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世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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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世雄(薛世雄)
出生 555年
河東郡 分음현(只今의 산시省 완룽현 )
死亡 617年 (63歲)
濁軍
死因 分社(憤死)
性別 男性
國籍 北周 隋나라
別稱 者(字)는 세영(世英)
經歷 禹親衛거機張郡 → 偶感文郞腸 → 右翊衛將軍 → 虞侯위將軍 → 東北都大師 兼 年郡太守 → 坐魚偉大將軍 兼 濁軍有數
職業 將軍
關聯 活動 (主要 參戰) 麗水戰爭 , 하간 戰鬪
稱號 儀同三司, 正議大夫( 勳官 散官 )
敵手 두건덕
子女 설滿熟, 褻慢菌, 설만철, 褻慢非

설世雄 (薛世雄, 555年 ~ 617年 )은 隋나라 將軍 이다. 는 세영(世英)이며, 河東郡 分음현(汾陰縣) 사람 이다. 北齊 , 吐谷渾 , 西域 , 高句麗 , 突厥 等 여러 戰鬪 에서 功을 세웠다. 第2次 麗水戰爭 에서는 撒水 에서 慘敗하여 包圍 當했지만 奮戰하여 빠져나왔다. 隋나라 말 各地에서 叛亂 이 터지자 鎭壓하려 했으나 두건덕 에게 慘敗하고 焚死하였다.

生涯 [ 編輯 ]

어린 時節과 異民族 [ 編輯 ]

어렸을 때부터 戰爭 놀이 를 하며 指揮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 形勢가 井然했다. 北周 無題 北齊 를 平定할 때 從軍하여 그 功으로 17살의 나이 에 首都毒(帥都督)李 되었다. 隋나라 建國 後로도 數 次例 專攻을 세워 儀同三司(儀同三司) 禹親衛거기將軍(右親衛車騎將軍)에 올랐고, 煬帝 가 卽位하자 偶感文郞場(右監門郞將)으로 옮겼다. 吐谷渾 (토곡혼) 征伐에도 參加하여 桶의 代父 (通議大夫)까지 받았다.

608年 ( 大業 4年) [1] 옥문도行軍大將(玉門道―)으로서 突厥 界民家한 (啓民可汗)과 함께 西域 의 이오(伊吾, 只今의 腎臟위구르 自治區 하미 時 )를 合攻하기로 했다. 그런데 界民家限이 約束 날짜 에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홀로 沙漠 을 건너니, 隋나라軍이 오지 못할 것이라 여겨 放心하고 있던 이오의 降伏 을 받아낼 수 있었다. 한나라 때의 옛 이오성 東쪽에 새로운 이오城을 쌓아 銀靑光祿大夫(銀靑光祿大夫) 王位(王威)를 남겨 두고 돌아왔다. 皇帝 가 기뻐하여 正議大夫(正議―)로 승진시키고 賞을 내렸다.

麗水戰爭 [ 編輯 ]

612年 第2次 麗水戰爭 에서는 24個의 郡 中 座(左) 第11軍 [2] 沃沮度(沃沮道)君을 맡았다. 別動隊로도 뽑혀 宇文述 , 于仲文 等과 함께 平壤 까지 갔다가 撤收하던 中 을지문덕 에게 撒水(只今의 淸川江 )에서 大敗하 였다. 白石山(白石山)에 이르렀을 때 高句麗 君에게 包圍 當해 赦免에서 화살 처럼 쏟아졌다. 一旦 파리한 兵士들로는 防塵(方陣)을 짜고 起兵 200名과 함께 突破를 試圖했다. 이 過程에서 설世雄은 甲옷이 너무 무거워서 칼을 빨리 휘두를 수 없다면서 甲옷을 벗었다. 이에 高句麗軍이 漸次 물러나자 兵士를 한꺼번에 풀어 물리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잃은 것이 많았다. 유사룡 斬首刑 에 處해지고 다른 장수들은 作爲 가 剝奪되고 庶民으로 降等되었으나 [3] 설世雄은 이 行跡 德分에 綿織으로 그쳤다.

