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모르포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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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모르포젠 AV.142 ( Metamorphosen, Studie fur 23 Solostreicher )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가 作曲한 23代의 絃樂器 를 위한 絃樂合奏曲이다. 1945年 第2次 世界 大戰 末期, 獨逸이 敗戰하여 滅亡하기 直前에 作曲됐고, 슈트라우스 萬年 81歲 때의 作品이다.

作曲 [ 編輯 ]

戰爭 末期와 個人의 슬픔 [ 編輯 ]

이 曲의 스케치북이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 의 슈트라우스 記念館에 保管되어 있고, 슈트라우스의 自筆 總報는 파울 자허(Paul Sacher)가 所有하고 있다. 스케치북은 1944年에 쓴 32페이지에 이르는 것으로 ‘뮌헨을 爲한 服喪(服喪)’이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메타모르포젠’의 스케치는 적어도 1944年에 한 것이 된다. 이 時期는 第2次 世界 大戰 의 末期에 該當한다. 슈트라우스가 이 作品을 作曲하게 된 直接的인 動機는 1943年 聯合軍이 敢行한 大攻襲 때문이다. 뮌헨 오페라 劇場을 始作으로 드레스덴 젬퍼오페라하우스 가 崩壞되고 베를린의 린덴 오페라 等等이 次例로 火魔에 휩싸였는데, 特히 1945年 2月 13日부터 15日 사이 3600餘 臺의 爆擊機와 1300餘 臺의 大型 爆擊機들이 몇 萬 톤 以上의 爆彈을 쏟아부어 高度 드레스덴을 瞬息間에 날려버려 폼페이 最後의 날로 만들어버린 것이 作曲의 決定的인 契機가 되었다. 슈트라우스는 이제까지 平和의 날 , 다프네 , 다나에의 사랑 等 3作品의 오페라 臺本을 提供해 준 빈의 文化史家이며 演劇學者人 요제프 그레고르(Joseph Gregor, 1888~1960)에게 ‘이 世上에서 最高의 聖地인 괴테 하우스(바이마르)는 破壞되고, 내가 第一 좋아한 드레스덴, 바이마르, 뮌헨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고 恨歎하는 便紙를 보내며 自身의 追憶과 꿈이 서려있는 都市들이 破壞되는 現實에 몹시도 괴로워했다. (1945年 3月 2日) 이 攻襲으로 因해 作曲家는 自身의 過去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로브 音樂 辭典에는 이 作品에 對해 ‘슈트라우스 自身이 半世紀 동안 이끌어 온 獨逸 音樂文化에 對한 비가(悲歌)’ 라고 紹介되어 있기도 하다. 게다가 3月에는 빈의 국립오페라극장 도 破壞되어 버렸다.

살로메 엘렉트라 같이 그리스 古典을 통한 에너지와 다이내믹의 强力한 咆哮를 始作으로 薔薇의 記事 낙소스의 아리아드네 以後 드라마와 音樂의 새로운 關係設定을 통한 새로운 極-오페라의 誕生을 이끌어낸 슈트라우스는 天性的으로 유머러스하고 肯定的이며 好奇心 많은, 그리고 複雜함을 넘어선 華麗함과 單純함을 넘어선 純粹함을 同時에 갖고 있던 作曲家이다. 이렇듯 모차르트 以後 最高의 天才로 일컬어진 그에게 第2次 世界 大戰은 엄청난 衝擊으로 다가왔다. 第1次 世界 大戰 도 겪은 그였지만 當時에는 塹壕戰과 局地戰을 中心으로 戰爭이 벌어진 反面 이렇게 都市 全體와 市民을 瞬息間에 날려버리는 慘酷하고 無慈悲한 境遇는 없었기에 그 슬픔의 强度는 더욱 컸다.

