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昌根
(全昌根,
1908年
1月 18日
[1]
~
1973年
1月 19日
)은
日帝强占期
와
大韓民國
의 演劇人이며
大韓民國
의
映畫 監督
兼 映畫俳優이다.
生涯
[
編輯
]
咸鏡北道
會寧郡
出生이다. 22살에 상하이의 大衆化백合營便工事에 入社해 安重根의 一代記를 담은 <愛國魂>(정기탁)의 脚本을 編輯하였다.
[2]
윤백남
이 運營하던 윤백남프로덕션을 통해
1935年
新人으로 拔擢되어 《開拓者》에 出演하면서 映畫界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俳優와 助監督을 겸했다가 어머니의 甚한 反對로 撮影 分量을 削除하고 映畫 出演을 抛棄해야 했다.
以後
상하이
로 떠나
1937年
末에 歸國할 때까지 朝鮮 映畫界에서는 오랜 空白 期間을 가졌다. 상하이에서는
1936年
무렵부터 映畫界에 投身하여 《揚子江》(1937)의 脚本과 主演을 맡는 等 活潑한 活動을 펼쳤다. 全昌根과
정기탁
,
김일송
등은 함께 일하며 이른바 映畫界 상하이派를 形成했다.
상하이사변
으로 歸國한 뒤
考慮映畫協會
에 入社하여 映畫 《
福祉鰻鱺
》를 準備했다.
1938年
부터 3年에 걸쳐 完成한 大作이었다. 全昌根은
1941年
開封한 이 映畫의 시나리오를 쓰고 演出해 映畫 監督으로 데뷔했다. 全昌根 自身이 主演 俳優로도 出演했는데,
滿洲
를 背景으로 朝鮮人 移民者들의 삶을 그린 一種의 國策 映畫이다. 《福祉鰻鱺》 撮影 過程에서 朝鮮 映畫 最初로 콘티가 導入되었다는
有萇山
의 證言이 있다. 全昌根은 이 映畫가 上映되자마자 排日思想(排日思想)을 담은 映畫라 하여 100日 동안 獄苦를 치렀다.
[3]
以後
1940年代
에는
沁營
等과 함께 劇團
고협
을 創設한 뒤, 親日 演劇의 戱曲을 쓰고 演出하기도 했다.
[4]
이 때문에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選定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演劇/映畫 部門에 包含되어 있다.
[5]
고협은
朝鮮總督府
가 結成한
朝鮮演劇協會
에 加入하여 親日 演劇을 巡廻 公演하였으며, 全昌根은 自身과
임선규
,
함세덕
,
송영
,
이서향
等이 쓴 親日 戱曲을 演出해 舞臺에 올렸다.
光復 後
1946年
映畫監督俱樂部
에 參加하는 等
右翼
系列 映畫人으로 分類
[6]
되었고,
高麗映畫社
에 加擔하여
최인규
의 《自由萬歲》에는 脚本과 主人公으로 參與
[2]
한 것을 始作으로 映畫界로 돌아와 1960年代 말까지 映畫 監督과 시나리오 作家, 俳優로 다시 活潑히 活動했다.
《麻衣太子》(1956), 《단종애사》(1956), 《三逸獨立運動》(1959), 《高宗皇帝와 醫師 安重根》(1959), 《아 白凡 金九先生》(1960) 等 歷史的 事件을 素材로 한 史劇이나 時代劇을 즐겨 演出했다. 《自由萬歲》 以後 俳優로서 主로 맡은 配役은 獨立軍 役이었다. 《단종애사》에서는
엄앵란
을 發掘해 데뷔시키기도 했다. 마지막 演出作은
美國
의
차이나타운
을 素材로 한 《차이나타운 (아메리카의 中國人)》(1963)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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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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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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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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