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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카하라 보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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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카하라 보쿠덴 ( 日本語 : 塚原卜?, つかはら ぼくでん )은 日本 센고쿠 時代 의 檢事(?士)이자 兵法家이다. 祖上 代代로 내려오던 가시마 高類(鹿島古流, 가시마 中古類(鹿島中古流)에 더해 덴신쇼덴카토리신토류(天?正?香取神道流)를 修鍊하여 가시마 新土類(鹿島新?流)라는 劍術 流派 를 열었다.

生涯 [ 編輯 ]

가시마 神宮(鹿島神宮)의 神官(神官)으로 다이조 氏(大?氏)의 一族인 가시마 氏(鹿島氏)의 4家로(四家老)의 한 名이었던 우라베 아키카打(卜部?賢, 요시카와 아키카打 吉川?賢)의 둘째 아들로 히타치國 가시마(鹿島) [1] 에서 태어났다. [2] 어렸을 때의 이름은 도모타카(朝孝)였다. [2] 時期는 確實하지 않으나 아버지의 劍道를 배우던 劍道 圖章 親舊였던 쓰카하라 야스모토(塚原安幹, 쓰카하라 申告에몬 야스모토塚原新右衛門安幹)의 養子가 되어 이름을 다카모토(高幹)라 하고, 申告에몬 다카모토(新右衛門高幹)라 고쳤다. [2] 쓰카하라 氏는 헤이시 (平氏)를 혼세(本姓)로 하고 가시마 氏의 分家이다. 後날 道士老카미(土佐守) 또는 道士老뉴도(土佐入道)라고도 稱하였다. [2] 보쿠덴은 그의 號(?)이며 本家인 요시카와 집안의 魂歲인 우라베(卜部)에서 由來한 것이다. [2]

親아버지 아키카타로부터 가시마 高類(古流)((가시마 中古類(中古流))를 배운 그는 養아버지 야스모토로부터 또한 덴진쇼텐카토리신토류(天?正?香取神道流)를 배웠다. [2] 『간토 8週 苦戰錄』(?東八州古??)이나 『보쿠덴 油田서』(卜?流?書)에 따르면 마쓰모토 마사노부(松本政信)의 吳의(?義) 「히토쓰老타치」(一之太刀)도 養아버지 야스모토로부터 傳受받았다고 한다(마쓰모토로부터 直接 배웠다는 說, 보쿠덴 自身이 獨自的으로 開發하였다는 說 [2] 도 있다). 나아가 無事 遂行을 위한 旅行에 나서서 自身의 劍術을 갈고 닦았다. 보쿠덴의 弟子인 가토 노부토視(加藤信俊)의 孫子가 쓴 『보쿠덴 遺訓初』(卜?遺訓抄) [3] 의 後序(後書)에 따르면 그 戰績은 「17歲가 되어 洛陽(洛陽, 교토)의 기요미즈데라 에서 眞劍 勝負에 臨하여 勝利를 얻고부터 오기칠度(五畿七道)를 遍歷하였다. 眞劍의 勝負가 열아홉 番, 戰場을 누빈 것이 서른일곱 番, 한 番도 不察(失手)이 있었던 적이 없으며, 목도 等으로 하는 試合은 통틀어 數百 番에 達하도록 베이거나 찔리거나 한 적이 한 番도 없었다. 화살에 맞은 여섯 곳 말고는 한 番도 敵의 武器에 맞지 않았다. 무릇 試合과 戰場(戰場) 等等 두루 立會한 곳에서 敵을 친 것이 헤아려 212名이었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보쿠덴의 眞劍勝負로는 가와고에性 아래에서의 가지와라 나가토(梶原長門)와의 對決이 있다. 보쿠덴은 日本 여러 地域을 돌면서 無事 修行을 하였으나, 그 行列에는 80名에 達하는 文人들을 거느리고 큰 매 세 마리를 데리고 갈아탈 말을 세 匹이나 두고 있는 豪放하고 壯大한 行列이었다고 傳해지고 있다. [2]

弟子로는 唯一하게 上典(相?) 卽 스승과 弟子 사이에 서로 直接 傳授가 確認된 우지이 쇼켄(雲林院松軒, 야시로 미쓰히데?四?光秀)과 모로오카 이치하(諸岡一羽) [2] 나 마카베 우지모토(?壁氏幹, 도무道無) [2] , 사이토 덴키步(?藤?鬼房, 가쓰히데勝秀) [2] 等 하나의 門派를 이룬 劍豪(?豪)들이 있었다. 또한 쇼군이기도 했던 아시카가 요시테루 [2] , 아시카가 요시아키 [2] 이세국 의 高쿠시(?司)였던 기타바타케 度모노리 (北?具?) [2] , 다케다(武田) 집안의 軍事(軍師)로 有名한 야마모토 間스케 [2] 도 보쿠덴으로부터 劍術을 배웠다고 傳해진다. 또한 아시카가 요시테루, 기타바타케 度모노리 두 사람에게는 보쿠덴 自身이 吳의 「히토쓰老타치」를 傳授하였다고도 한다.

