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길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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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길버트
出生 1544年 5月 24日
영국 英國 콜체스터
死亡 1603年 11月 30日(59歲)
國籍 영국의 기 英國
主要 業績 著書 《磁石에 關하여》
電磁氣學 發展에 큰 功勞
分野 物理學 , 藥學 , 醫學

윌리엄 길버트 ( William Gilbert , 1544年 5月 24日 ~ 1603年 11月 30日 )는 英國 物理學者 , 醫師 이다. 磁氣學의 아버지 또는 英國 實驗科學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1] :102

콜체스터 에서 出生하여 케임브리지 에서 醫學 을 배우고 런던 에서 開業하였다. 뒤에 엘리자베스 1歲 의 侍醫로 일하였다. 科學의 泰斗(泰斗)로 잘 알려진 갈릴레이 보다 生年月日이 더 빠른 關係로 實際로 最初의 科學者라는 稱號를 받을 만한 資格이 있는 人物이다. 하지만 이는 ‘最初의 科學者’이기 보다는 ‘自己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길버트는 王立內科協會의 모든 公職을 두루 맡았던 대단히 成功的이고 著名한 內科醫師였으며, 女王 엘리자베스 1歲의 主治醫로 任命되기까지도 하였다. 이로써 醫學 쪽으로 名聲이 높았던 그는 化學에도 關心이 있었고, 이내 電氣와 自己에 對한 硏究로 方向을 틀었다. 自己의 性質에 對한 徹底한 探究로 科學의 한 分野인 物理學에 巨大한 발자취를 남긴 그는 18年 동안의 硏究 끝에 1600年, 《磁石에 關하여》라는 冊을 出版까지 하였다. 主要 著書 《磁石에 關하여》에서 自己 및 地磁氣(地磁氣)에 關한 學說을 經驗的·歸納的 方法에 依하여 展開하였다. 또 電氣 現象에 關한 理論을 記錄하였는데, 이것은 뒤에 케플러 , 갈릴레이 , 데카르트 等에 利用되었다. 또 ' 電氣 '라는 名稱은 그로부터 由來한다.이 冊에서 重要한 것은 ‘그가 무엇을’ 發見했는지 보다는 ‘그가 어떻게’ 發見했는지 그 過程 속에서의 意味가 있는 冊이다. 特히 이 冊은 實驗的 觀察에 對한 重要性을 强調하는 內容으로 갈릴레이에게 깊은 感銘을 줬기로 有名하다.

生涯 [ 編輯 ]

길버트는 에식스주 콜체스터 에서 1544年 5月 24日에 태어났다. "길버트"( Gilbert )는 後世의 英語 綴字法에 따라 쓴 表記로, 元來 表記는 "길버드"( Gylberde )이다. 그는 地域에 있는 古典文法學校(中, 高等學校)를 마치고, 1558年에는 케임브리지 大學校 에 進學하였다. 그의 어린 時節에 對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지만, 몇몇 記錄에 따르면 옥스퍼드 大學校 에서도 工夫했다고 한다. 1560年 學士課程을 마친후에는 케임브리지 大學校 의 세인트존스 칼리지( St John's College )에서 敎育을 받았다. 以後, 1569年 케임브리지 大學校 에서 碩士學位와 博士學位를 받은 後, 그는 런던으로 藥學을 工夫하기 위해 떠났다.

1573年 길버트는 英國 王立內科協會( College of Physicians )의 會員으로 當選되었다. 길버트는 王立內科協會에서 매우 좋은 評價를 받았으며, 무척 成功的이였기 때문에 1599年 會長으로 選出 되면서 좋은 時期를 보냈다. 1601年부터 그의 죽음 1603年度까지 그는 엘리자베스 1歲 의 主治醫로 지냈으며 女王이 죽자 後繼者인 제임스 1歲 는 그의 業績을 되새겨주며 內科醫師로 指名하였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서 1603年 12月 길버트는 59歲의 나이로 生涯를 마감하였다.

業績 [ 編輯 ]

길버트는 自己에 對한 硏究로 物理學 에 큰 劃을 그었다. 그는 처음에 物理學보다는 化學 에 關心이 더욱 많았지만, 化學이 鍊金術的 생각 卽 幻想的인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란 것을 깨닫고 硏究 方向을 電氣와 自己쪽으로 바꾸었다. 以後, 18年의 긴 硏究 끝에 1600年에 그는 有名한 著書 《磁石, 磁性體, 巨大한 磁石 地球에 關하여》( 라틴語 : De Magnete Magneticisque corporibus, et de Magno Magnete Tellure , 줄여서 《磁石에 關하여》)를 出版하였다.

