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好調 요시토키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好調 요시토키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好調 요시토키
北條 義時
조큐기 권2에 실려 있는 삽화 속 요시토키의 모습
兆큐機 卷2에 실려 있는 揷畵 속 요시토키의 모습
비늘 가몬
비늘 가몬
第2代 가마쿠라 幕府 싯켄
在任 1205年 ~ 1224年
前任 好調 도키마사
後任 好調 야스토키
無事 情報
時代 헤이안(平安) 時代 末期 - 가마쿠라(鎌倉) 時代 初期
死亡 겐닌(元仁) 元年( 1224年 ) 6月 13日(陽曆 7月 1日 ) 享年 62
改名 요시토키(義時), 間카이(觀海) [1] , 도쿠무네(得宗)
別名 에마노 詩로(江間四郞) 또는 考試로(小四郞), 소슈(相州), 禹쿄노죠(右京兆), 오슈(奧州)
幕府 가마쿠라 幕府(鎌倉幕府) 13人의 合議制
第2代 싯켄(執權) ( 1205年 - 1224年 )
主君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料理理에(賴家) 사네토모(實朝) 후지와라노 料理쓰네(藤原賴經)
官位 사가미老카미(相模守) , 種4爲하, 우쿄노 곤노다以後(右京權大夫), 무쓰老카미(陸奧守)
氏族 干舞 헤이시(桓武平氏) 傍系 好調氏(北條氏)
父母 아버지: 好調 도키마사(北條時政) , 어머니: 이토 뉴도(伊東入道)의 딸
兄弟姊妹 好調 무네토키(北條宗時), 마사코(政子) , 요시토키 , 도키後嗣(時房), 마사노리(政範), 아와노쓰보네 (阿波局), 度키코(時子) 等
配偶者 情實: 前妻 히메노마에 (姬の前) , 後妻 이家奴伽陀 (伊賀の方) ,
側室: 아와盧 쓰步네(도키馬社의 딸과는 同名異人), 理事 圖謀마사(伊佐朝政)의 딸, 等
子女 야스토키(泰時) , 도모토키(朝時), 詩게토키(重時), 아리토키(有時), 馬社무라(政村), 社네야스(實泰), 도키히社(時尙), 타케逃奴 (竹殿), 딸( 구게 이치조 社네마사(一條實雅)의 딸)) 等
墓所 시즈오카(靜岡) 縣(?) 이즈老쿠니(伊豆の國) 時 미나미에마(南江間) 好調地(北條寺)
가나가와(神奈川) 現 가마쿠라(鎌倉) 時 니시姑母야구라베(西御門山稜部)의 野球라

好調 요시토키 ( 日本語 : 北條 義時 )는 헤이안 時代 末期부터 가마쿠라 時代 初期까지의 武裝 이다. 가마쿠라 幕府 의 第2代 싯켄 . 이즈 (伊豆)의 豪族 · 好調 도키마사 의 次男.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情實 · 好調 마사코 의 동생. 度쿠소 家門 堂主.

겐지 쇼군 의 代가 끊긴 後 가마쿠라 幕府의 實質的인 最高 指導者로서 兆큐의 난 後에 3名의 狀況 을 流配시켰다.

生涯 [ 編輯 ]

靑年期 [ 編輯 ]

이즈의 豪族 好調 도키馬社의 둘째 아들로서 태어나 에마노 考試로 (江間小四郞)라 불렸다. 生母에 對해서 분명하지 않고 啓導에는 「이토 뉴도(伊東入道)의 딸」이라고 되어 있는데, 마찬가지로 이즈 國의 再請官印이었던 이토 스케치카(伊東祐親)의 딸로 생각된다. 요시토키가 15, 6歲 되던 무렵에 누나 마사코(政子) 가 當時 이즈의 流配된 罪인 身世였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의 아내가 되었다. 지쇼(治承) 4年( 1180年 ), 요시토키는 지쇼·駐에이(壽永)의 亂과 요리토모의 擧兵 때부터 이시바시(石橋) 山의 싸움에서도 아버지 도키마사, 兄 무네토키(宗時)와 함께 參戰했고 兄 무네토키는 이 싸움에서 죽었다. 以後의 싸움에서 勝利를 거둔 요리토모의 側近으로서 遂行하면서, 그의 가마쿠라 (鎌倉) 入城에도 協力하였다.

