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楨漢 (小說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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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楨漢 (金廷漢, 陰曆 1908年 ( 隆熙 2年) 9月 26日 /陽曆 1908年 10月 20日 ~ 1996年 11月 28日 )은 大韓民國 의 小說家이다. 號는 尿酸(樂山)이다.

出生 [ 編輯 ]

慶尙南道 東來府 北面 남산리(現 釜山廣域市 金井區 남산동) 金海 金氏 集姓村에서 7男妹의 맏이이자 집안의 長孫으로 태어났다. 本鄕은 慶北 淸道다. 그는 金馹孫의 조카 三族當 김대유 의 後孫이다. 戊午士禍 로 連坐되어 湖南으로 流配되었다가 中宗反正 後 풀려났다. 그 後 김정한의 先祖들이 이곳에서 世居하게 되었다.

學業과 敎壇 生活 [ 編輯 ]

어려서 曾祖父가 세운 書堂에서 漢學을 배웠고, 열두 살이 되던 해인 1919年 梵魚寺 境內에 있던 명정學校(只今의 청룡초등학교와 금정中學校의 前身)에 入學했다. 중앙고보 에 入學했다가 東來高普(現在의 東來高等學校 )로 옮겨 1928年 卒業했다. 先生은 蔚山 大賢普通學校 敎師가 되었지만 日本의 民族的 差別待遇에 不滿을 품고 朝鮮人敎員聯盟 組織을 計劃했으나 日警에 逮捕됐다. 이 일을 契機로 敎師를 그만두고 日本으로 건너갔다.

1930年 日本 와세다 大學 (早稻田) 附屬 第一高等學院 文科에 入學했다. 1931年 留學生會에서 發刊하는 ‘學之光(學之光)’의 編輯에 參與하였고, ‘朝鮮詩壇’에 ‘救濟事業(救濟事業)’이란 短篇을 寄稿했다가 作品 題目만 실리고 內容은 全文이 削除를 當했다.

1932年 여름放學 때 歸國한 先生은 梁山 農民蜂起事件에 關聯돼 投獄되자 學業을 中斷하고 이듬해 南海普通學校 敎師로 있으면서 農民文學에 投身한다.

文壇 生活 [ 編輯 ]

1936年 短篇〈寺下村〉(寺下村)李 조선일보 新春文藝에 當選됨으로써 文壇에 登場했다. 이때부터 〈옥심이〉(1936), 〈亢進機〉(抗進記)(1938), 〈그러한 男便〉(1938), 〈岐路〉(岐路)(1938) 等을 發表하면서 ‘民衆을 煽動하는 要注意 作家’로 指目되기도 했다. 〈月光韓〉(1940), 〈落日紅〉(1940), 〈推算黨과 곁사람들〉(1940), 〈묵은 자장歌〉(1941) 等의 短篇 小說을 發表하였다.그 後 동아일보社 東萊支局을 引受해 運營하다가 治安維持法 違反이라는 罪名으로 警察에 逮捕됐다. 그는 日帝의 彈壓이 極甚해지자 붓을 꺾었다.

光復 後 [ 編輯 ]

1947年 釜山中學校 敎師를 거쳐 1949年 以後 부산대학교 敎授로 在職했다. 5·16 直後 釜山大 敎授職을 물러나 ‘부산일보’ 常任論說委員으로 論說과 칼럼을 執筆하다가 1965年 釜山大 敎授로 復職했다.

文段 復歸 [ 編輯 ]

以後 1960年代 後期에 와서야 오랜 沈默을 깨고 文壇에 復歸했다. 1966年 洛東江 便에 사는 가난한 漁村民의 生活과 受難을 생생하게 그린 中篇 〈 모래톱 이야기 〉를 發表함으로써 文壇의 큰 注目을 받았다. 以後 5年 동안 洛東江邊의 淳朴하고 無知한 시골 사람들을 主人公으로 하는 暗澹한 日帝治下와 그 以後 逼迫당하는 農村 現實을 暴露하는 小說을 썼다.

1967年 한국문인협회 및 禮銃 釜山支部長을 歷任했다. 1969年 中篇 〈수라도〉(修羅道)로 第6回 韓國文學賞을 受賞하였다. 韓末부터 光復 直後에 이르는 期間 한 女人의 一生을 통해 虛眞사(許進士) 宅의 家族史(家族史)와 韓民族의 受難史가 事實的으로 再現된 ‘修羅道’는 이름없는 民衆의 抗拒精神을 뚜렷이 浮刻시킨 作家의 問題作 中 하나로 꼽힌다.

以後 短篇集 《落日紅》과 《인간단지》(1971)를 發表했다. 1974年 釜山大 敎授 職에서 停年退職했고, 自由實踐文人協議會 ( 民族文學作家會議 의 前身) 會長을 歷任하였다. 그 뒤 1987年 民族文學學會 初代會長職을 맡았다.

事後 [ 編輯 ]

2003年 6月 後輩 作家들과 社會人士들이 釜山廣域市 의 支援을 받아 先生의 生家를 復元했다. 釜山의 鎭山인 금정산 乙 등에 지고 멀리 五倫臺 를 바라보는 生家는 八作 지붕에 一字形의 傳統 韓屋이다.

受賞 [ 編輯 ]

韓國文學賞, 大韓民國 文化藝術賞, 1976年 銀冠文化勳章을, 1994年 心山(心山)上 文學部門을 受賞하였다.

參考 資料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