슈트라우스는 뮌헨의 國立劇場이 傳播된 것을 알았을 때 뮌헨을 爲한 服喪 으로 슬픔을 담은 音樂을 쓰려고 했지만, 몇 마디만 스케치했을 뿐 放置해버렸다.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예전에 뮌헨에 關한 映畫가 企劃되어 슈트라우스는 1939年에 그것을 위한 왈츠를 쓴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映畫는 나치의 命令으로 上映이 禁止되어 버렸다. 그래서 슈트라우스는 앞서 放置한 스케치 代身에 이 왈츠를 改正하고 短調 部分을 더하여 1945年 2月 24日에 ‘뮌헨’이라고 題目을 단 曲으로 完成했다. 이때 슈트라우스는 81歲의 生日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世上을 떠나기 4年 前이었다. 이런 高齡에도 不拘하고 뮌헨을 追悼하는 왈츠를 쓴 것만으로 슈트라우스의 마음은 安定되지 않았다. 獨逸 各地의 예로부터의 文化와 風土가 戰爭으로 危機에 빠지고, 大部分이 破壞되어 버린 것에 對한 슬픔을 담아 슈트라우스는 새롭게 作品을 完成했다. 이것이 메타모르포젠 이다. 이러한 事情은 第1次 世界 大戰 때에 心境은 相當히 다르지만 클로드 드뷔시 가 一連의 소나타를 썼던 것과 비슷한 點이 있다. 남겨진 메타모르포젠의 自筆總報의 처음에는 ‘1945年 3月 13日 着手’ 라고 쓰여 있고, 曲의 마지막 9마디째에는 ‘追悼!(In Memoriam!)’ 라고 쓰여 있으며, 마지막 페이지에는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 / 1945年 4月 12日’ 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슈트라우스는 이것에 ‘23名의 솔로 絃樂走者를 위한 習作’ 이라는 副題를 달았다. 이 境遇의 스케치는 一般的으로 習作이라고 飜譯되지만, 練習曲이라는 意味도 있고, 이 曲은 實은 이 兩쪽의 性格을 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슈트라우스는 이 曲의 앞서 말한 스케치북에 音樂과 結付된 것으로 晩年의 테마인 ‘溫順한 풍자시집(Zahme Xenien)’ 의 第7집에서 2篇의 詩를 적어 넣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갖고 있다.

‘아무도 自己 自身을 모르고, 自身과 分離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每日 每日 結局은 밖으로 向하여 自身이 무엇이고 무엇이엇는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바라는지를 分明히 試驗하고 있다. / 그러나 世上에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實際로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또 現在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理解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正말 그 날이 손길을 뻗쳐 오기를 理性을 갖고 믿으라. 只今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지나가고, 마지막에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

聯合軍의 反擊과 베를린 包圍, 獨逸 降伏 [ 編輯 ]

슈트라우스가 이 曲을 總報에 새로 썼을 무렵에 나치 獨逸 은 聯合軍의 좁혀진 包圍網 속에 있었고, 베를린까지 包圍돼 날이 갈수록 敗戰 雰圍氣가 짙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4月 30日과 5月 1日 戰爭을 일으긴 主犯 總統 아돌프 히틀러 , 宣傳長官 파울 요제프 괴벨스 는 自殺했고, 히틀러의 遺言으로 國家元首가 된 카를 되니츠 는 在任 4日만인 5月 8日 無條件 降伏을 宣言했다. 이 降伏宣言을 슈트라우스는 가르미슈에서 라디오 放送을 듣고 알았다. 이 放送에 이어서 라디오는 베토벤의 英雄交響曲 의 2樂章 ‘葬送行進曲’을 내보냈다. 슈트라우스는 後에 말하듯이 ‘메타모르포젠’과의 關聯도 있어 이 音樂을 意味深長하게 들었음에 틀림없다. 어쨌든 이러한 事情이 있었기 때문에 當分間은 메타모르포젠을 超然할 수 있는 狀況이 아니었다.

