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손준(孫峻)
|
時代
|
三國 時代
|
生沒
|
建安
24年(
219年
) ~
太平
元年(
256年
)
|
者
|
自願(子遠)
|
本館 · 出身
|
洋酒 五軍 부춘縣
|
官職
|
武威徒尉(武衛都尉)〔孫權〕
→ 市中(侍中)〔孫權〕
→ 市中(侍中)
· 영(領) 武威將軍(武威將軍) · 宿衛(宿衛)〔孫權〕
→ 丞相(丞相) · 大將軍(大將軍)
· 毒重外製軍事(督中外諸軍事) · 佳節(加節)〔손량〕
|
作爲
|
度向後(都鄕侯)〔孫權〕
→ 不春煦(富春侯)〔손량〕
|
所屬
|
孫權
→
손량
|
손준
(孫峻,
219年
~
256年
)은
中國
三國時代
오
의 官僚이며 皇族이다. 者는
自願
(子遠). 丞相을 歷任하고 부춘後(富春侯)에 封해졌었다.
손정
의 曾孫이며, 吳의 第2代 皇帝 廢帝
손량
의 攝政이다.
生涯
[
編輯
]
諸葛角 政權의 一角이 되어
[
編輯
]
어려서 弓馬에 뛰어났고, 銳利하고 勇敢하며 果斷性이 있었다.
孫權
末年에 武威徒尉로 옮겼고, 侍中이 되었다.
大帝 卷
은 죽을 때,
諸葛角
을 太子太傅·大將軍에 임명하여 어린
廢帝·嗅官後 量
(大帝가 죽을 때 나이가 10歲)을 補佐하게 했다. 또 中書令 손홍(孫弘)李 太子少傅를 兼任하고, 會計태수
等尹
은 태床이 되었다. 大帝는 이 사람들과 將軍 여거, 그리고 市中 손준을 불러 뒷일을 付託했다. 손준은 政治를 補佐하라는 大帝의 遺詔를 받아 武威將軍을 兼任하고 宿衛가 되었고, 度向後에 封해졌다.
《三國志》에 主席으로 引用된 《五署》에 따르면, 손준이 票를 올려
諸葛角
이 큰 일을 맡을 수 있다고 했으며, 大帝는
諸葛角
이 獨斷的인 것을 꺼렸으나
諸葛角
만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結局은
諸葛角
에게 大任을 맡겼다고 한다. 大帝가 죽은 後, 太子少傅 손홍이
諸葛角
과 和合하지 못했으므로 皇帝의 죽음을 숨기고
諸葛角
을 除去하려 했는데, 손준은 이 일을
諸葛角
에게 알려
諸葛角
의 목숨을 救했다.
執權
[
編輯
]
諸葛角
銀 위 征伐에 失敗하고, 돌아와서는 管理를 많이 바꾸고 사람들을 꾸짖었으며, 宿衛를 바꾸어 自身과 가까운 사람을 任用하였다. 또 淸州와 序奏로 向하려 했다. 이로써
諸葛角
은 民心을 잃고 怨望을 샀다. 손준은 이를 틈타 政變을 꾀해, 廢帝 量과 相議하여 酒宴을 열고
諸葛角
을 불러들여, 不吉한 豫感을 느끼고 여러 次例 疑心하는
諸葛角
을 안심시켜, 內戰으로 들어오자 칼로 찔러 죽였다. 또
諸葛角
의 둘째 아들 諸葛송(諸葛?)과 셋째 아들 諸葛巾(諸葛建)李 逃亡하자, 基督 儒僧(劉承)을 派遣하여 諸葛송을 斬首하고
諸葛角
의 三族을 滅했다.
建興
2年(
253年
) 10月의 일이었다.
諸葛角
을 除去한 손준은 丞相·大將軍으로 昇進하였으며, 中央과 外方의 모든 軍士를 監督하고, 佳節을 받았다. 이로써 손준은 吳의 執權者가 되었다. 執權한 後 손준은 등尹과 속으로는 맞지 않았으나, 겉으로는 서로 包容했다. 日前에 손준이
諸葛角
을 誅殺하려고 廢帝 孃과 함께 酒宴을 열어 招待했을 때, 등尹은 宮闕에 들어가려다가 나오는
諸葛角
을 만나 손준의 陰謀는 까맣게 모르고 다만 禮法에 따라 皇帝를 뵙도록 勸誘하여, 結果的으로 손준의 쿠데타가 成功하는 데 寄與했다.
治世
[
編輯
]
第1次 손준 주살 計劃
[
編輯
]
諸葛角
은 自身의 姻戚인
肺太子 禍
를 各別히 여겼으므로, 民間에서는
諸葛角
이
손화
를 迎接하려 한다는 말이 있었다. 손준은
諸葛角
을 誅殺한 後 肺太子 和議 引受를 빼앗고 結局 죽였다. 사람들은 나라를 들 程度로 슬퍼했다. 손준은 重厚한 名聲이 없었고, 교만하고 陰險하며, 刑罰로 죽인 者가 많았으므로 百姓들의 怨望을 받았다. 또 宮中의 사람들과 姦淫하여, 公州 路盤(大帝의 딸로 朱脣,
電鐘
의 否認)과 私通하기까지 했다.