길버트는 電氣 自己 現象을 體系的으로 硏究한 最初의 學者라고 할 수 있다. 그의 電氣와 自己에 關한 硏究와 생각들이 記錄되어있는 그의 代表的인 著書 《磁石에 關하여》는 1600年에 出版되었으며 同時에 유럽에서의 電氣와 自己의 硏究에 基本이 되었다. 當時 유럽人들은 羅針盤 을 使用하여 바다를 航海하였지만, 羅針盤의 磁石이 어째서 方向을 알려주는 지에 對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길버트는 磁石에 關한 硏究를 進行하면서, 그 때 傳播되어있었던 磁石에 關한 이야기들을 實際 實驗으로 옮겨 보았다. 길버트는 包括的이고 徹底하게 '마늘이 磁石의 自省을 약화시킨다', ' 天然磁石을 통해 頭痛을 治療할 수 있다' 같은 當時의 神祕主義的 믿음이 틀렸다는 事實을 證明하였다. 또한 길버트는 "테렐라"( Terrella )라고 불리는 地球 模型을 통해 地球가 하나의 巨大한 磁石이라는 事實을 밝혔다.

《磁石에 關하여》 第 2卷에서는 電氣에 關한 이야기들이 적혀있는데,그는 冊에서 磁石의 原因은 호박의 힘, 卽 電氣的인 힘과는 다르다고 言及하면서, 그 때까지 '好感과 反感, 감추어진 힘' 等 不確實한 用語를 使用하여 같은 分野로서 取扱되어오던 電氣學科 磁氣學을 各各의 獨立된 分野로 나누게 되었다. 그로 인해 電氣現象과 自己現象은 別途로 把握되고 說明되어야 하는 現象들로서 나뉘게 되었다. 이는 19世紀 初에 가서야 다시 電磁氣學 이라는 하나의 學問으로써 統合되게 되었다.

오늘날 同時代의 科學者인 갈릴레이 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길버트의 業績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길버트의 業績을 要約하자면, 첫째로 電氣學科 磁氣學을 分離하고, 베소리움 이라는 檢電器를 考案해 實驗電氣學의 틀을 잡고, 나아가 發散氣를 사이에 둔 近接作用으로서 電氣力의 모델을 만들어 實驗과 理論 兩面에서 靜電氣學의 出發點을 構築했다는 點이다. 둘째로는 地球가 하나의 巨大한 磁石이라는 것을 發見하고 地球 磁氣學을 만들어낸 것이다. 셋째로는 地球가 本源的 形象으로서 自省을 가진 活性的인 存在라는, 自己哲學을 提唱했다는 點이다. 이를 통해 半世紀 前에 提起된 地動說 卽 地球가 스스로 運動을 한다는 主張에 對해 自然學籍이고 形而上學的인 根據를 附與했다.