初演, 出版 [ 編輯 ]

슈트라우스는 戰後의 混亂스런 獨逸을 避하여 1945年 10月에 스위스로 移住해서 1949年 5月에 가르미슈로 되돌아오기까지 生活의 中心을 스위스에 두고, 메타모르포젠의 初演의 具體化를 생각하기 始作했고, 그것을 위한 그룹으로 파울 者許可 指揮하는 콜레기움 無知쿰 취리히를 特別히 뽑았다. 자허는 現代音樂에 理解를 가진 指揮者이며 音樂學者로, 1926年에는 바젤 室內管絃樂團을 組織하여 指揮를 맡았고, 1941年부터 콜레기움 無知쿰 취리히의 指揮를 맡고 있었다. 자허는 現在에 이르기까지 80曲의 作品을 委囑 或은 超然해 왔지만 그 中에 바르토크의 絃樂을 위한 디베르티멘토 , 現, 打樂器, 첼레스타를 위한 音樂 , 힌테미트의 交響曲 '世界의 調和', 오네게르의 交響曲 2番과 4番等이 있다. 자허는 自身과 콜레기움 無知쿰을 爲해 슈트라우스에게 曲을 써달라고 要請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일로 슈트라우스와 자허는 交際를 갖게 된 듯하다. 그러나 슈트라우스는 다시 자허와 메타모르포젠의 初演을 交涉하기 始作했다. 이렇게 하여 이 曲은 1946年 1月 25日에 취리히의 톤할레 작은 홀에서 者許可 指揮하는 콜레기움 無知쿰 취리히에 依해서 初演되었다. 그리고 슈트라우스는 이 招演일에 이 曲의 總報를 자허와 이 管絃樂團에 獻呈한다고 宣言했다. 初演을 위한 리허설에서는 슈트라우스 自身이 指揮棒을 들기도 했다. 總報와 파트樂譜는 같은 해인 1946年에 런던의 부시&호크社에서 出版되었다.

題目 어원, 特徵 [ 編輯 ]

‘메타모르포젠’ 은 獨逸語의 메타모르포제의 復讐로 普通은 ‘變容’으로 飜譯된다. 이것은 그리스어에서 由來하는데 Meta 는 ‘變化하고’이고, morph 는 ‘形態’이므로 메타모르포제는 元來 形態를 변화시키는 것을 意味한다. 슈트라우스는 音樂의 進行으로 봐서 自身의 作品에 ‘메타모르포젠’이라는 題目을 붙었다. 分明히 이 曲은 스케치북에서의 素材를 活用하여 終局的으로는 앞서 말한 베토벤의 ‘葬送行進曲’의 主題로 이끌어가는 過程을 보이면서 하나의 樂想을 自由롭게 維持하고 변용해 가는 作品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以前인 1943年에 힌데미트 베버 主題에 依한 交響的 變容 이라는 曲을 써서 ‘메타모르포젠’이라는 題目이 流行하리라는 徵兆가 있었다.

