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구 (190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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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구
李軒求
作家 情報
出生 1905年 5月 12日
咸鏡北道 明川郡
死亡 1983年 1月 4日
國籍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職業 評論家, 言論人, 作家, 敎育者
장르 文學評論

이헌구 (李軒求, 1905年 5月 12日 ~ 1983年 1月 4日 [1] )는 日帝强占期 의 言論人, 作家이며 大韓民國 의 文學評論家, 作家이다. 號는 소천(宵泉)이다. [2] 1949年 부터 1953年 까지 第2大, 第3代 公報處 次長 을 歷任하였다.

生涯 [ 編輯 ]

咸鏡北道 明川 出身이다. 寶城高等學校 在學 中이던 1923年 『 東亞日報 』 創刊 1,000號 記念 現象募集에서 「별」李 童謠·童詩 部門에 當選되었다. 1925年 日本 와세다 大學 第1高等學院 文科에 入學한 後 日本人 學生들 및 朝鮮人 留學生들과 함께 兒童文學 및 農民文學 關聯 活動을 했다.

1926年 에는 김진섭 , 이하윤 , 정인섭 等 도쿄 所在의 朝鮮人 留學生들과 함께 海外文學硏究會 를 組織하는 等, 外國文學徒로서의 文藝 運動을 始作한다.

1931年 와세다 大學 文學部 佛文科를 卒業하고는 歸國하여 劇藝術硏究會 를 設立하는 等 文藝 活動을 活潑히 展開한다.

1932年부터는 『 朝鮮日報 』 等 紙面에서 카프 系列 文人들에 反駁하고 海外文學派의 立場을 擁護하는 評論들을 揭載한다.

歸國 直後부터 3年間은 寶城保育學校에서 敎師로 勤務하였고, 1936年 부터는 『 朝鮮日報 』의 學藝部 記者로 勤務하다 『 朝鮮日報 』 廢刊과 함께 失職했다. 以後 寶城中學校張에 就任했다,

光復 後 『 民衆日報 』의 編輯人으로 參與하다가 1948年 民衆日報 』 社長 윤보선 이 公職에 任命되면서 『 民衆日報 』의 社長 兼 編輯局長을 歷任하는 等 言論인으로서도 活動했다.

日帝强占期 末期에는 絶筆한 經歷이 있다.

光復 後에는 海外文學派 中心의 中央文化協會 를 結成한 것을 始作으로 左翼 文壇에서 積極的으로 活動하면서 民族主義 擁護 評論을 發表했고, 1949年 부터 公報處 次長을 지내기도 했다. 이화여자대학교 國語國文學科 敎授를 歷任했다. 1957年 에는 대한민국예술원 會員이 되었으며, 1973年 藝術院 功勞賞을 受賞했다.

各州 [ 編輯 ]

  1. “藝術院會員 이헌구氏 別世”. 朝鮮日報. 1983年 1月 5日. 11面面.  
  2. 이헌구 - 韓國學中央硏究院

參考 資料 [ 編輯 ]

  • 권영민 (2004年 2月 25日). 《韓國現代文學大辭典》.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785쪽쪽. ISBN   89-521-0461-7 .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김병원
第2代 公報處 次長
( 金活蘭 과 共同)
1949年 6月 12日 ~ 1953年 4月 23日
後任
최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