이 마지막 事實과 關聯해서는 현대 科學의 發想과 너무나 距離가 멀다는 理由로 科學史에서는 거의 無視되어 왔으나, 17世紀 全般, 近代 物理學科 近代的 宇宙床이 登場할 무렵에는 이 點이 가장 큰 影響을 미쳤다. 그 理由는 하늘에 있는 物體보다 地球가 卑賤하고 何等하기 때문에, 不活性이며 움직일 수 없다는 地球中心說 의 思想的 根據가 打破되었기 때문이다. 그 影響은 "地球도 움직일 수 있으며 달보다 더 밝게 빛날 수 있고, 世界의 밑바닥에 버려진 더러운 쓰레기는 아니다"라고 10年 後에 말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 로부터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길버트의 自己哲學은 獨逸의 케플러 , 英國의 윌킨스 으로 이어져 새로운 宇宙上을 形成하는 데 커다란 推進力이 되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的 思考觀念과 近代的인 物理學的, 動力學的 宇宙論의 中間 役割을 했다. 이렇게 새롭고 斬新한 假說을 내세움으로써, 科學史에서 重要한 轉換點을 提供했다는 點에서 科學者로서 높은 評價를 받을 수 있지만, 길버트의 論證에는 한가지 近代的이지 못한 點이 있었다. 그가 形而上學을 展開하고 物活論에 集中해 있었다는 點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近代 物理學의 法則은 定量的 測定으로 뒷받침되고 數學的 言語로 表現되어야 하는데, 길버트에게는 그런 方向成果 試圖조차 보이지 않는다. 實驗을 實行하고 解釋하는 그의 論理는 古代의 人物인 아리스토텔레스 式이었다. 그의 磁石에 對한 硏究 目的이 自力의 法則을 確定하는 것이 아닌 磁石의 本性에 對한 것이었음과 《磁石에 關하여》에서 單 하나의 測定値도 記錄돼 있지 않다는 點에서 길버트의 理論은 全혀 數學的이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길버트가 科學의 틀을 잡아가며 眞正한 科學者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前에는 主로 神祕主義者들이 科學의 硏究를 이어 갔다. 例를 들어 케플러나 티코等을 例로 들 수 있다. 勿論 그 들은 天文學에 큰 寄與를 한 것은 事實이다. 하지만, 但只 觀察과 記錄으로 이미 있는 事實을 밝힌 것에 不拘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科學보다는 神祕主義 敵인 것 例를 들어 六角形, 五角形, 四角形의 弔花, 占星術 等 現在로 봤을 때는 比 科學的인 內容이 많이 包含되어 있었다. 하지만, 윌리엄 길버트는 그러한 神祕主義的인 世界觀에 빠지지 않고, 또한 그러한 神祕主義 的인 생각들을 모두 自身만의 實驗的 方法으로 反駁하고 틀렸음을 밝혔다. 또한 그는 徹底한 코페루니쿠스의 信奉者였는데, 코페루니쿠스 天文學에 對한 論議가 追後에 빛을 바라기까지 하였다. 길버트가 實驗하는 方法을 써내려 가면 그 어느누구가 봐도 그 實驗을 反復할 수 있을 程度였다. 이러한 實驗 方法의 威力은 그가 한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幾何學이 가장 高尙하고 가장 어려운 證明을 위해 조금 微弱하고 卽自的으로 理解된 土臺들에서 때맞춰 솟아오르자, 그로부터 創造的 精神이 蒼空 위로 솟아올랐다. 우리의 自己 原理와 科學도 마찬가지인데, 順序別로 보면, 먼저 若干 드문 事件과 關聯된 일정한 事實들을 說明해주고, 여기서부터 좀 더 例外的인 種類의 事實들로 나아가 마침내 地球에 있는 가장 祕密스럽고 內密한 것들이 드러난다. 그리고 옛 사람들의 無關心으로 또는 現代人의 無關心으로 눈에 띄지 않았거나 注目받지 못했던 것이 그 原因이라는 것을 알 게 된다. [1] :105

《磁石에 關하여》 [ 編輯 ]

윌리엄 길버트의 著書 《磁石에 關하여》 1628年版 表紙

윌리엄 길버트의 代表的인 著書인 《磁石에 關하여》(《자기에 對하여》)는 1600年 윌리엄 길버트와 그의 파트너인 애런 돌링( Aaron Dowling )과 함께 出版했다. 라틴語 로 씌여진 이 冊은 總 6卷으로 構成되어 있으며, 各 卷의 主題는 다음과 같다.

  1. 磁石에 關한 歷史的 調査 및 地球가 磁性體 라는 理論.
  2. 自己와 電氣의 差異 및 永久 機關 의 不可能性.
  3. 테렐라 模型 ( Terrella )에 關한 實驗들.
  4. 偏角(Declination) - ( 磁北極 의 位置에 關한 內容들).
  5. 伏角 과 自己 傾斜計 ( magnetic inclinometer )의 設計.
  6. 별과 地球의 運動에 對한 磁氣的 理論 및 [分店]의 位置에 關해서.

