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복수
(?福壽,
1911年
[1]
12月 29日
~
1972年
2月 10日
)는
日帝强占期
부터 活動한
大韓民國
의
歌手
,
映畫
企劃價
,
映畫
製作者
이다.
生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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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慶尙南道
蔚山郡
出身으로 어릴 때 그의 집은
국수
工場을 했었다. 幼年時節에도
蓄音機
에 매달려 노래만을 부르면서 꿈많은 어린시절을 보냈었다.
20代 初盤의 나이에
콜럼비아레코드
가 主催한 콩쿠르 釜山大會에 入賞하고
京城府
에서 열린 本選에 進出해 3位를 차지한 것이 歌手로 데뷔하는 契機가 되었다. 그러나
1934年
에 〈他鄕〉과 〈이원애曲〉을 發表하여 音盤은
오케레코드
에서 發賣했다. 後에 〈他鄕살이〉라는 題目으로 알려지게 된 〈他鄕〉은 日帝 强占期 最高의 大衆歌謠 中 하나로 꼽힐 만큼 크게 流行했다.
以後
1936年
末에 發表한 "아 으악새 슬피우는 가을인가요"라는 歌詞의 〈짝사랑〉李 또다시 히트하고
이은파
와의 듀엣曲인 新民謠 〈豐年송〉 等으로 持續的인 人氣를 누렸다. 오케레코드와 專屬 公演團人 朝鮮樂劇團에서 活動하다가
1940年
부터
빅타레코드
의 半島惡極左로 移動하였다. 여기에서 〈알뜰한 當身〉의 人氣 歌手
황금심
과 만나
1941年
에 結婚하였다.
고복수는
채규엽
,
강홍식
과 더불어 日帝 强占期 初期의 歌手로 分類되며, 이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人氣를 누렸다. 한숨을 쉬는 듯한 雰圍氣의 歌唱은 〈他鄕〉, 〈沙漠의 한〉, 〈짝사랑〉 等 恨歎調의 歌詞로 이루어진 그의 人氣曲에 잘 어울렸다. 그러나
1930年代
後半에
남인수
와
백년설
이 登場한 以來 人氣가 수그러들면서
1940年代
부터는 舞臺 公演 爲主로 活動을 轉換하게 되었다.
人氣 歌手였지만 人生에 屈曲이 많았기에 不運의 歌手로도 記憶된다.
韓國 戰爭
때는
朝鮮人民軍
에게 逮捕되었다가 脫出하는 일을 겪었고,
1957年
隱退 公演 以來 손대는 事業마다 繼續 失敗하여 어려운 生活을 했다. 아내 황금심이 映畫 主題曲을 부르며 生計를 延命하는 사이 고복수는 書籍 外販員으로 일해야 했다.
以後 鬪病을 하다가
腦神經 高血壓
과
食道炎
으로 1972年 死亡했다. 享年 62歲.
황금심과의 사이에서 얻은 子女 가운데 맏아들이 트로트 歌手
고영준
, 둘째 아들이 가톨릭 福音歌手
고영민
, 셋째 아들이 作曲家
고병준
이며, 둘째 며느리는
大學歌謠祭
出身의 歌手
손현희
이다.
童話藝術學院
을 經營할 때 輩出한 弟子로는
李美子
와
안정애
가 있다.
所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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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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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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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配偶者 :
황금심
(1921年 12月 10日 ~ 2001年 7月 30日)
- 長男 :
고영준
(1958年 ~ )
- 次男 : 고영민 (195? ~ )
- 三南 : 고병준 (1962年 ~ 2005年 1月 1日)
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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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옥희,이영미,이순진,李承姬 (2006年 12月 15日). 《植民地時代 大衆藝術人 事前》. 서울: 소도. 22~23쪽쪽.
ISBN
9788990626264
.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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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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