‘메타모르포젠’은 主題와 樂句를 자유롭게 발전시켜 가는데, 소나타 形式에서의 展開와 몇 가지 비슷하지만, 끝까지 變容에 拘礙되고 있다. 그 意味에서는 變奏曲과 混同되기 쉽지만 變奏曲과는 根本的으로 다른 것이다. 勿論 技巧的으로는 變奏와의 關聯을 無視할 수 없지만, 變奏보다 더 자유롭고, 主題에 束縛되지 않는다. 이것은 元來 베를리오즈 幻想交響曲 의 戀人을 나타내는 固定觀念의 處理에서 發端하여, 리스트 가 交響詩에서 高度로 진전시킨 技法으로, 그 交響詩 3番 ‘前奏曲’ 等은 그것을 使用한 典型的인 作品으로 되어 있는데, 또 2曲의 피아노 協奏曲과 나短調의 피아노 소나타 等도 그 技法을 應用하고 있다. 슈트라우스의 境遇는 ‘메타모르포젠’이라는 題目을 使用하는데 對해서 괴테 로부터도 啓示를 받았다. 슈트라우스는 戰爭中에 가르미슈의 山莊에서 詩를 主體로 하여 괴테의 作品을 熟讀했다. 괴테는 晩年에 自身의 思考를 追求한 作品과 關聯하여 自身의 知性의 展開에 메타모르포젠을 使用했다. 그뿐만 아니라 괴테는 2篇의 市의 타이틀에도 이 말을 使用했다. 2篇은 植物의 變形 (1798)과 動物의 變形 (1806)이다. ‘植物의 變形’은 괴테가 좋아한 主題인 博物誌의 흐름을 다룬 것이고, ‘動物의 變形’은 動物의 世界에 關心을 둔 것이다. 슈트라우스는 이러한 괴테로부터의 暗示를 받아 音樂으로 人間의 世界에 關心을 둔 것이다. 슈트라우스는 이러한 괴테로부터의 暗示를 받아 音樂으로 人間의 世界를 다뤄 人間은 結局은 죽음으로 이어저 가는 것을 나타냈다. 그 意味에서 ‘메타모르포젠’은 標題音樂에 相當히 가까운 作品이라고 할 수 있다.

‘메타모르포젠’은 23名의 絃樂走者를 爲한 것이지만, 이른바 傳統的인 糧食에서의 絃樂合奏曲 과는 本質的으로 다르다. 卽 各各의 樂器를 獨走風으로 움직이는 點에 特徵이 있다. 前에도 말했듯이 슈트라우스는 이 曲에 習作(Studie)이라는 副題를 붙였지만, 23名의 獨奏者에 依한 앙상블을 위한 練習曲的인 것을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한 앙상블 中에서의 樂器의 處理方法에 習作的인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亦是 관형縣惡法의 大家의 作品인 만큼 이 曲은 銳利한 色彩感覺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以前에 여러 가지 交響詩 傑作을 만단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 답게 메타모르포젠의 方法에도 堂堂함이 들어가 있다.

이 音樂에는 베토벤 交響曲 3番 ‘英雄’ 의 2樂章 ‘葬送行進曲’으로부터 引用한 첼로와 더블 베이스의 몇몇 마디들이 作品의 根幹을 이루는 한便,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에 登場하는 셋잇團音 리듬이 頻繁히 使用된다. 이와 同時에 구스타프 말러 의 交響曲 느린 樂章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심원하高度 浪漫的인 性格과도 닮아 있고 그 特有의 자유로운 폴리포니적 性格(23個의 樂器가 모두 獨立된 라인을 갖고 있는)과 自由로운 變奏樣式을 聯想시킨다. 悲痛하면서도 冥想的인 主題에 加해지는 색다르고 끊임없는 有機的 變形을 담고 있는 이 音樂은 精神的으로는 ‘트리스탄’敵이지만 마음으로는 切親한 親舊였던 ‘말러’를 回想하며 結局은 ‘베토벤’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귀결시키는 듯하다. (親舊였던 구스타프 말러는 個人的인 3番의 打擊으로 입은 衝擊과 슬픔, 죽음의 恐怖로 인한 두려움을 겪다 心臟病으로 世上을 떠났다. 晩年의 슈트라우스도 自身이 處한 狀況과 슬픔이 말러와 다르지 않다고 봤을 것이다.)

이렇게 수수께끼 같은 題目과 象徵的인 內容을 담고 있는 이 作品은 戰爭의 傷痕에 對한 一種의 精神的인 治癒를 담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더 나아가 超感覺的인 ‘멜로디的인 폴리포니’를 통해 絃樂 테크닉에 있어서 가장 發展된 勝利를 담고 있다는 點에 있어서 作曲家의 現代的인 器樂語法 또한 눈여겨 볼만하다. 어둡고 陰濕한 雰圍氣로부터 아무도 알아챌 수 없는 사이에 벨벳과도 같은 부드럽고 燦然한 사운드로 정화시켜나가고, 신중하게 選擇된 音調를 통해 眩惑的이고 ‘아리아드네’的인 火星으로 移動하는 過程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創造力만이 해낼 수 있는 獨步的인 것이다. 그는 이 作品을 自身이 죽은 다음 一種의 ‘流品’으로 發表되기를 願했지만 그렇게 實行되지는 못했고 그 자리는 以後에 作曲한 네 個의 마지막 노래 가 代身하게 되었다.

