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林 (政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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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林 (山林)은 學識과 德이 높으나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숨어 지내는 선비로서 山林支社 (山林之士), 山林宿德知事 (山林宿德之士), 山林讀書知事 (山林讀書之士)의 略稱이다. 林下知人 (林下之人), 林下讀書知人 (林下讀書之人)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朋黨 政治機에 思想的 地主였다. 特히 山林은 朝鮮 時代에 隱居한 선비 가운데 나라의 부름을 받아 特別 待遇를 받던 사람을 가리킨다.

이는 士林派의 中央政界 進出 以後, 士林派가 旣得權化 되자 朝廷에 出仕하지 않고 鄕里에서 學問 硏究와 讀書, 後學 養成을 하는 士林派 學者들을 旣得權化된 士林派 者과 따로 區分하여 부르기 始作하였다. 山林은 宣祖 代의 庭球 , 정인홍 , 광해군 , 人組 代의 김장생 , 장현광 , 金集 , 송시열 , 송준길 , 許穆 , 尹鑴 , 윤선도 , 심광수 等이 代表的인 人物들이었다.

起源 [ 編輯 ]

山林의 起源은 광해군 때의 정인홍 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梅泉 黃玹 에 依하면 ' 광해군 이이첨 이 政權을 잡고 정인홍 을 三公( 領議政 , 左議政 , 右議政 )의 자리에 앉혔다.'고 하였다. [1] 그에 依하면 恒常 臺詞를 處理함에 있어 이들 山林은 現職 權力者와 '겉과 속이 통하였으며 유현지론( 遊學 에 精通하고 言行이 바른 사람임을 論함)을 憑藉하여 胸中에 들은 것을 行하였다. 그러자 當局者들은 그것을 政治의 標本으로 삼았는데 政局이 바뀔 때마다 벼슬을 그만두고 隱居한 사람들 中에서 推薦하여 영수를 삼았다.'고 하였다. [1]

이런 傳統은 後代에도 繼續되어 人組 代의 김장생, 장현광 김상헌 , 박지계 , 金集 , 안방준 , 孝宗 代의 許穆 , 김홍욱 , 송시열 , 송준길 , 홍우원 , 윤선도 , 尹鑴 , 심광수 , 肅宗 代의 권상하 , 尹拯 , 英祖 代의 心肉 , 正祖 代의 김종수 , 안정복 等이 山林의 領袖로서 重用되었다. 이들은 수많은 弟子들을 통해 朝鮮 時代의 輿論 形成에 큰 影響을 미쳤다.

經過 [ 編輯 ]

山林의 傳統은 大院君 執權 때에도 繼續되었다. 大院君 때까지만 해도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마침 碧溪 李杭魯 와 勞使 기정진 이 '양경抗議斥邪'(西洋勢力을 來侵을 抗議하여 天主敎 를 排斥함)의 上疏를 올렸다. 이때 李杭魯 의 上訴가 매우 깐깐했는데 當時 사람들은 百年 以來의 最高의 上訴라고 稱하기도 했다. [1]

李杭魯 기정진 은 同時에 그것도 갑작스럽게 拔擢되어서 亞卿(六曹의 參判 )의 벼슬까지 올라갔다. [1] 두 사람의 學術과 文章은 當代를 抑壓할 수 있었고 立身(出世) 또한 本말(밑과 끝)이 있었기 때문에 過去처럼 權勢있는 사람에게 머리를 굽실대는 일이 없었다. [1]

기타 [ 編輯 ]

山林은 숨어사는 선비인 恩師나 隱者, 銀日射와는 달리 性理學 또는 儒敎 學問을 專門的으로 硏究하는 사람들이었다. 壬辰倭亂 , 丁酉再亂 以後 旣得權化된 士林派인 東人, 庶人은 山林숭用 理라 하여 各各 自派의 名望있는 山林人士를 重用하여 淸流의 이미지를 쌓으려 努力하였다.

黃玹 은 이들 山林에게도 賢明함과 奸邪함이 있다고 評價하였다. 그에 依하면 비록 縣과 肝이 똑같지는 않지만 山林임을 自稱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도 하였다. [1]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黃玹, 《매천야록》 (정동호 驛, 一問書籍, 2011) 32페이지

參考 文獻 [ 編輯 ]

  • 朝鮮王朝實錄
  • 이건창, 《黨議通略》
  • 黃玹, 《매천야록》 (정동호 驛, 一問書籍,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