요와 (養和) 元年( 1181年 ) 4月, 요시토키는 當時 有力 고케닌 의 子弟들로 요리토모의 信任이 두텁고 弓馬(弓馬)에 뛰어난 者들로 構成된 親衛組織 「氣候쥬」(祗候衆)에 들어, 요리토모의 寢所 警護 等을 맡았다. 요시토키는 一般的인 고케닌들과는 다르게 가와치 겐지 血緣者人 몬후타쓰(門葉)의 中間에 該當하는 揭示(家子, 요리토모의 個人的인 側近으로서 요리토모의 '親衛隊'와도 같은 存在였다 )의 地位에 있었고 그 '揭示' 中에서도 으뜸으로 꼽혔다. 이때 이미 이시바시 山의 싸움에서 戰死한 손위 맏兄 무네토키 代身 好調氏의 赤字(嫡子)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요시토키는 『 아즈마카가미 』(吾妻鏡)에 그 性이 好調가 아닌 所有한 領地에서 딴 에마(江間)로 記錄된 境遇가 많아서 當時에는 好調 집안의 '分家'格인 에마(江間) 집안의 招待 始祖가 된 것으로 보인다. 盆地 (文治) 5年( 1189年 ) 도키馬社의 後妻였던 마키 否認 (牧の方) 所生의 異腹 동생 마사노리(政範)는 16歲에 種5威嚇를 받아 26歲가 더 많은 兄 요시토키와도 같은 地位에 있었기에, 好調氏 本家의 赤字는 어머니가 貴族 出身이었던 동생 마사노리였을 것으로 推定된다. 또한 도키馬社의 邸宅이었던 나고시노野시키(名越邸)를 물려받은 요시토키의 次男인 도모토키(朝時)도 好調 本家의 繼承者로 여겨졌을 可能性도 있어서, 요시토키가 꼭 도키馬社의 '赤字'였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겐랴쿠 (元曆) 2年( 1185年 ), 미나모토盧 노리料理 (源範賴)가 이끄는 헤이케 追討君을 따라 西쪽으로 갔으며 아시야우라(葦屋浦)의 싸움에서 功을 세웠다. 盆地 5年( 1189年 ) 7月, 오슈 후지와라 氏를 滅하기 위해 요리토모가 일으킨 오슈캇센(?州合?)에 從軍하였다. 겐큐 元年( 1190年 ) 11月 요리토모의 上京을 받들어 따라갔다. 요시토키는 21歲 때에 長男 야스토키 (泰時)를 얻었지만 어디까지나 '庶子'였고, 겐큐 3年( 1192年 ) 9月 25日, 요리토모의 仲介로 히키 圖謀무네(比企朝宗)의 딸이자 지체 높은 幕府 뇨步(女房)였던 히메노 碼에(?の前)를 正室로 맞아들여 이듬해에 嫡男(嫡男) 도모토키(朝時)를 얻었다.

요리토모가 살아있던 동안에는 武士로서 나름대로 活躍하고 있었음에도 그 活躍이 두드러지게 浮刻되는 일은 없었던 反面, 요리토모가 죽은 뒤 가마쿠라 幕府 內의 權力鬪爭에서 그는 斷然 頭角을 드러냈다.

政權 爭奪戰 [ 編輯 ]