編成 [ 編輯 ]

標題처럼 23名의 絃樂器 走者가 쓰이고 있지만, 通商의 現5部가 아니라 各 走者가 獨立된 23파트를 연주하도록 23段의 스코어에 쓰고 있으며, 敍法은 緻密하에 겪고 있다.

演奏 時間 [ 編輯 ]

  • 約 30分

構成 [ 編輯 ]

이 曲은 自由로운 3部 形式으로, 아다지오 마 논 트로포, 4/4拍子. 첼로의 느긋한 導入的인 主題로 始作된다. 이 部分은 첼로 以下의 低音만인 境遇도 있어 답답하고 슬픈 氣分에 잠겨 있다. 이윽고 그 위로 2臺의 비올라가 새로운 主要한 主題를 연주하기 始作한다. 그 첫部分의 3個의 닽은 음 動機(A)는 이 曲에서 매우 重要한 役割을 한다. 이어 亦是 이 같은 音의 同期에 引渡되어 다른 2臺의 비올라에 依한 새로운 自制가 나타난다. 曲은 이 세 種類의 材料에 依해 對位法的으로 자유롭게 나아가 調바꿈을 거듭하여 어두운 내림마短調로 一旦 클라이맥스에 達한다. 이때 지성부의 힘찬 樂譜3이 들리는 것이 效果的이다. 이어 밝은 사長調의 ‘若干 흐르듯이(etwas fliessender)’라는 指示語가 적혀 있는 새로운 主題가 中聲部에서 登場한다. 그 外에도 只今껏 提示된 主題에 몇 個의 材料를 보태어 이들을 능슥하게 對位法的으로 處理되고 漸次 템포가 빨라져 熱情的으로 展開된다. 그 때 바이올린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提示된다.

이 樂譜5와 樂譜3은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의 動機로부터의 自由로운 引用이라고 說明되는 일이 많다. 曲은 다시 템포를 빨리해 아지타토로 이어지는데, 그래도 如前히 아첼레란도는 繼續된다. 그리고 그 進行은 特히 高音域에서 活氣를 띠게 된다. 그러나 그 活氣도 漸次 수그러들명 樂譜1이 뚜렸하게 再現되고, 이어 樂譜4街 年賦된 다음, 다시 클라이맥스가 形成된다. 그리고 曲은 처음 아다지오의 템포로 되돌이온다. 여기서부터는 最初 部分의 自由로운 再現이다. 마지막으로 제1바이올린에 依한 樂譜3의 取扱을 받아 曲은 몰토 렌토로 템포가 느려지고, 상성部에서는 樂譜1이 提示하는 아래로, 베토벤의 交響曲 3番 '英雄'의 2樂章 '葬送行進曲'의 主題가 기다렸다는 듯이 뚜렷하게 1回만 演奏되고 끝맺는다. 이처럼 베토벤의 主題가 提示되면 只今까지의 슈트라우스의 主題 大部分에 베토벤의 것과 多少 關聯이 있었음을 確實히 알 수 있다. 이를테면 樂譜2의 A와 B, 樂譜3의 C, 樂譜4의 D는 베토벤의 主題와 密接한 關聯을 보여준다.

參考 文獻 [ 編輯 ]

  • 《作曲家別 名曲解說 라이브러리》 22卷 '슈트라우스' 〈音樂誌尤史〉 (音樂世界)
  • 네이버캐스트 '메타모르포젠' 글, 박재성 / 音樂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