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승
(姜海昇,
1896年
~
1958年
)은
日帝强占期
의 官僚이자,
美軍政期
와
大韓民國
初期의 公務員이었다. 解放 直後의 첫
京畿道
坡州郡
數였다.
1920年
判任文官 試驗에 合格하여 判任官見習, 廣州郡, 加平郡, 龍仁郡, 驪州郡廳 等에서 勤務하고 解放 直前 坡州郡守가 되었다. 富川郡守로 在職 中 大韓民國 政府 樹立 以後에도 富川軍需에 再任命되었다. 6.25 戰爭 直前에는 水原市長이었다가 仁川 上陸 作戰 直前 仁川市長 臨時 職務代行 서리 職을 暫時 遂行하였다. 本貫은
衿川
(衿川)으로, 京畿道 始興 出身. 日帝 强占期 末期 創氏 改名 時節 이름은
이마가와 카이쇼
(今川海昇)이다.
略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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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畿道
시흥군
書面 老媼舍利(後날의
光明市
학온동
) 出身으로, 강하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京城第一高等普通學校
를 卒業한 뒤 判任文官試驗에 合格하여 1920年 京畿道廳 第1部 判任官見習이 되고, 1921年 京畿道
廣州郡
靑 軍屬, 1926年
加平郡
靑 軍屬, 1931年
龍仁郡
靑 軍屬, 1938年~1940年
驪州郡廳
軍屬이 되었다. 1940年 5月 創氏改名 當時 衿川해승으로 改名하였다. 1940年 富川郡守에 任命되었다.
1945年
8月 10日
京畿道
坡州郡
數에 任命되고 8月 15日 日本 敗戰 宣言 以後에도 坡州郡守에 留任되었다. 1945年 10月 2日
京畿道廳
官房注射로 轉任되었다가 1946年 9月 6日 富川郡守 정재종이 警務局 經理課長으로 前任되자
부천군
手로 赴任하였다. 政府 樹立 直後에도 富川軍需에 留任되었다.
1949年 8月 26日 富川郡守로 任命되었다가
[1]
, 1950年 5月 13日 水原市長으로 赴任, 1952年 5月 6日까지 在職하였다.
6.25 戰爭
中에도
水原市
內의 各 稅金 納稅率이 91%를 達成시켰다.
[2]
또한 같은 날 그는 水原市內 飮食業者는 11月 末日까지 營業稅·所得稅 等의 積極的인 徵收 努力을 하는 同時에 惡質滯納者를 一掃할 方針에 對하여 强力한 措置를 取할 것을 發表하였다.
[3]
1950年 9月 26日
仁川上陸作戰
直前에 臨時 仁川市長에 任命되어
[4]
, 10月까지 在職하였다. 1952年 5月 6日 水原市長職에서 물러난 뒤 官職에서 隱退했고 1955年 11月, 민주당 常任顧問 職에 올랐지만 머지않아 1956年 1月에 民主黨 脫黨을 했다.
死後 屍身은 故鄕인
光明市
학온동
에 安葬되었다.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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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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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
- ↑
"納稅成績 良好, 戶別稅가 91%", 自由新聞 1951年 11月 21日子 夕刊 02面 05段
- ↑
"水原市長, 飮食業 稅金 徵收 努力 强化 千名", 自由新聞 1951年 11月 21日
- ↑
“保管된 寫本”
. 2018年 6月 1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8年 6月 14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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