조지 (正治) 元年( 1199年 ) 요리토모가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어 2代 쇼군 (將軍)李 된 조카 料理理에의 獨裁를 막기 위해 有力 고케닌들이 모여 組織한 13人의 合議制(合議制)에 當時 37歲의 젊은 나이로 參加하였다. 그 뒤 고케닌이자 요리토모의 心腹이었던 가지와라노 가게토키 (梶原景時)가 失脚하여 一家族과 함께 沒殺되는(가지와라노 가게토키의 便) 過程에서는 요시토키의 親姊妹 아와盧 쓰步네(阿波局)가 關與하고 있었다. 겐닌 (建仁) 3年( 1203年 ) 料理理에의 外戚인 고케닌 히키 요시카즈(比企能員)를 滅하고(히키 요시카즈의 便), 이듬해에 料理理에를 暗殺하고 요리토모의 次男 미나모토盧 사네토모 를 3代 쇼군으로 擁立하여, 도키馬社가 萬도코로(政所) 의 벳土(別?)가 되어 幕府의 政務를 行하게 되었다. 이 時期의 好調氏에 依한 有力 고케닌 除去는 도키마사와 요시토키, 父子의 合作으로 이루어졌으나, 겐큐 (元久) 2年( 1205年 )에 잇따라 일어난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 (?山重忠の?) 그리고 마키氏 事件 (牧氏事件)으로 富者는 對立하게 된다. 『아즈마카가미』에는 도키馬社가 名望높은 고케닌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를 後妻 마키 否認(牧の方)의 讖言을 믿고 그를 沒落시켜 고케닌들의 怨恨을 샀고, 요시토키는 시게타다가 謀反 따위 일으킬 理가 없다며 시게타다 討伐에 反對 意思를 비쳤다고 했지만, 이것은 아버지를 내쫓은 요시토키의 背德한 行爲를 正當化하려는 아즈마카가미의 脚色으로 보이는데( 아즈마카가미#하타케야마 시게타다 參照). 無事時局 의 守令이었던 시게타다를 排除하면서 생겨난 富者의 對立 背景에는 好調 本家의 後嗣로 指目받던 마사노리(政範)가 겐큐 元年( 1204年 )에 急死한 뒤 사위 히라가 圖謀마사 (平賀朝雅)를 쇼군으로 세우려던 도키馬사나 마키노 伽陀에 도키馬社의 前妻 所生인 요시토키나 마사코 男妹가 反撥하면서, 생겨난 某種의 집안싸움이 發端이 되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겐큐 2年(1205年) (閏)7月, 누나 마사코와 協力하여 有力 고케닌이자 미우라 요시무라 (三浦義村) 等의 協力을 얻어(미우라 요시무라는 外家쪽 從兄弟였다) 아버지 도키馬社를 이즈로 追放시켜버리고, 아버지를 代身해 萬도코로(政所)의 長官이 되었다. [2] . 무사시 國의 有力者였던 하타케야마 시게타多義 除去와 함께 요시토키가 信賴하던 아우 도키後嗣(時房)가 무사시의 새로운 슈고(守護) 高쿠시(國司) 가 되었다. 히라가 圖謀마사(平賀朝雅)가 誅殺된 뒤에는 意識에 있어서의 序列은 壯年인데다 겐지 몬後打쓰路서 고케닌의 首座(首座)에 있었던 히라가 집안의 오우치 고레요시(大?惟義)를 제치고 요시토키가 第1位를 占하게 되었다. 요시토키는 늘 마사코와 사네토모를 表面에 내세우고, 萬도코로벳토 오에 히로모토(大江?元)나 요리토모의 流配 時節부터 요리토모를 섬긴 謹愼(近臣)이었던 아다치 가게모리(安達景盛) 等과 提携해 幕府 政治의 最高 責任者로서 權力을 掌握했다.

도키馬社의 性急한 權力 獨占이 많은 反撥을 招來했던 것과는 다르게 요시토키는 比較的 柔軟한 姿勢를 보였는데, 도키마사 한 사람의 署名이 들어간 賀知章(下知狀)이라는 文書 形式을 없애고 고케닌들의 要望에 應하여 「요리토모 공(公) 以來 下賜된 影池는 待罪(大罪)를 犯한 境遇가 아닌 한 一切 沒收하지 않는다」는 大原則을 分明히 했다. 한便으로 好調 싯켄(北條執?) 體制에 障礙가 되는 有力 고케닌에 對한 抑壓策을 펼쳐나갔는데, 도키마사 失脚 直後인 8月에는 시모쓰케국 의 고케닌 우쓰노미야 料理쓰나 (宇都宮?綱)에게 母斑 嫌疑를 씌워 슈고(守護) 오야마 圖謀마사(小山朝政)에게 追討를 命했고, 料理쓰나는 事實無根이라며 出家하여 숨어버렸다. 죠겐 (承元) 3年( 1209年 )에는 여러 拘泥의 슈고닌(守護人)들의 '職務 怠慢'을 問題삼아 旣存의 終身在職을 定期的으로 交代하도록 하는 것으로 바꾸려 했지만 豪族 出身의 고케닌들의 膈한 反對를 사서 斷念하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에는 年來 노토(??) 가운데 功이 있는 者(實狀은 이즈에서부터 요리토모를 섬겨온 好調氏 집안의 家神들)를 사무라이(侍)에 準하게 하려다 다시 쇼군 사네토모의 反撥로 斷念하였다. 이 무렵부터 요시토키의 地位는 싯켄 (執?)이라 불리게 되었고, 漸次 獨裁的 政治를 展開하는 싯켄 政治(執?政治)의 基礎를 쌓아 나간다. 그 뒤에도 有力 無事, 고케닌들에 對한 好調氏의 攻勢는 繼續되었고 幕府가 세워진 以來의 重鎭으로서 사무라이도코로 (侍所)의 벳土(別?)였던 와다 요시모리(和田義盛)를 겐抛 (建保) 元年( 1213年 ) 2月에 쳐서 滅하고(와다 캇센和田合?) 요시모리 代身 요시토키가 旣存의 萬도코로벳토에 사무라이도코로벳土까지 겸하게 됨으로써 幕府의 가장 重要한 政務機關을 獨占하게 되면서, 幕府 指導者로서의 好調氏 집안의 地位는 確實하게 決定되었다. 와다캇센이 있고 3年이 지난 겐抛 4年( 1216年 )에는 種4爲하 官位가 요시토키에게 내려지고, 이듬해 5月에는 禹쿄多以後(右京大夫), 12月에는 무쓰老카미 (陸?守)를 겸하여 아버지의 棺위를 훨씬 넘었다.