地磁氣 [ 編輯 ]

윌리엄 길버트의 테렐라 模型

길버트는 그의 大部分의 時間을 地球의 自己에 對한 硏究에 쏟아 부었다. 羅針盤이 中國에서 發明되고, 널리 普及 되면서 羅針盤의 바늘이 北極을 가리키는 理由에 對한 많은 意見이 提示되어왔다. 그 當時의 사람들의 생각에는 羅針盤이 北極을 가리키는 理由가 北極星 或은 北極 近處에 있는 매우 커다란 磁石으로 이루어진 섬으로 因해서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얘기들과 달리 윌리엄 길버트는 地球自體가 큰 磁性體라고 說明하며, 그의 생각이 담긴 地球 模型을 '작은 地球'라는 意味에서 "테렐라"( Terrella )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그의 테렐라 模型에 對한 많은 實驗들에 對해 記述해 놓았는데, 그 實驗들의 結果 '地球는 하나의 巨大한 磁石이며, 이것이 羅針盤이 恒常 北쪽을 가리키는 理由이다'라는 結論에 到達하게 된다. 이는 只今으로서도 옳은 主張이며, 그 當時로서도 只今까지의 생각들을 뒤엎는 注目할 만한 理論이었다.

天文學 [ 編輯 ]

자석들 사이에 作用하는 힘들에 關한 硏究를 하면서, 그는 달이 地球를 도는 일도 자석들 사이에서 作用하는 힘과 비슷한 理由에서 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그 때까지 받아들여지던 古代의 아리스토텔레스 의 宇宙 模型과 맞지 않는 立場이었다. 길버트의 생각을 알게 된 요하네스 케플러 는 길버트의 생각을 基盤으로 그의 有名한 業績인 케플러의 法則 을 만들어내게 된다.

電氣 [ 編輯 ]

길버트는 또한 《磁石에 關하여》에서 호박 에 依해 發生하는 靜電氣 에 對해 硏究하였다. 길버트는 그리스어로 호박을 뜻하는 單語인 " 그리스어 : ?λεκτρον 엘렉트론 [ * ] "에서 電氣를 " 라틴語 : electricus 엘렉트리쿠스 [ * ] "라고 이름붙였다. 이 이름은 오늘날 유럽 言語에서 그대로 쓰이고 있다.

太陽中心說 [ 編輯 ]

《磁石에 關하여》의 第3章에서 길버트는 當時 異端으로 取扱받았던 太陽中心說 을 擁護하였다. 길버트는 아리스토텔레스 와 같이 宇宙에 매우 커다란 크기의 天球가 存在하여 모든 별들이 地球를 中心으로 돈다고 하는 地球中心說 은 매우 터무니 없는 主張이며, 오히려 작은 크기의 地球가 도는 太陽中心說 이 더 理致에 맞는 說明이라고 主張하였다.

길버트가 太陽中心說 의 信奉者가 된 契機는 自身의 自己에 對한 關心이 必然的이면서도 若干 推論的으로 天上(天上)에까지 이어졌다. 그 推論은 바로 行星들이 自己에 依해 太陽을 中心으로 軌道를 維持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이러한 생각은 後에 케플러 에게 影響을 미쳤다. 케플러에게 미친 影響은 아래 를 參照.) 이러한 길버트의 獨創性은 太陽中心說 에 對한 論議에서 그 빛을 發했다. 回轉하는 地球의 흔들림이라는 觀點에서 分店의 洗車 를 얼마나 쉽게 說明할 수 있는지, 그리고 地球에 中心을 둔 修正 天球의 觀點에서 그 現象을 說明하기가 얼머나 어려운지를 强調했다. 또한 길버트는 地球에서의 별들의 거리는 서로 다르고, 여러 行星들을 거느리고 있는 太陽과 같은 天體들이 있을 수 있다고 主張하기도 했다.

實驗主義 [ 編輯 ]

《磁石에 關하여》에서 눈여겨 봐야할 것은 그가 어떠한 業績을 이루었는지 보다 그가 어떻게 그러한 現象들을 發見했냐는 것이다. 重要한 點은 그가 科學的 方法들을 實例를 들면서 다른 사람들이 實驗하기 便하게, 自身의 科學的 方法들을 敍述해 나갔다는 것이다. 自身이 한 實驗들을 대단히 具體的으로 敍述해 나갔으며, 어느 누가 보더라도 自身의 힘으로 그 實驗들은 再現할 수 있을 程度였다. 그는 그가 考案한 科學的 裝置인 베소리움( 라틴語 : vesorium )이라고 불리었던 一種의 檢電器 를 利用해서 많은 電氣에 關한 實驗들을 했는데, 이 裝置는 마치 오늘날의 風向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베소리움에 帶電된 物體를 가져갔을 때 바늘이 돌아가는 程度에 따라서 靜電氣에 關한 힘이 어떻게 作用하는지를 알아보는 實驗裝置였다. 이는 電氣에 關한 體系的인 實驗의 始初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길버트는 實驗 科學의 重要性에 對해서 强調하면서, 《磁石에 關하여》의 序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밀스런 것들의 發見에서, 그리고 숨겨진 原因들의 探究에서 더 强力한 理由들은 哲學的 思索家들의 그럴듯한 推論과 意見이 아닌 確實한 實驗과 證明된 論證에서 나온다. "

또한 길버트는 이러한 接近法의 威力을 다음과 같이 具體的으로 說明하고 있다.

