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화
(安鍾和,
日本式 이름:
安田辰雄,
야스다 다츠오
,
1902年
1月 21日
出生 ~
1966年
8月 21日
[1]
死亡)는
日帝强占期
부터 活動한 大韓民國의
俳優
兼
映畫 監督
,
演劇
演出家
出身이다. 本名은
안용희
(安龍熙)이다.
主要 代表 經歷
[
編輯
]
生涯
[
編輯
]
漢城府
에서 名門家의 後孫으로 태어났다. 家庭에서 아버지에게서 漢學을 배우다가 新敎育을 받기 始作하면서 文藝 方面에서 素質을 드러냈다.
1922年
日本
도쿄
에 滯留 中이던 朝鮮人 留學生들이
咸鏡南道
함흥부
에서 創立한 演劇團體
藝林回
(藝林會)에서 文藝部長을 맡아 公演藝術界에 모습을 드러냈다.
[2]
이때 안종화는 아들이 藝術 分野에서 일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아버지의 눈을 避해 몰래 咸興으로 간 것이었다.
藝林回가 解體된 뒤
釜山
에 暫時 내려가
舞臺藝術硏究會
에서 參加했다가 이 團體가 日本人이 세운 映畫社인
朝鮮키네마株式會社
로 吸收되면서 映畫界로 活動 舞臺를 옮겼다.
[3]
1925年
濟州道
에서 撮影된 《해의 祕曲》에 아버지와 아들의 1人 2役으로 出演하는 等 1920年代 中盤부터 映畫 俳優로 活潑한 活動을 했다.
1927年
朝鮮프롤레타리아藝術家同盟
의 産婆 役割을 한
朝鮮映畫藝術協會
에 加擔했고,
1928年
最初의 카프 映畫인 《流浪》을 製作했다.
1930年代
에는 活潑한 映畫 演出 作業으로 《꽃장사》, 《노래하는 時節》, 《靑春의 十字로》, 《銀河에 흐르는 情熱》, 《逆襲》, 《人生航路》 等을 내놓아, 韓國 映畫의 萌芽期人 이 時期에 主導的인 役割을 한 映畫人이었다. 2008年 基準으로 大韓民國 國內에 現存하는 劇映畫 中 가장 오래된 作品도 안종화의 《
靑春의 十字로
》이다.
[4]
新派劇
情緖에서 벗어난 新劇의 普及에 努力했다.
日帝强占期
末期에 御用 團體인
朝鮮映畫協團
을 組織하고
內鮮一體
를 標榜하는
朝鮮映畫人協會
의 任員을 지내 親日 映畫 製作에 督勵했다. 《
每日申報
》에 〈新體制에 順應하는 朝鮮映畫의 將來〉, 〈轉換刷新의 詩 映畫의 國家使命〉과 같은 親日 論說을 싣기도 했다. 特히 朝鮮映畫人協會가 檢閱을 擔當하고 親日 活動을 實務的으로 專擔할 수 있도록 傘下 組織으로 設置한 映畫人機能審査委員會에서도 中心的인 役割을 하였다.
本業인 映畫 外에도 親日 團體인
黃道學會
와
조선임전보국단
의 發起人을 歷任하여, 映畫界에서는 親日 行跡이 가장 뚜렷한 便에 屬한다. 이때문에 後에 親日 行跡에 對한 意見이 紛紛했고,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發表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演劇/映畫 部門,
2009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도 包含되었다.
光復 後에는
1945年
末 結成된
朝鮮映畫同盟
中央執行委員長을 맡았다가
[5]
, 映畫同盟의 主導權을
左翼
系列 映畫人들이 잡게 되면서 離脫한 映畫人들의 모임
映畫監督俱樂部
에 參加
[6]
하는 等
右翼
系列에서 活動했다.
韓國映畫人協會
의 前身인 大韓映畫協議會가 組織될 때도 이를 主導했다. 以後
徐羅伐藝術大學
學長을 지냈고
대한민국예술원
會員이 되었으며
文化勳章
도 授與받았다.
1930年
《꽃장사》와 《노래하는 時節》을 演出해 監督으로 데뷔한 以來 光復 後에는 《思悼世子》 (1956), 《千秋의 恨》 (1956), 《春香傳》 (1958) 等 史劇 및 時代劇을 主로 만들었다. 안종화의 助監督으로 演出 授業을 받은 弟子 中에는
李萬熙
가 있다.
[7]
著書로 草創期 演劇界를 다룬 回顧錄 《新劇史 이야기》(1955)가 있다.
各州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 강옥희; 이영미; 이순진; 李承姬 (2006年 12月 15日). 《植民地時代 大衆藝術人 事前》. 서울: 소도. 201~203쪽.
ISBN
9788990626264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