私生活의 面에서 히키 요시카즈의 便 直後에 아내 히메노 마에와 헤어지고, 이가 夫人(伊賀の方)를 正室로 맞아들여서 겐큐 2年( 1205年 ), 다섯째 아들 馬社무라(政村)를 얻었다. 馬社무라는 겐抛 元年(1213年) 12月, 미우라 요시무라(三浦義村)를 에보시오야(烏帽子親)로서 元服(元服)을 行하고, 요시토키에게 「寵愛하는 어린 그대」(鍾愛の若君)라 불렸다. 反對로 겐랴쿠 (建曆) 2年( 1212年 ) 5月, 히메노 碼에 所生의 次男 도모토키(朝時)가 쇼군 사네토모의 노여움을 사자 義絶하고는 스루가 (駿河)에 蟄居시켜 버렸다.

사네토모 暗殺 [ 編輯 ]

兆큐 (承久) 元年( 1219年 ) 正月 27日, 쓰루가오카 하치만區 (鶴岡八幡宮)에서 사네토모의 右大臣 (右大臣) 任命을 神에게 賀禮하는 意識을 올릴 豫定이었던 날, 쇼군 사네토모가 舊敎에게 암살당하면서 겐지의 正統은 끊어지고 만다. 이 날의 賀禮式에서 當初 사네토모 옆에서 警護를 맡을 豫定이었던 요시토키는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當日날 갑자기 '컨디션 不良'을 理由로 미나모토盧 나카아키라(源仲章)로 交替하고는 自身의 집에 머물렀는데, 結果的으로 미나모토노 나카아키라는 사네토모와 함께 暗殺되고 結果的으로 요시토키는 목숨을 保全할 수 있었다. [3]

이 일이나 사네토모 暗殺 事件 뒤의 收拾策 等에서, 사네토모 暗殺은 요시토키가 背後에서 操縱한 것이란 疑惑도 있지만, 好調 집안에 對抗하던 미우라氏 집안의 요시무라 等에게도 사네토모를 暗殺할 動機가 있었다는 點에서 眞相은 確實하지 않다. 또한 『 구칸쇼 』(愚管抄)에 보면 사네토모는 요시토키에게 命하여 타치(太刀)를 가지고 中門(中門)에 머무르게 하였고 요시토키는 意識이 行해진 本宮(本宮)까지 同行하지 않았을 뿐 自宅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고 적고 있다.

事件이 일어나기 前年부터 이미, 子息이 없었던 사네토모의 後嗣로서 高토바 狀況 (後鳥羽上皇)의 아들을 쇼군으로 하여 가마쿠라로 보내는 問題가 檢討되고 있었는데, 마사코가 上京하여 후지와라노 겐詩(藤原兼子)와도 이야기를 進行시키고 있었다. 쇼군 사네토모가 後嗣 없이 죽고 겐지 쇼군의 正統이 끊어진 일은 幕府 內部의 動搖를 불러 일으켰고, 요시토키는 쇼군의 地位를 노릴 可能性이 있는 겐지 出身의 候補를 一掃하기 위해, 刺客을 시켜 아노 도키모토(阿野時元)와 젠校(禪曉)를 暗殺해버렸다.

