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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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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 (童貫, 1054年 ~ 1126年 )은 北送 徽宗 때의 宦官이며, 자는 도부(道夫)이다. 어릴 때 宦官 이헌(李憲)에 依해 길러졌고 皇宮의 給仕가 되었다.

徽宗 은 그림, 글씨 等 藝術에 뛰어난 솜씨를 가졌고 藝術에 關한 識見도 卓越했는데, 그 程度가 지나쳐서 나랏일에 疏忽히 하여 後날 金나라 로 붙잡혀가는 悲劇을 키운 셈이 되었다. 徽宗 은 各種 藝術品을 蒐集하기 위해 杭州 에 命금國이라는 政府 機關을 設置했으며 同官은 命금國에서 일하는 官吏가 되었다. 同官은 같이 일하던 官吏 蔡京 과 무척 親한 사이가 되었다. 徽宗은 自身의 藝術品 蒐集 欲求를 만족시켜주는 潼關을 아끼게 되어 朝廷으로 불러들였는데, 同官은 채경이 中央 朝廷의 高官이 되도록 밀어준 뒤 서로 손을 잡고 宦官과 大臣들을 手足처럼 부리면서 朝廷의 權力을 잡았다. 同官은 宋나라 西北邊 地域軍을 指揮하기도 했으며, 채警과 더불어 나라 안에서 權力의 絶頂을 누렸다.

1102年 鷹峯國(應奉局)을 쑤저우, 항저우에 設置하였다. 1105年, 全國 各地에서 琪花瑤草를 蒐集하여 大闕을 裝飾하도록 한 '化石江'(花石綱)을 實行하고, 百姓들에게서 强制로 빼앗아 수도 카이펑 으로 실어오게 했다. 1121年 선화 3年 이 때문에 民心이 洶洶해지고 百姓들의 不滿이 커져 房臘 이 叛亂을 일으키는 契機가 되었다. [1]

金나라와의 同盟 [ 編輯 ]

同官은 1111年 遼나라 9代 皇帝인 天祚帝 野率演戱의 生日을 祝賀하는 使節로 重慶 對政府에 갔다오던 中 遼나라 官僚 出身인 馬食(馬植)의 헌冊을 듣고 여진과 손을 잡아 遼나라를 殲滅하고 연운 16週 를 되찾을 計策을 세웠다. 이것이 實行에 옮겨져 마食餌 金나라를 세운 완안阿骨打 를 만난 때가 1120年이었는데, 阿骨打는 馬食의 눈 앞에서 遼나라의 首都 上京 임황부(上京臨潢府)를 單숨에 占領해 보였다. 이때 맺은 協定에서 金나라는 古北口(古北口)까지 占領하고, 宋나라는 遼나라의 南京 석진부(南京析津府), 卽 年庚 까지 占領하는 한便 연운 16週 宋나라 가 차지하기로 約束했다. 이것이 海上의 맹 이다.

그러나 江南 地域에서 房鑞衣 난 이 일어나고 氣勢가 갈수록 커지자 同官은 손수 鎭壓에 나섰으며, 이 때문에 金나라와 同時에 遼나라를 攻擊한다는 計劃은 제때 實行되지 못했다. 亂이 鎭壓된 後에야 同官은 兵力을 거느리고 燕京을 攻擊했지만 蘆溝橋 에서 大敗했다. 以後 遼나라의 將軍 高峯(高鳳)과 곽藥師(郭葯師)가 연운 16株에 屬하는 濁酒(?州)와 譯註(易州)를 바치고 降伏하자 이에 기운을 얻은 同官은 遼나라가 哀願하는 것을 無視하고 다시 20萬 大軍을 動員해 燕京을 攻擊했다. 그러나 窮地에 몰린 遼나라가 決死的으로 抵抗하여 宋나라 大軍은 全滅하다시피 하여 쫓겨났다.

이 消息을 들은 阿骨打 는 宋나라를 믿을 수 없다고 判斷하여 金나라 軍隊를 보내 燕京을 占領하고 연운 16週 中 태행산 東쪽 7週만 宋나라에게 내주는 한便 年庚에서 걷는 稅金과 每年 巨額의 돈과 緋緞을 金나라에게 바치도록 했다. 또 두 나라는 叛亂을 일으키거나 降伏하는 者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은 結果였으나 朝廷에는 燕京을 되찾았다는 것만 크게 알려져 同官에게 王 爵位가 내려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平和는 오래 가지 않았다. 盟約이 맺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宋나라가 金나라에 叛亂을 일으킨 榮州社(領州事) 長角(張珏)李 宋나라에 投降해 왔다. 宋나라는 長角을 받아들였으나 盟約을 상기시키며 抗議한 金나라 의 威脅에 依해 長角을 죽이고 장각의 목과 두 아들을 金나라로 보냈다. 또 하동로 宣撫使(河東路宣撫使) 曇眞(譚?)李 金나라에 提供하기로 했던 軍糧의 讓渡를 拒絶하여 問題를 일으키자 徽宗은 彤管貽 曇眞을 代身하게 했다.

또 宋나라는 金나라의 눈을 避해 逃走中인 天祚帝를 同官으로 하여금 맞아들이게 했는데, 이것이 金나라에게 알려지자 金나라는 同官에게 使臣을 보내 天祚帝를 내놓으라고 했으나 同官은 全혀 모르는 척 했다. 使臣이 繼續 재촉하자 部下 將帥에게 色目人의 머리를 代身 바치라고 指示했다. 이에 不安을 느낀 天祚帝는 몰래 빠져나와 도망가다가 이듬해인 1125年 金나라에 붙잡혔다. 宋나라가 盟約을 거듭 어긴 것이 確認됨으로써 金나라는 宋나라를 攻擊할 口實을 얻었다.

金나라는 宋나라에 天祚帝의 生捕를 알리는 한便 太原 에 있던 同官에게 운중 地域의 割讓을 要求했다. 同官은 갑작스런 事態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뒷일을 部下들에게 맡기고 혼자 開封으로 돌아와 버렸다. 뒤이어 金나라 가 大大的으로 中國을 攻擊해 들어오면서 北送 의 沒落을 부르게 되었다.

沒落과 죽음 [ 編輯 ]

1126年 正月에 金나라 軍隊는 마침내 黃河에 이르러 開封을 威脅하자 徽宗은 欽宗 (欽宗)에게 讓位하고는 銅管 等을 거느리고 南京 응천부 ( 南京應天府:오늘날의 中國 河南省 상구(商丘) ) 로 避身했다. 2月에 宋나라 가 領土를 割讓하는 條件으로 和議를 맺고 禁軍이 撤收하는 가운데 彤管貽 徽宗을 復位시키려 한다는 所聞이 퍼지자 同官은 徽宗과 함께 3月에 開封으로 돌아왔으며, 돌아오자마자 朝廷 안팎으로 同官과 蔡京 을 非難하는 輿論이 들끓었다. 同官은 얼마 되지 않아 流配를 떠나야 했으며, 途中에 處刑되고 同官의 머리는 開封 한복판에 내걸렸다. 權力을 濫用하고 徽宗의 눈과 귀를 가린 그의 모습은 施耐庵 의 小說 水滸傳 에서도 그대로 反映되어 있다.

各州 [ 編輯 ]

  1. 中國歷代官職事前 - 쑤저우 鷹峯國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中華博物審編委員會, 2013年 3月 31日 確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