"幾何學이 가장 高尙하고 가장 어려운 證明을 위해 조금 微弱하고 卽自的으로 理解된 土臺들에서 때맞춰 솟아오르자, 그로부터 創造的 精神이 蒼空위로 솟아올랐다. 우리의 自己 原理와 科學도 마찬가지 인데, 順序別로 보면, 먼저 若干 드문 事件과 關聯된 일정한 事實들을 說明해주고, 여기서부터 좀 더 例外的인 種類의 事實들로 나아가 마침내 地球에 있는 가장 祕密스럽고 內密한 것들이 드러난다.그리고 옛 사람들의 無關心으로 또는 現代人의 無關心으로 눈에 띄지 않았거나 注目받지 못했던 것이 그 原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學者들에 對한 影響 [ 編輯 ]

갈릴레이 [ 編輯 ]

《磁石에 關하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에게 많은 影響을 끼쳤다. 갈릴레이는 《磁石에 關하여》 冊에 있는 實驗들을 實際로 實行하였고, 길버트를 實驗的 科學者의 創始者라는 稱號를 使用하기도 하였다. 모틀레이 (P.Fleury Mottelay)의 變易에서는 이런 말이 써있다.

"비밀스런 것들의 發見에서, 그리고 숨겨진 原因들의 探究에서 더 强力한 理由들은 哲學的 思索家들의 그럴듯한 推論과 意見이 아닌 確實한 實驗과 證明된 論證에서 나온다."

길버트는 오로지 正確하고 反復的인 實驗을 重要視 생각했으며, 古代의 哲學的 接近法에 依存하지 않기 위해서 努力하였다. 갈릴레이는 이러한 接近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무거운 돌이 가벼운 돌보다 더 빨리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 믿게 하였다. 이러한 點에서 앞으로의 갈릴레이의 業績이 빛을 바라기 始作한 것이다.

갈릴레이가 重要하게 여기는 硏究 方法은 旣存에 哲學的 接近은 絶對 아니였다. 反復되는 實驗과 理性的인 判斷으로 論理的인 結論을 類推하는 方法을 追求하였다. 例를 들어 무거운 돌과 가벼운 돌을 떨어뜨렸을 때, 무거운 돌이 가벼운 돌보다 먼저 떨어진다는 것을 그냥 믿게 하는 것이 哲學的 接近이고, 實際로 무거운 돌과 가벼운 돌을 같은 높이에서 떨어 뜨려 먼저 떨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確認한다. 하지만, 길버트가 세운 業績이 갈릴레이에게 무슨 큰 도움을 준 것은 아니다. 團地 길버트가 實驗하는 方法, 結論은 써내려 가는 方法 바로 이러한 點에서 길버트가 이뤄낸 發見이 갈릴레이에게 核心的 寄與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磁石에 關하여》를 읽고 큰 感銘을 받고 自身의 冊에 윌리엄 길버트를 "最初의 科學者"라고 稱하기까지 하였다.

케플러 [ 編輯 ]

길버트가 重力의 根源을 自己로 보고 있던 中 가장 먼저 그와 뜻을 같이 한 卽, 重力을 自力으로 생각했던 人物이 바로 요하네스 케플러 인데, 이와 關聯해 莘川文學 을 執筆中이던 1608年 11月 10日에 네덜란드의 天文學者 파브리키우스( Johannes Fabricius , 1587~1651)에게 보낸 便紙에 다음과 같은 句節이 있다.

"地球가 回轉하고 있다면, 鉛直(鉛直)으로 던져 올린 돌이 그 사이에 地球가 回轉해버렸는데도 왜 같은 地點에 떨어지는 것일까, 이에 對한 答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無限한 自己(磁氣) 고리가 地球와 함께 回轉하기 때문이다. 이 고리에 依해 돌이 地球의 한 部分과 連結돼 있는 것이다. 그 結果 돌은 最短 距離인 鉛直으로 地球를 向해 끌려오게 되는 것이다." [2] :653

위의 便紙의 句節에서는 團地 케플러의 間接的인 길버트의 重力을 自力으로 보는 생각에 對한 間接的인 同意가 드러날 뿐, 直接的인 同意는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케플러는 著書 《擁護》에 다음과 같이 證言한다.