사네토모가 暗殺된 뒤 幕府는 새로운 쇼군으로 親王(親王) 卽 王子를 임명하여 가마쿠라로 보내줄 것을 朝廷에 要請했지만, 高토바 狀況은 이를 拒否하면서 王族을 東쪽에 쇼군으로서 赴任시키는 條件으로 狀況의 愛妾이 所有한 領地에는 지토 (地頭)를 罷免할 것을 要求했고 幕府側도 이를 拒否하였다. 요시토키의 아우 도키後嗣(時房)가 1千 基(騎)를 거느리고 上京하여 交涉에 나섰지만 兩側 모두의 强勁한 態度만 確認했을 뿐 滿足할 만한 成果는 없었다. 結局 幕府는 '王族 쇼군' 代身 요리토모의 먼 親戚이라는 미토라( 救助 料理쓰네 )를 4代 쇼군으로 맞아들였다. 그때 料理쓰네는 원복도 하지 않은, 한 살 남짓에 不過한 아기였기에 미처 세이이타이쇼군 (征夷大將軍)으로 任命되지는 못했다(실제 쇼군 보임은 7年 뒤). 때문에 마사코가 '比丘尼 쇼군'으로서 料理쓰네의 後見이 되어, '가마쿠라逃奴'(鎌倉殿)의 빈 地位를 代行하고, 요시토키가 이를 補佐하여 實務를 補佐하는 形態로서 實權을 掌握한다는 싯켄 政治(執權政治)를 確立하였다.

高토바 狀況의 인세이 (院政)가 이루어지던 調整, 그리고 好調氏가 掌握한 幕府의 사이는 사네토모 事後 半年 뒤 쇼군 後繼 問題를 놓고 그 對立이 尖銳해지게 됐다. 요시토키는 兆큐 2年( 1220年 ) 2月에 義兄(義兄) 이가 미쓰스에(伊賀光季)를 교토 슈고(京都守護)로 派遣했고, 사위 吳에 치카히로(大江親?)도 교토 슈고로서 上京하게 했다.

兆큐의 난 [ 編輯 ]

한便 着着 軍備를 모으고 있었던 高토바 狀況은 兆큐 3年( 1221年 ) 5月 14日에 야부사메 (流鏑馬)를 핑계로 여러 拘泥(國)의 쓰와모노(兵)를 召集하고, 이가 미쓰스에를 비롯한 인세이 內部의 親가마쿠라파를 肅淸하고 幕府 打倒의 軍士를 일으킨다. 15日에는 요시토키 追討를 命하는 선지(宣旨)가 全國에 宣布되고, 拘泥의 슈고닌(守護人) · 지토(地頭)들에게는 速히 狀況에게 달려와 參與하라는 命이 내려졌다. 그때까지 교토 調整이나 天皇의 權威란 如前히 巨大한 것이었고, 그 天皇이 幕府를 打倒하라는 命을 武士들에게 내렸다는 事實은 幕府로서도 그저 쉽게 생각해 넘길 일만이 아니었다. 요시토키는 生涯 最大의 難局에 直面하였다.

幕府가 '組積'(朝敵)李 되었다는 것에 고케닌들은 두려워하고 動搖했으나, 그 幕府의 開創者人 요리토모가 生前 고케닌들에게 주었던 恩惠를 상기시키는 '比丘尼 쇼군' 마사코의 呼訴 앞에서 團結하였다고 한다. 幕府 指導部에서 열린 軍 會議에서 愼重論이 나오는 渦中에 “防禦는 도고쿠 고케닌들의 童謠만 부를 뿐”이라는 오에 히로모토 (大江?元)의 提議가 採擇되어 교토로의 出廷이 決定된다. 요시토키는 嫡男 야스토키를 總大將으로서 도카이道 (東海道), 次男 도모토키, 아우 도키後嗣를 大將軍으로 삼아 호쿠리쿠 (北陸) · 島山 (東山)으로 보내 3個 道(道)에서 軍勢를 이끌고 교토 (京都)로 가게 했다. 幕府 指揮部의 積極的인 作戰과 攻勢를 본 도고쿠 武士들은 잇따라 幕府의 動員令에 應하여 最終的으로는 19萬의 大軍이 모여 교토로 進擊해 올라갔다. 途中에 시나노 (信濃)에서 無事 理致카와氏(市河氏) 집안이 호쿠리쿠度의 大將軍 圖謀토키의 到着도 기다리지 않고 積極的으로 進軍에 나섰고, 에치高 (越後) · 엣츄 (越中) 境界에 이르렀을 때는 주오野시라즈(親不知) 附近을 突破해 前進하자 요시토키는 卽時 그 功을 褒賞해 “한 名도 남김없이 殲滅하라. 사냥하듯이 잡아들여라. 敵을 掃蕩해도 功을 세우기 急하여 교토로 쳐올라 가려 하지는 마라”는 意氣가 가득하면서도 愼重한 司令(司令)을 發했다.

