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희
(朴勝喜,
1901年
陰曆 8月 17日
~
1964年
7月 15日
)는
日帝强占期
에 主로 活動한 劇作家 兼 演出家이다. 呼價 春江(春崗)이라
박춘강
이라고도 부른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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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後期와
大韓帝國
의 高官이었던
박정양
의 셋째 아들이다. 只今의
서울
中區
장교동에서 태어났다.
中央高等普通學校
를
1919年
에 卒業하고
日本
으로 留學을 떠났다.
도쿄
의
正則英語學校
를 거쳐
1921年
에는
메이지 大學
高等科 英文科에 入學하였으며, 이때 도쿄 留學生들을 모아
土月會
를 組織하여 韓國 新劇 運動의 先驅者가 되었다. 同人 性格이었던 土月會가 漸次 專門 劇團으로 變身하면서 劇作과 演出에 專念하게 되었다.
土月會는 박승희의 運營 方式에 不滿을 품은 勢力이 나오면서 內紛에 휩싸여 두 次例 紛糾가 發生하였고,
1926年
에 처음으로 解散되었다. 土月會가 解散되면서 土月會 運營에 財産을 投資했다가 날리게 된 박승희는 곤란한 處地가 되었다. 結局, 新劇을 버리고 通俗 演劇 公演에 매달리면서
1928年
에 再起 公演을 올리기도 했으나 별다른 所得이 없다가 土月會는
1931年
에 完全히 解散되었다.
土月會 解産 後에도 여러 劇團을 組織하였다. 그러나 이 가운데
1932年
結成한
太陽劇場
만이 어느 程度 興行에 成功하였다. 太陽劇場 公演은 興行劇 性格이 뚜렷하였기 때문에 박승희는 演劇界에서 그다지 認定을 받지 못하였다.
韓國 戰爭
後
慶尙南道
馬山
으로 避難하였고, 以後 演劇界에서 活動하지 못하는 가운데 10餘 年 동안 不遇한 生活을 하게 되었다.
1963年
에
韓國演劇上
이 制定되었을 때 第1回 受賞者가 되어 新劇에 對한 貢獻을 認定받았다. 總 演出作이 200篇이 넘고, 脚色作을 包含하여 演劇 臺本도 200篇을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 가운데 現傳하는 作品은 4篇뿐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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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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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옥희,이영미,이순진,李承姬 (2006年 12月 15日). 《植民地時代 大衆藝術人 事前》. 서울: 소도. 120~123쪽쪽.
ISBN
9788990626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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