613年 第3次 麗水戰爭 에 參戰하여 虞侯위將軍(右候衛―)을 받고 答돈도(?頓道)군으로서 誤骨聲 (烏骨城)으로 向했으나 양현감 의 亂이 터져 撤收하라는 命을 받았다. 煬帝가 儒城 에 이르러 설世雄을 東北都大師(東北道大使) 兼 煙軍 태수 (燕郡―)로 임명해 그 地域을 慰勞하게 하였다. 이때 突厥의 掠奪 이 極盛이었으므로 軍隊를 모아 邊方을 돌아보았다. 614年 第4次 麗水戰爭 에도 坐魚偉大將軍(左禦衛―)李 되어 從軍하였고 濁軍 有數(―留守)를 겸하였다.

하간 戰鬪 [ 編輯 ]

와강군 (瓦崗軍) [4] 이 蜂起하여 洛陽 이 威脅받고 中院 이 混沌에 빠지자 617年 7月(陰曆) 그 討伐을 위해 30,000名을 이끌고 南下하다가 하간 軍(河間郡) 칠리情(七里井)에서 [5] 두건덕 을 만나 陣을 쳤다. 두건덕은 精銳兵 數千 名을 늪지 埋伏 시키고는 兵士들이 죄다 도망간다고 거짓 所聞을 냈다. 설世雄은 自身이 두려워서 그런 줄 알고 境界가 解弛해졌다. 두건덕이 이를 알고는 몸소 精銳兵 數百 名 [6] 과 함께 에 몰래 奇襲하였다. 때마침 안개 가 짙게 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설世雄君의 陣營은 崩壞되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짓밟으며 달아나기에 汲汲했다. 여기서 萬餘 名이 죽었다. [7] 설世雄은 周邊의 數十 基(騎)만 [8] 引率한 채 下杆城으로 물러났다. 그 羞恥心과 鬱憤에 이 나서 濁軍으로 돌아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噴射했다. 나이 63歲였다.

性品과 評價 [ 編輯 ]

청렴하고 몸가짐을 操心히 하며 곳곳에서 戰鬪 를 하면서도 民間에는 조금도 弊를 끼치지 않았다. 煬帝는 설世雄이 ‘청렴하고 바르며 節槪가 있어 옛사람의 氣質이 있다’고 臣下들에게 公開的으로 稱讚하며 우감문랑장에서 右翼위將軍(右翊衛―)으로 初配(超拜)하였다. 《 水西 》에서는 駐라후 , 駐法上 , 이경(李景), 설世雄, 모용삼腸(慕容三藏)李 모두 勇猛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富貴를 누렸다고 하였다.

武藝가 뛰어나 薩水大捷 當時 모두 죽게 될 隋나라 軍隊는 설世雄의 勇猛 德分에 그나마 少數라도 살 수 있었다.

家計 [ 編輯 ]

  •  : 설회(薛回)
    • 本人 : 설世雄
      • 長男 : 설만술(薛萬述)
      • 次男 : 설滿熟(薛萬淑) [9]
      • 三南 : 褻慢菌(薛萬鈞)
      • 사남 : 설만철(薛萬徹)
      • 막내 : 褻慢非(薛萬備)

各州 [ 編輯 ]

  1. 資治通鑑 》181卷 手記 第5 煬帝 大業 4年
  2. 《水西》4卷 提起 第4 煬帝 陽光下 大業 8年
  3. 《資治通鑑》181卷 手記 第5 煬帝 大業 8年
  4. 隋나라 末期의 大規模 農民 叛亂
  5. 新唐書 》85卷 列傳 第10 두건덕
  6. 《資治通鑑》에서는 280名. 《資治通鑑》184卷 手記 第8 共濟 의녕 元年 7月
  7. 舊唐書 》54卷 列傳 第4 두건덕
  8. 《舊唐書》와 《新唐書》에서는 數百 基
  9. 《新唐書》에는 褻慢菌의 동생 으로 되어 있으나 《水西》, 《北史》, 《舊唐書》를 따른다

參考 文獻 [ 編輯 ]

  • 《水西》65卷 列傳 第30 설世雄
  • 北史 》76卷 列傳 第64 설世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