5月 21日에 가마쿠라를 出發한 幕府軍은 起訴(木?) 江, 우지價와 (宇治川)의 교토側 防禦線을 突破하여 6月 15日 교토를 制壓했다. 요시토키 追討의 선지가 내려지고 한 달 만에 戰爭은 幕府君의 完勝으로 끝났다.

敗走한 高토바 狀況은 幕府 討伐 計劃이란 事實 側近들의 꾐에 속아 내린 것이었다고 辨明했지만 幕府는 變亂의 主要 主謀者였던 高토바 狀況 以下에 對한 强勁한 態度를 取했고 高토바 狀況 뿐 아니라 쓰値미카도 (土御門) ? 준토쿠 (順德) 두 狀況 을 섬으로 流配시키고, 高토바 狀況의 아들들까지도 類型에 處했다. 在位 70日 남짓의 天皇( 州쿄 天皇 )마저 廢位되고 새로 고호리카와 天皇 (後堀河天皇)이 세워졌으며, 사이온지 긴쓰네(西園寺公?) 等의 親幕剖破 구게는 解任되어 朝廷의 政治 構圖까지 再編되었다. 狀況側에 加擔한 武士들에 對한 處分은 大部分 斬刑(斬刑)이었고, 貴族들도 處刑되거나 流配되고 또 官職을 잃은 者들이 大部分이었다. 高토바 狀況의 莫大한 壯元 (?園)도 沒收되어 새로운 天皇의 아버지인 高다카쿠라인(後高倉院)에게 바쳐졌으나 最終 支配權은 幕府가 掌握했다. 구게政權의 監視를 맡을 出船 機關으로 로쿠하라 單다이 (六波羅探題)가 새로이 교토에 세워졌다. 교토側의 貴族과 武士들이 所有한 領地 3萬餘 곳이 모조리 幕府에 沒收되어 도고쿠 武士들에게 새롭게 銀賞으로 分配되고 그곳에는 지토가 任命되었다.

이 勝利로 교토側에 加擔한 옛 쇼군 獨裁 時代의 勢力은 一掃되고, 싯켄 요시토키의 幕府內 最高 權力者로서의 地位가 確定되었을 뿐 아니라 요시토키가 主導하는 가마쿠라 政權이 교토의 구게 政權을 누르고 支配的인 立場에 서는 等 새로운 政治秩序로 日本을 再編하는데 成功하였다. 이로써 막 새롭게 展開된 싯켄 政治는 全國的 政權으로서의 새로운 方向을 갖게 된다.

軍키모노가타리 『兆큐機』(承久記)에 보면 勝戰 消息을 接한 요시토키는 “ 이제 나에게는 어떤 未練도 없다. 이 요시토키도 果報(果報)만큼은 王의 果報에 못지않았지만 그 過去의 步行(報行)李 現世에서 報答받기에는 조금 不足하였기에 微賤한 身分으로 태어났던 것일 뿐이다 ”라고 公公然하게 말했다고 한다.

幕府가 編纂한 『아즈마카가미』에는 이러한 技術이 없고 幕府軍이 가마쿠라를 出發한 直後인 6月 8日에 요시토키의 邸宅에 벼락이 떨어졌는데 이를 두려워한 요시토키가 오에 히로모토에게 “調整을 무너뜨리기 위해 上京함으로써 이러한 怪異(怪異)가 일어났다. 幕府의 運命도 여기까지인가 보다.” 라고 沈鬱해 했는데, 히로모토는 "軍神(君臣)의 運命이란 天地(天地)가 定하는 것인데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일찍이 勝利를 얻은 오슈 캇센 때에도 벼락은 쳤었습니다. 벼락이란 幕府에 있어 吉兆인 것입니다." 라 對答하여 挫折해 있던 요시토키를 달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末年 [ 編輯 ]