"英國人 윌리엄 길버트가 磁石을 硏究하면서 ...(中略)... 코페르니쿠스 를 擁護하려는 나의 論議에서 不足한 部分을 補充해주었다." [2] :653

케플러가 이 《擁護》를 執筆한 것은 1600年 10月부터 1601年 4月 사이로 推定된다. 이 時期는 바로 길버트의 《磁石에 關하여》가 英國에서 出版된 直後였다. 케플러와 길버트 사이의 學問的인 接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確實하지 않지만, 길버트에 對한 그의 反應은 대단히 迅速했던 것 같다. 太陽이 行星에 미치는 '運動領'李 存在한다고 말하면서도 具體的인 그 立證에 對해서 把握하지 못하고 있던 케플러에게, 길버트가 《磁石에 關하여》에서 다룬 論議는 바로 그가 찾고 있던 解答을 提供하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또한 케플러가 1603年 1月 12日 한 知人에게 보낸 便紙에서 케플러는 다음과 같은 內容을 적었다고 한다.

"나에게 날개가 있다면 英國으로 날아가 길버트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의 基本法則을 통해 行星의 運動을 證明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2] :654

케플러는 길버트의 磁氣學으로 太陽中心說 을 物理學的 또한 因果的인 證據로 뒷받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케플러의 特異한 自己重力論이 始作한 것이다. 勿論 티코 브라헤 의 觀測 데이터에 根據해 導出한 케플러 第 1法則과 第 2法則의 境遇엔, 發見한 結果만 가지고 이야기 하고, 길버트의 自己重力論은 無視하고 있지만, 이 둘은 케플러에게는 서로 뗄 수 없을 만큼 緊密히 連結된 것이다.

델라포르타 [ 編輯 ]

16世紀, 길버트 以外에도 磁石과 資力에 對해 폭넓게 實驗的으로 硏究한 사람이 또 있었는데, 그 人物이 바로 後期 르네상스의 잠바티스타 델라포르타( Giambattista Della Porta , 1535-1615 推定)였다. 이탈리아 나폴리 의 貴族 家門에서 태어난 델라포르타는 프톨레마이오스 의 《 알마게스트 를 라틴語로 飜譯하고, 1593年에는 《굴절광學에 對하여》 De Refractione Optics 를 썼으며 劇作家로서도 33篇의 喜劇 및 悲劇을 남겼다.

하지만 이런 業績들 中에서도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델라포르타의 主要 著書인 《自然魔術》이다.총 20卷으로 이루어져 있는 自然魔術의 增補改訂版은 1589年 出版되었으며 라틴語, 이탈리아語, 프랑스語 等 各國의 言語로 飜譯되어 16~17 世紀 사이 유럽全域에 걸쳐 많이 읽히게 된 冊이다.'자연마술'이라는 冊의 題目과 달리, 이 冊은 全體的으로 比較的(秘敎的)인 魔術의 主要 事項만을 論한 冊이 아니다. 그렇다고 本格的인 自然學 冊이라고 할 수도 없고, 오히려 플리니우스 의 [博物誌]에 가까운 冊이다. 多樣하고 稀貴한 이야기나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採錄해 無秩序하게 羅列한 것이다. 20卷의 冊들 中 길버트와 關聯해서 보아야 할 것은 自然魔術 第 7卷 '磁石의 不可思議함에 對하여'( De miraculis magnetis ) 라는 票제대로 磁石과 資力에 對한 冊이다. 그는 이 冊에서 철에 對한 磁石의 人力뿐만 아니라 磁化 能力도 遠隔作用에 있다는 것을 暗示하고, 그 힘이 거리와 함께 減少한다는 事實을 指摘했다. 이처럼 르네상스의 魔術 思想은 델라포르타에 依해 近代 自然科學을 向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時期的으로 윌리엄 길버트의 《磁石에 關하여》보다 델라 포르타의 《自然魔術》이 더 앞섰음에도 不拘하고, 自己와 磁石에 關한 業績 속에서 델라 포르타는 잊혀진 反面 윌리엄 길버트는 많은 名聲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이는 델라 포르타의 業績이 過小評價된면이 存在한다. 例를 들어, 現代의 많은 歷史가 들이 磁石에 熱을 加하면 自力이 喪失된다는 事實을 發見한 功勞를 길버트에게 돌리고 있지만, 델라 포르타 또한 그와 같은 實驗을 했었다. 그는 熱이 나는 磁石을 '鐵의 오일' 卽 '火星의 크로커스(Crocus Martis)'에 담그면 自力이 强化된다는 爬羅켈수스 의 主張이 잘못된 것일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依해 自力이 破壞된다는 것을 實驗的으로 最初로 證明해 보였다. 이 外에도 많은 磁石과 磁力에 關한 實驗들을 行하였지만, 르네상스 의 魔術 思想을 가지고 있었다는 理由로 그것들 또한 大部分 功勞가 길버트 或은 다른 科學者들에게 돌아갔다.