오봉
元年(
254年
) 여름에 洪水가 發生했다. 가을에는 午後
손영
(大帝의 孫子며 太子 等의 獅子)李 손준을 誅殺하려 하였으나, 일이 發覺되어
손영
은 自殺했다. 다만, 三國志 註釋에 보면, 오력에서는 이 일을 달리 敍述하고 있으니, 손준이
손화
를 무고히 죽여 사람들이 激忿하고 歎息하였는데, 戰士마
환려
가 이를 利用하여 長壽와 管理를 모으고 함께 손준을 죽이고
손영
을 세우려 했는데,
손영
은 이를 알지도 못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손준은 첫 危機는 넘겨내었다.
毌丘儉·門欠의 난
[
編輯
]
오봉 2年(
255年
) 봄 正月,
位
에서 私馬氏 政權에 對抗하여
毌丘儉
(?丘儉)과
門欠
(文欽)李 擧兵하여 위의 中央軍과 樂歌에서 싸웠다. 손준은 이 騷亂을 듣고, 閏달 正月 9日 表記將軍
여거
, 左將軍
유찬
과 함께 壽春을 치고자 軍士를 일으켰다. 19日, 吳君이 託孤에 이르렀을 때, 이미 陳
門欠
과 그 盞當 數萬 名은 손준에게 投降했다. 손준은 餘勢를 몰아 壽春城을 攻擊하려 했으나, 이미 위의 振動大將軍
第褐炭
이 壽春城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軍士를 물렸다. 그러나
第褐炭
銀 將帥
長班
으로 하여금 吳君을 追擊하게 했고, 2月, 吳君은 고파에서
長班
에게 敗北하여
유찬
,
손陵
, 長水 等의 將帥를 잃었다. 3月, 손준은
주이
로 하여금 安風을 치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結局 손준은
毌丘儉
의 亂을 틈탄 北伐에서 敗北하고 말았으며, 다만
門欠
과 그 殘黨을 얻었다.
第2次 손준 주살 計劃
[
編輯
]
이 해 가을 7月,
蜀漢
에서 使者를 보냈다. 손준의 堂叔이며
손校
(孫皎)의 아들로, 將軍·侯爵·無難毒인 손의(孫儀)가, 腸이(張怡), 임순(林恂)-或 孫昭(孫邵), 임순(?恂)-과 共謀하여, 死者와 會見하는 틈을 타 손준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일이 綻露나 손의 等은 自殺했고, 數十 名이 죽었다. 전공주(
손路盤
)이 아우 州公主(努肉)李 손義와 公募한다고 상주했으므로, 손준은 努肉마저 陋名을 씌워 죽였다.
광릉 築城
[
編輯
]
손준은 光陵에 城을 쌓고자 하여, 위위
風潮
(馮朝)로 하여금 城을 쌓게 하고, 將軍
오양
(吳穰)을 광릉太守로,
有略
(留略)을 東海太守로 임명했다. 調整 臣僚들은 그 곳에 城을 쌓는 것이 不可한 것을 알았지만, 손준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말하지 못했고, 오직 등윤만이 諫하여 그치게 하려 했지만, 손준은 듣지 않았다. 이 해 큰 가뭄이 들었으며, 結局 築城은 失敗로 돌아갔다.
2次 北伐 計劃, 死亡
[
編輯
]
이듬해, 곧
太平
元年(
256年
), 손준은 前에 위에서 投降해 온 正北大將軍
門欠
의 計策을 받아들여 慰勞 出征하기로 했다. 8月, 먼저
門欠
,
여거
, 거기將軍
유찬
(劉纂), 振男將軍
주이
(朱異), 前將軍
當者
(唐咨)의 軍事로 强度에서 回收·射手로 들어가 淸酒와 序奏를 取할 計劃을 세우게 했다. 等尹과 함께 石頭에서 軍士를 餞別한 後, 種子 1百을 거느리고
여거
의 軍營에 들어갔다.
여거
가 軍士를 整頓하였고, 손준은 이를 싫어하여 가슴이 아프다 稱頉하고 떠났다. 마침내,
諸葛角
에게 攻擊받는 꿈을 꾸고 두려워하다 病이 나 죽었다. 이때 38歲였다. 遺言으로 後事는 從弟
손鍼
(孫?)에게 맡겼다.
손鍼
이
經濟
에게 주살당한 後, 經濟는 손준의 棺을 꺼내 引受를 빼앗고, 손준과
손鍼
의 이름을 宗室에서 削除하고, 고준(故峻), 고침(故?)이라 불렀다.
人物評
[
編輯
]
진수
(陳壽)는 제葛藤이손복量田 末尾에서, “손준,
손鍼
은 凶惡한 行實이 가득하여 本來 論할 價値도 없는 者”라고 評했다.
親族 關係
[
編輯
]
- 손종
(高祖父)
- 孫堅
(從曾祖父)
- 손정
(曾祖父)
- 손高(祖父)
- 손유
(從祖父)
- 손校
(從祖父)
- 손환
(從祖父)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 진수,《三國志》權48 五署 3 三四主戰
- 진수,《三國志》權50 五署 5 妃嬪展
- 진수,《三國志》權59 五署 14 誤주오自轉
- 진수,《三國志》權64 五署 19 제葛藤이손복量田
|
---|
太傅
| |
---|
丞相
| |
---|
大司馬
| |
---|
大將軍
| |
---|
太尉
| |
---|
사도
| |
---|
沙工
| |
---|
太上
| |
---|
上將軍
| |
---|
- ↑
《진고》(眞誥) 卷20에 主席으로 引用된 《虛葬사세보》(許長史世譜)에 記錄이 있으나, 在任 時期는 알 수 없다.
年
과 同一人物로 보는 見解도 있다.
- ↑
《
水西
》(隨書) 警적지(經籍志)에 記錄이 있으나, 在任 時期는 알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