앞에서 言及한 바와 같이 「몇 番에 걸친 眞劍勝負에서 칼에 依한 單 한 番의 傷處도 입은 적이 없었다」는 傳說로 後世에 그는 黔省(?聖)이라는 推仰을 받았고, 講談(講談)의 素材로써 널리 알려지게 된다. 有名한 逸話로 『 고요群칸 』(甲陽軍鑑)에 실린 「無水勝類」(無手勝流)가 있는데, 보쿠덴은 憊臥湖 의 배 위에서 젊은 劍客들에게 是非가 걸리게 되었다. 相對가 그 보쿠덴이라는 것을 알게 된 劍客들이 決鬪를 申請해왔고, 보쿠덴은 되도록 勝負를 避해보려 했지만 血氣旺盛한 劍客들은 보쿠덴이 怯이 나서 決鬪를 避해 도망치려는 줄로 생각했고 氣가 살아서 더욱 그를 罵倒해댔다. 周邊에 民弊가 될 것이라 생각한 보쿠덴은 배에서 내려서 決鬪를 받아주겠다고 말했고 그 劍客과 둘이서 작은 배로 옮겨 탔다. 그대로 보쿠덴은 近處의 작은 섬으로 배를 띄워 갔고, 섬 가까이 水深이 발길 높이 程度로 닿을 때까지 왔을 때 그 劍客은 얼른 뛰어내려 서둘러 勝負를 보려 했다. 그러나 보쿠덴은 그대로 泰然하게 櫓를 저어서 섬에서 멀리 떨어져 가버렸다. 猝地에 작은 섬에 홀로 남게 된 劍客이 멀리 떠나가는 보쿠덴을 보며 辱했을 때, 보쿠덴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4] , 이것이 無水勝類(無手勝流)니라」라며 크게 웃고 떠나가버렸다고 한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칼을 받아내는 쓰카하라 보쿠덴. 메이지 時代의 쓰키오카 쓰난의 作品이다.

젊은 時節의 미야모토 무사시 가 보쿠덴이 食事하는 途中에 와서 挑戰하면서 그에게 칼을 내리치자 보쿠덴은 곧장 이로리(??裏)에 놓여 있던 냄비 뚜껑을 들어 무사시가 휘두른 칼을 막아냈다는 逸話가 있는데, 實際로는 무사시가 태어나기도 前에 보쿠덴은 死亡했기 때문에 보쿠덴과 무사시는 直接 대면할 機會도 없었고, 따라서 이 逸話는 純全히 지어낸 이야기이다.

晩年에는 故鄕에서 餘生을 보냈는데 『가시마社』(鹿島史)에 따르면 보쿠덴은 겐키 (元?) 2年( 1571年 ) 2月 11日에 死亡하였다고 傳한다. 83歲였다. 『덴新쇼텐新土類 兵法傳錄』(天?正?新?流兵法??)에는 가시마의 누마誤 香(沼尾?) 多盧(田野) [5] 에 있는 마쓰오카 노리카打(松岡則方)의 집에서 死亡하였다고 한다. 보쿠덴의 墓는 도요사토 寸(豊?村) 스가즈카하라(須賀塚原, 스가 寸須賀村, 只今의 日本 가시마 時 스가)의 梅香社(梅香寺)에 있었으나 이곳은 火災로 消失되어 墓所만이 남아 있다. [2] 法號(法?)는 호켄코친 擧事(??高珍居士)였다. [2] 位牌는 墓 가까운 곳에 있는 眞言宗(?言宗) 寺刹인 장길사(長吉寺)에 있다. [2]

各州 [ 編輯 ]

  1. 只今의 日本 가시마視 미야나카(宮中)이다.
  2. 保立謙三『茨城?大百科事典』茨城新聞社編、茨城新聞社、1981年、706-707頁。「塚原卜?」
  3. 보쿠덴 自身이 읊었다고 傳하는 「보쿠덴 白手」(卜?百首) 外에 다쿠안 소호 가 쓴 序文, 가토 노부토市의 孫子(本名은 알려져 있지 않다)가 쓴 後서로 構成된 前서로 正確한 成立 年代는 알 수 없으나 에도 時代인 間에이 前後로 推測하고 있다.
  4. 『孫子兵法』毛孔篇(謀攻篇)第3에는 "무릇 傭兵(用兵)하는 法이란 敵國을 穩全하게 保全하면서 이기는 것이 上等이요, 敵國을 부수어서 얻는 것은 그 何等이다"라고 하였다.
  5. 只今의 日本 가시마 時 누마誤(沼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