이듬해에 요시토키는 무쓰老카미와 사쿄노곤노다이후를 모두 辭職하였다. 그리고 3年 뒤인 겐닌 元年( 1224年 ) 6月 13日에 요시토키는 62歲로 急死하였다. 『아즈마카가미』는 忠心(衝心), 卽 脚氣病이 原因이었다고 했지만, 偉大한 幕府 指導者의 急逝에 對한 여러 臆測을 불러일으킨 나머지, 近習(近習) 高사무라이(小侍)에게 찔려 죽었다는 異說(『號레키칸키』), 後妻 이家奴 伽陀에게 毒殺당한 것이라는 所聞도 나돌았다. [4]

요시토키의 遺骸는 只今의 가나가와 縣 가마쿠라 詩의 市라하타 神社(白旗神社)에 있었다는 法華堂(法華堂) 東쪽 山에 묻혔다고 傳하나 現在는 그 位置를 正確히 알 수 없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무덤의 東쪽 山에 好調 요시토키의 浮屠塔으로 여겨지는 것이 남아있지만 現在는 그곳에 들어가 보기도 어렵게 되었다. 요시토키의 別稱이기도 한 度쿠소 (得宗) 는 以後 好調 집안의 嫡流(嫡流)를 指稱하는 單語가 되었다. 도쿠所의 語源은 요시토키의 법명(法名)에서 따온 것이라고도 하나 確實한 것은 아니다.

子女 [ 編輯 ]

요시토키의 子女들은 도쿠소케라 불리게 된 야스토키의 後孫 말고도 여러 分派로 갈라졌다.

  • 어머니: 아와노쓰보네(阿波局)
  • 어머니: 히메노마에 (姬の前)
    • 도모토키(朝時) - 나고시類(名越流) 好調氏
    • 詩게토키(重時) - 고쿠라쿠支流(極樂寺流) 好調氏
    • 다케逃奴 (竹殿) - 吳에 치카히로(大江親廣)의 아내로 뒤에 구게 쓰値미카도 社다미치(土御門定通)의 側室이 됨.
  • 어머니: 히타치 理事 氏(常陸伊佐氏)의 理事 圖謀마사(伊佐朝政)의 딸
    • 아리토키(有時) - 이쿠類(伊具流) 好調氏
  • 어머니: 이가 夫人(伊賀の方)
    • 馬社무라(政村) - 馬社무라類(政村流) 好調氏
    • 社네야스(實泰) - 가나자와類(金澤流) 好調氏
    • 도키히社(時尙) - 무쓰노 시치로(陸奧七郞)이라 불렸다. 生沒年은 未詳.
    • 이치조 社네마사(一條實雅)의 아내

略歷 [ 編輯 ]

日本 年號 書記 날짜
( 陰曆 )
內容
겐큐 元年 1204年 3月 6日 官位가 種5威嚇로 오르고 사가미老카미 (相模守)로 任官.
겐큐 元年 1204年 尹7月 19日 가마쿠라 幕府 第2代 싯켄으로 就任.
죠겐 元年 1207年 1月 5日 官位가 種5位相이 됨(사가미노카미는 그대로).
겐랴쿠 3年 1213年 2月 27日 情5위하에 오름(사가미노카미는 그대로).
겐抛 4年 1216年 1月 13日 情4위하에 오름(사가미노카미는 그대로).
겐抛 5年 1217年 1月 18日 禹쿄勞困노다以後(右京權大夫)로 옮김.
겐抛 5年 1217年 12月 13日 무쓰老카미를 兼任.
죠오 (貞應) 元年 1222年 8月 16日 무쓰老카미 辭任.
죠오 元年 1222年 10月 16日 禹쿄勞困노다以後 辭任.

