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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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진구 大韓民國 勞動運動家 다.

1980年 2月 高等學校를 卒業하고 1984年 1月 軍隊를 除隊한 뒤 獨學으로 헤겔 마르크스 를 工夫했다. 高卒이었지만 大學生들과 討論을 할 수 있을 程度로 知識이 깊었다. 1985年 歐露工團 三立食品 工場에 就職하고 박영진 等과 함께 ‘九老독산地域 先進的 勞動者會’라는 모임을 꾸렸고 勞動 運動의 經驗 活動 等을 整理해 〈韓國社會 先進勞動者의 任務〉 라는 文件을 著述했다.

1985年 11月부터 當時 서울大學校 法大生이었던 金榮煥 과 함께 自炊했다. 김영환은 1986年 2月 移徙를 가면서 〈韓國社會 先進勞動者의 任務〉를 훔쳐갔고, 이것을 自身의 著書인 《 鋼鐵書信 》의 一部로 收錄했다. 自身의 글이 盜用당한 것을 안 심진구는 金榮煥에게 抗議했지만 이미 《鋼鐵書信》은 運動圈들 사이에 널리 流布된 뒤였다.

1986年 11月 結婚을 했고,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2月 10日, 먼저 잡혀간 김영환이 이름을 불면서 김영환의 윗線으로 指目되어 始興洞 大路邊에서 國家安全企劃部 要員들에게 逮捕, 南山分室로 連行되었다. 南山에서 정형근 에게 37日間 拷問을 當하고 虛僞自白을 하여 1987年 1月 15日 서울地方檢察廳 에 送致,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로 起訴되었다. 裁判 進行 中에 박종철 拷問致死 事件 이 일어나자 政權의 宣傳 道具로 이용당하기도 했다. 同年 4月 20日 懲役 2年, 資格停止 2年, 執行猶豫 4年을 宣告받고 抗訴를 抛棄하여 兄이 確定되었다.

2010年 眞實·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에 眞實糾明을 申請했고 眞實委에서 再審事由에 該當한다는 決定을 내리자 再審을 申請했다. 2012年 再審에서 無罪를 宣告받고 自身은 轉向한 적이 없으며 勞動運動에 參與했던 것을 後悔하지 않으나, 金榮煥을 만났던 것은 後悔한다는 所感을 밝혔다. 김영환은 自身은 심진구의 許諾을 받고 〈韓國社會 先進勞動者의 任務〉를 《鋼鐵書信》에 收錄했다고 主張했지만 심진구는 죽을 때까지 그 主張을 認定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