉴 잉글랜드의 境遇에는 不參加를 防止하기 위하여 缺席者에게는 罰金을 賦課시켰다고 하는 記錄이 남아 있고, 또 처음에는 週 1回 열리던 것이 다음에는 月 1回 開催되었고 더욱 그것이 延期되어서 마침내는 代議制的 인 것으로 履行한다고 하는 經過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民主主義의 原形과 典型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 해도 거기에 있어서 이미 어느 程度의 無關心과 不參加의 程度가 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더구나 어느 일정한 時代에 놓인 어느 나라의 選擧를 쭉 調査해 보면 政治參加度(政治參加度)는 相當히 일정한 傾向을 보여주고 있으며, 選擧 때의 變動도 그렇게 크지 않은 것이 指摘되어 있다. 그것은 參加度와 關心度가 政治問題가 어떠하고 狀況이 어떻다고 하는 要素 以外에 보다 恒常的인 社會的 要素나 心理的인 要素가 强力히 作用하고 있다는 것을 推定케 한다.

政治的 關心과 民主主義 [ 編輯 ]

너무 높은 政治關心과 確固한 信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說得으로도 意見을 바꾸는 일이 적다. 極端的으로 높은 關心은 때때로 極端的인 黨派性으로 바뀌게 되며 極端的인 黨派心은 極端的인 熱狂主義(熱狂主義)나 十字軍 敵 發想(十字軍的發想)에 빠지기 쉬우며 그러한 精神狀態의 사람이 社會에 많아지면 反對로 民主主義의 過程이 破壞될 憂慮가 생긴다.

民主主義의 政治過程에는 政治的 妥協이 恒常 必要하나, 政治的 妥協이 오늘에 와서는 嚴密한 展望과 理解計算(利害計算)에 基礎를 두는 것보다는 오히려 無關心의 탓으로 容易하게 되는 일이 많다. 政治에 對하여 關心이 낮기 때문에 도리어 많은 政治問題가 부드럽게 解決되어 간다고 할 수도 있겠다. ' 全體主義 '敵 體制에 있어서는 社會調査에 나타난 政治的 知識의 도와 投票率 等은 普通 民主主義局에 비하면 훨씬 높다. 그러므로 强制(强制)된 過剩關心은 반드시 民主主義에 있어서 플러스라고는 하지 못하고 오히려 全體主義 國家의 하나의 特徵을 이루는 高度의 政治化의 한 症狀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政治的 關心의 强制(强制) [ 編輯 ]

民主主義가 世論(世論)이나 同意에 依한 政治라고 하기 위해서는 世論形成에의 參加나 同意의 表現은 民主主義를 主權在民(主權在民)이라고 하는 데 있어 不可缺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無關心派(無關心派)를 强制로 참가시키는 것이 果然 얼마만큼의 意味가 있을까. 政治에 對해서 無知하고 또 關心을 갖지 않는 사람들을 어느 程度 作爲的(作爲的)으로 參加하게 했다고 해도 自己와 社會의 利益을 正確히 잡는 것도 아니고 民主主義의 基本的인 原則에 熟知(熟知)하고 있는 것도 아닐 것이므로 宣傳의 犧牲이 되기 쉽고 도리어 不必要한 混亂을 招來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無責任한 政治參加보다는 無關心의 便이 낫다'라고 할 수 있는 境遇가 있을 수 있다. 無關心層(無關心層)은 普通은 保守的인 立場의 同調者이든가 아니면 現狀維持에의 無意識的인 協力者로서의 政治的 役割을 한다. 無關心에 있어서는 現象變革的 志向(現狀變革的志向)이 나올 餘地가 없고 그 當時의 支配的 勢力에 包括的으로 政治的 運命을 맡기는 模樣으로 된다. 그래서 無關心層이 官地(關知)하지 않는 곳에서 政權의 交替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새로이 交替된 政權擔當者의 政策이나 決定은 社會的 緊張이나 反對 없이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無關心은 政治的 緩和劑로서 政治體制의 保守(保守)에 役割하는 面이 있으나 지나치게 興하면 民主主義的 政治體制의 注意(主義) 그 自體를 무너뜨려 버릴 뿐이다. 따라서 無關心은 이 2面性(二面性)에 있어서 把握되지 않으면 안 된다.

같이 보기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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