길버트는 델라포르타의 磁石 硏究를 다음과 같이 評했다.

아주 最近 決코 凡俗하지 않은 哲學者 델라포르타가 《自然魔術》 第7卷에 磁石에 對한 奇異한 現象을 모두 모아놓았다. 하지만 그는 磁石의 運動에 對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고 그와 같은 것을 본 적도 없었다. 베니스의 聖職者인 베드로 使徒에게서 배웠거나 自己 自身의 觀察을 土臺로 쓴 磁石의 힘에 對한 글들은, 몇몇을 除外하면 그다지 正確하지도 注意 깊지도 않다. 이 冊은 잘못된 實驗 투성이이다. 그러나 내가 그를 評價하는 것은 그토록 대단한 主題를 直接 다루려고 했다는 것이며, 더욱 詳細히 調査해볼 만한 契機를 마련했다는 點이다.

이처럼 길버트는 델라포르타의 《自然魔術》을 過小評價했다. 하지만, 길버트의 冊에서 델라포르타는 아리스토텔레스 다음으로 많이 登場하는 이름이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델라포르타가 길버트를 包含한 磁石과 磁氣에 關한 科學의 發展에 寄與했다는 것은 分明한 事實이다.

비르켈란과 地磁氣 模型의 發展 [ 編輯 ]

노르웨이 科學者 크리스티안 비르켈란

길버트 事後 約 300年 뒤, 노르웨이 의 科學者인 크리스티안 비르켈란 ( 노르웨이語 : Kristian Birkeland )은 테렐라 模型을 더 發展시켰다. 크리스티안 비르켈란( 노르웨이語 : Kristian Birkeland )은 1895年 頃에 오로라 를 說明하려 하였다. 그는 이 現象을 說明하기 위해서, 테렐라 模型을 더욱 발전시키게 되는데, 그의 模型을 시뮬레이션 하기 위해서 求刑 磁石을 使用한다. 그는 오로라가 생기는 理由가 地球의 磁氣場과 相互 作用하는 粒子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縮小한 模型을 통해 實驗으로 옮기게 된다. 眞空탱크 속에 求刑 磁石을 넣어놓고, 그 求刑 磁石에 陰極線을 쏘았을 때 테렐라의 極 周圍에서 오로라처럼 불빛이 반짝이는 現象을 觀測하게 된다. 그리고 여러 가지 要因들(탱크 속의 殘留 가스, 粒子들의 經路)을 考慮하여 그 現象을 仔細히 分析한다. 하지만 왜 實際 오로라가 北極 가까운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오로라 에 關한 그의 理論을 테렐라 模型을 통해 實驗하는 비르켈란

테렐라는 地球의 磁氣圈 에 該當한다. 비르켈란은 求刑 磁石에 쏜 陰極線 에 該當하는 것이 太陽에서 오는 電子라고 생각했고, 이는 太陽의 黑點 의 活動과 關聯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以後에도 테렐라 模型에 關한 많은 實驗들이 많은 科學者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위와같이 求刑 磁石을 利用한 實驗으로는 實際 地球에 作用하는 여러 가지 變數들을 實際 單位와 똑같이 再現하고 制御하기 어렵기 때문에, 요즘에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實驗을 한다.

各州 [ 編輯 ]

  1. 존 그리빈,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科學》, 들녘, 2004年
  2. 야마모토 요시타카, 《科學의 誕生》, 東아시아, 2005年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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