頓悟漸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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頓悟漸修 (頓悟漸修)는 中國 佛敎 中에서도 腺腫 의 思想이다.

荷澤燼灰 [ 編輯 ]

육조慧能 의 弟子인 荷澤燼灰 가 頓悟點數를 主張했다. 이 主張이 窺峯宗密 로 이어지며, 나중에 高麗 知訥의 頓悟漸修가 되었다. 神會議 弟子 窺峯宗密 의 著書에서는 "797年 皇帝의 勅命이 있어 燼灰를 7組로 했다."는 記錄이 있다.

荷澤燼灰가 南頓北漸설, 全義설(傳衣說) 等을 提唱하면서 南北分種이 일어났다. 燼灰는 六曹헌槍 運動을 하여, 無名이었던 自身의 스승 육조慧能을, 죽고나서 엄청나게 有名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韓國佛敎는 阼階大使인 육조慧能의 이름을 따 曹溪宗이라고 하며, 육조단경을 매우 重視하는데, 荷澤燼灰가 頓悟의 남종선과 點數의 북종선을 區分하여 북종선이 매우 삿되다고 排擊하면서, 當時 皇帝가 아꼈던 북종선의 身手大使를 貶下하고, 무명으로 살다 죽은 自身의 스승 육조慧能을 死後에 엄청난 大選知識으로 有名하게 만들었다. 육조단경度 荷澤燼灰가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頓悟 남종선이 點數 북종선 보다 뛰어나다고 主張하여, 21世紀 韓國에서도 頓悟 남종선을 믿게 한 荷澤燼灰는, 頓悟頓修를 主張한 것은 아니고, 頓悟點數를 主張했다. 卽, 돈오를 世上에 처음 主張하여 널리 퍼뜨린 게 唐나라 하택신회이며, 著作權者로도 볼 수 있는데, 頓悟頓修가 아니라 頓悟點數를 主張했다.

荷澤神會議 頓悟點數 主張 以後에, 中國 禪宗은 主로 先午後繡(先悟後修)의 立場을 取하고 있다. 오늘날 韓國 曹溪宗도 마찬가지다. 頓悟로 깨달은 後에, 補任 을 해야 한다고 主張한다.

知訥 [ 編輯 ]

頓悟漸修(頓悟漸修)는 高麗의 僧侶인 知訥 (知訥: 1158-1210)李 主唱한 思想으로, 修行과 깨달음(覺悟  · 覺悟)에 있어서 그 此際(次第)와 段階에 關한 問題에 對한 思想이다. [1] 다시 말해서 깨달음이 먼저냐 遂行이 먼저냐, 아니면 遂行(修行)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냐, 깨달은 後에 段階的인 修行을 해야 하느냐는 問題에 對한 思想이다. [1]

知訥 은 頓悟에 對하여, " 마음 은 本來 깨끗하여 煩惱 가 없고, 部處 와 조금도 다르지 않으므로 頓悟라고 말한다"라고 하였고, 또한 "네가 萬一 믿어 議政(疑情)李 대번에 쉬고 丈夫의 뜻을 내어서 眞正한 見解를 發하여 親히 그 맛을 맛보아 스스로 自矜(自肯)하는 데 이르면 곧 受審人(修心人)의 해오처(解悟處)가 되나니 다시 階級과 此際가 없으므로 頓悟라고 말한다(初無級漸階次 故云頓悟也)"라고 하였다. [1] 그러나 修行者가 自身의 本性 部處 와 다름이 없음을 깨쳤다 하더라도 無視濕期(無始習氣)를 갑자기 버린다는 것은 힘든 일이므로 이 돈오를 基盤으로 漸次로 遂行해야 한다고 知訥 은 主張하였다. [1] 이와 같이 하여 漸次로 訓話(薰化)되기 때문에 點數(漸修)라고 했다. [1] 마치 얼음이 물인 줄 알았다 하더라도 곧 그것이 얼음이 물로 變한 것은 아니며 熱氣가 加해져야 비로소 얼음이 물이 되는 것과 같다고 說明하였다. [1] 그러므로 美(迷)로부터 깨치는 것은 頓悟요, 漸漸 聖火(聖化)되는 것은 點數라 할 수 있다. [1]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