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룡 (言論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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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룡 (金寓龍, 1943年 7月 18日 ~ )은 大韓民國 의 言論人이자 韓國外國語大學校 言論情報學部 名譽敎授이다. 本貫은 檻倉 .

槪要 [ 編輯 ]

1943年 7月 18日 日本 에서 出生했으며, 1961年 中央高等學校를 卒業하고, 高麗大學校 英文學科에 入學하여 1966年 學士學位를 받았다. 1973年 서울대학교 新聞大學院에서 매스컴 碩士學位를 修了하였으며, 1987年 高麗大學校 大學院에서 言論學 博士 學位를 받았다.

1966年 MBC PD로 入社하였고, 1992年 韓國外國語大學校 社會科學大學 言論情報學部 敎授로 任用되었다.

2006年 한나라黨 推薦으로 第3期 放送委員會 委員이 되었다.

2008年 9月 30日 出帆한 뉴라이트 系列의 言論監視機構인 公正言論市民連帶 顧問을 歷任하였고, 2009年 4月 미디어發展 國民委員會 共同委員長을 歷任하였다.

2009年 7月 31日 放送文化振興會 의 理事로 選任되었다. 2010年 3月 19日 自進辭退했다.

言論觀 [ 編輯 ]

國政 弘報 [ 編輯 ]

2006年 12月 7日 東亞日報 의 詩論 《似而非 官營言論 왜 만드나》를 통해 '國政브리핑'이라는 官營 言論이 存在할 理由가 없다며 批判했다. 그는 이 글에서 政治權力으로부터의 獨立하여야 할 것을 主張하였다. 또한 國政브리핑度 言論으로서의 法的 責任을 지게한 文化관광부의 有權解釋을 歡迎하며, "似而非 言論, 官營 미디어가 나라를 병들게 하고 있다"고 主張하였다. [1]

MBC 民營化 [ 編輯 ]

2008年 7月 29日 뉴라이트放送通信 政策센터가 한국프레스센터에서 開催한 《MBC 位相正立 方案》 討論會에서 〈MBC 民營化의 虛實〉이라는 主題文을 發表하였다. 그는 이 主題文에서 "公營放送은 原則的으로 受信料 財源을 州輸入으로 해야 하는데 MBC는 100% 廣告 輸入에 依存하고 있으며 MBC 株式의 70%를 갖고 있는 방송문화진흥회가 運營 主體로서의 役割을 못하고 있다."고 主張을 하였다. 또한 그는 "9名의 理事陣 構成은 與野의 政治的 産物로 스스로 政治的 隸屬을 벗어나기 어려운 構造로 돼 있다”고 主張하였다.

또한 MBC의 民營化 方案으로는 MBC 地域放送社 賣却→賣却 代金으로 訪問陣이 朴槿惠 代表가 實質的 代表인 淨水場學會 持分 引受→放文振 株式의 70%를 國民(60%)과 職員(10%)에게 賣却하는 方式을 提案 하였다. [2]

MBC 放送掌握 및 關聯發言 [ 編輯 ]

김우룡은 2010年 3月 17日 發刊된 新東亞 4月號 記事에서 "MBC 內의 '座빨' 80%는 剔抉했다"는 發言을 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MBC社長 金在哲 을 擧論하며 그는 "(내가) 淸掃夫 役割을 해라(하니까). 그러니까 김재철은 淸掃夫 役割을 한 거"라며 "이番 人事는 金在哲 社長(혼자 한) 人事가 아니다"며 "큰집도 (金 社長을)불러다가 '쪼인트' 까고 매도 맞고 해서 (만들어진 人事)"라면서 "말귀 잘 알아듣고 말 잘듣는 게 첫 番째 基準"이라며 社長 選任 背景을 밝혔다. [3] 또한 自身(방송문화진흥회 理事長)과 '큰집'으로 指稱된 權力機關이 MBC 人選과 MBC 前社長 엄기영 氏 辭退를 操縱했음을 是認했다. [4] 이 發言을 두고 相當數의 言論媒體들은 김우룡이 政府의 放送掌握을 主導했음을 批判하였다. [5] 保守言論도 이에 加勢하였으나 동아일보는 沈默했다. [6] 全國言論勞組 MBC 本部는 3月 17日 子正 非對委 特報를 내 "이를 통해 公營 放送의 敵들이 그렇게 否認했던 세 가지 事實이 滿天下에 드러났다"며 "이명박 政權의 MBC 掌握 시나리오는 靑瓦臺의 總括 指揮 아래 이뤄졌다는 것, 김우룡과 訪問陣은 政權의 꼭두각시에 不過했다는 것, 김재철은 政權의 指示에 따라 빗자루 춤을 춘 淸掃夫에 不過했다는 것"이라고 指摘했다. [7] 김우룡은 以後 3月 19日 방송문화진흥회 理事職을 自進辭退하였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