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나 臺殉敎
(
日本語
:
元和の大殉?
겐나노 다이쥰쿄
[
*
]
)는
日本
의
에도 時代
初期인
1622年
나가사키詩
의 니시자카 언덕에서
기리柴炭
(日本에서
基督敎人
을 일컫는 말) 55名이
火刑
및
斬刑
을 當한 宗敎彈壓 事件이다. 日本
로마 가톨릭교회
歷史에서 가장 많은 信徒가 同時處刑된 事件으로 以後에도 幕府에 依한 彈壓이 繼續되었다. 나가사키의
데지마
에 드나들었던
네덜란드
船員들과
예수회
宣敎師들에 依해 海外에 傳해지면서, 殉敎한 26人의 成人과 함께 代表的인 殉敎事件으로 記錄된다. 또한 이 事件에는
壬辰倭亂
때 捕虜로 잡혀와
로마 가톨릭교회
에 入敎한
朝鮮人
信徒들도 많은 被害를 입었다.
事件槪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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殉敎者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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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基督敎 禁止令을 이어받아, 가톨릭 司祭 및 修道士, 傳道師等을 逮捕하여 下獄시키고 있었다. 死亡者 中 33名은 오무라(現 나가사키 詩에 屬한 옛 地域)에서, 다른 사람들은
나가사키
의 監獄에 數年間 갇혀 있다가,
1622年
9月에 全員處刑命令과 함께 于라카美를 經由하여 니시자카로 護送되어 그곳에서 一括處刑되었다. 殉敎者들은 宣敎師 및 修道士와 男女老少의 信徒들이었다. 女性과
어린이
가 많이 包含된 것은 宣敎師들을 숨겨주었던 一家를 電源處刑하라는 命令때문이다.
예수회
,
도미니코 修道會
,
프란체스코 修道會
의
私製
아홉 名과 修道士 몇 名은 火刑, 나머지 平信徒들은 斬刑을 當했다. 화형당한 사람中에는 日本에서 最初로
日蝕
觀測을 통해
緯度
를 測定한 것으로 알려진 카를로 스피노라 新婦가 包含되었다. 그를 숨겨준
포르투갈
人 도밍고스 조르지와 그의 夫人및 어린아이도 犧牲者에 包含되었다. 또한 外國人 中에는
朝鮮人
안토니오(火刑)와 그의 夫人 및 아이도 包含되어 있었는데,
壬辰倭亂
勃發 2年後인
1594年
의 時點에서 큐슈地域에는 捕虜로 끌려온
朝鮮人
中 約 2千名의 가톨릭 敎徒가 있었다고 한다.
記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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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處刑光景을 지켜보던
西洋畫
를 배운 修道士 한 名이 處刑光景을 스케치한 그림이 〈원貨對殉敎圖〉라는 그림이 되어
예수회
本部가 있던 로마의 예수회(Jesuit) 敎會까지 傳達되어 只今도 傳해져 내려오고 있다. 以後에도
기리柴炭
迫害는 漸漸 徹底化되어 個項에 依한 西洋勢力의 壓力과
메이지 政府
에 依해 正式으로 禁止될때까지 繼續되었다.
1868年
敎皇
비오 9歲
에 依해 全員이
諡福
되었다.
殉敎者(火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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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로 스피노라(예수회 司祭)
- 안토니오(朝鮮人 南)
- 바오로 나가이視(日本人 南)
- 안토니오 산가(일본인 南)
- 바오로 다나카(日本人 南)
- 루시아 데 프레이타스(日本人 與;포르투갈人과 結婚했으며, 當時 80歲로 最高齡者이자 唯一한 女性)
外 25名
殉敎者(斬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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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벨라 조르지(포르투갈인 與)
- 이냐시오 조르지(포르투갈인 남아, 4歲)
- 마리아(朝鮮人 與;안토니오의 夫人)
- 베드로(朝鮮人 南;안토니오의 아들, 3歲)
- 아폴로니아(日本人 與)
- 마리아 多나우라(日本人 與)
- 마리아 아키구모(日本人 與)
- 마리아 무라야마(日本人 與)
- 카타리나(日本人 與)
- 도미니카(日本人 與)
- 테클라 나가이視(日本人 與;파울로 나가이市의 夫人)
- 클라라 야마다(日本人 與)
- 다미아盧 다다(日本人 南)
- 미카엘 다다(日本人 南 다미아盧의 아들, 5歲)
- 클레멘스(日本人 南)
- 안토니오(日本人 南 클레멘스의 아들, 3歲)
外 30名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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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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