評價 [ 編輯 ]

好調 氏의 後裔들은 組큐의 난 勝利 等의 實績을 들어 요시토키를 事實上 그들의 始祖로 받들었다. [5] 《古今저文集》(古今著聞集)에는 어떤 사람이 꿈을 통해 요시토키가 다케노우치노 스쿠네 (武?宿?)가 前生恨 모습임을 알게 되었다, 라는 傳說이 收錄되어 있다. 또한 다이라노 마사쓰라 (平政連)가 好調 社多토키 (北?貞時)를 깨우치기 위해 올린 諫言人 『다이라노 마사쓰라 乾草』(平政連諫草)에도 같은 技術이 있다. 이러한 情報로 보아 가마쿠라 時代 末期에는 前生 傳說이 어느 程度 알려져 있었으며 또한 《古今저文集》 成立 連帶도 考慮할 때 요시토키가 죽지 않았을 무렵부터 그 이야기의 端初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推測도 있다. [6]

또한 가마쿠라 幕府 中期의 僧侶 니치렌 (日蓮)은 요시토키를 요리토모와 더불어 「불망어」(不妄語) 卽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으로 「이름은 臣下라 하지만 그 몸은 大王」이라는 至極히 높은 評價를 하고 있다. [7] 무로마치 時代 (室町時代)에도 아시카가 打카우지 (足利尊氏)가 制定한 겐무 시키모쿠 (建武式目)에 요시토키 ? 야스토키의 「行長」(行?)은 「近代의 스승」(近代の師) [8] 이라 記錄되어 있고, 가마쿠라 幕府가 滅亡한 뒤인 南北朝 時代 南朝側의 구게 (公家) 기타바타케 지카後嗣 (北?親房)가 著述한 《 新皇正統機 》(神皇正統記)에도 “요시토키는 人望을 등지는 일이 없었다” [9] 고 요시토키를 肯定的으로 評價하였다.

그러나 時代가 내려와 메이지 時代 (明治時代)에 이르러 兆큐의 난 (承久の?)에서 막父側 總大將으로써 난 以後에 高토바 狀況 等 세 사람의 狀況 (上皇)을 流杯하고 街네나리 親王(?成親王, 救助 廢帝九??帝로 불렸으며 메이지 時代에 이르러서 州쿄 天皇 으로 諡號가 주어짐 )을 王位에서 끌어내린 點을 들어 존왕(尊王)의 觀點에서 同情의 餘地가 없는 疫神(逆臣)이자 不遜한 者로써 '필주'(筆誅) 卽 글로써 處罰한다라는 名目으로 그에 對한 숱한 批判들이 일었다. [10]

이미 에도 時代 (江?時代)부터 儒敎 ( 性理學 )의 影響으로 主君에 對한 忠誠을 武士道 (武士道)라 보는 認識이 생겨나면서 겐지 쇼군을 멸망시키거나 或은 쇼군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實權을 빼앗은 點을 들어 불충한 臣下 ? 陰險한 策謀價로써 그려지는 [11] 等 그 端初는 보이고 있었다. 儒學者 아라이 하쿠세키 (新井白石)는 그의 著書 《 毒蛇輿論 》(讀史餘論)에서 " 日本 歷史를 통틀어 요시토키만한 小人輩度 없다 "고 至極히 否定的으로 評價하면서, 이런 人間이 자리保全해 正常的으로 죽었을 理가 없다며 '順坦하게 극락왕생하였다'라는 等의 記錄은 全部 修飾語이고 《號랴쿠칸키》의 內容처럼 暗殺된 것이 틀림없다고 主張하였다(다만 그러면서 "天下의 武士들이 요시토키를 尊敬한 것은 그가 兆큐의 난 後에 생겨난 많은 主人 잃은 靈芝나 權利들을 모두 專攻이 있는 武士들에게 나누어 주고 요시토키 自身은 한 곳도 갖지 않았다는 單 한 가지 事實에 起因한다"고 어느 程度 요시토키를 認定하는 듯한 評도 남겼다).

애初에 好調 氏 歷代 堂主는 요시토키의 敵南人 야스토키나 曾孫 도키料理 (時?), 玄孫인 도키無네 (時宗)를 除外하면 大部分이 陰謀가 ? 惡役 ? 暴君 ? 어리석은 支配者로 되어 있는데, 요시토키는 그 代表格으로써 늘 이름이 오르내렸다. 이는 겐지 쇼군 暗殺에 그치지 않고 親아버지 도키마사까지 내쫓고 싯켄이 되는 等의 行動에 對한 '불의'(不義)라는 道德的 評價를 통해 强調되었다. 實際로 關聯 事件들이 最終的으로는 요시토키가 利得을 보는 것으로 歸結되었으므로, 正말 그가 關與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事件도 적지는 않다. [12]

日本의 史學者 호소카와 시게오 (細川重男)는 「요시토키의 生涯는 밀어닥치는 災難에 거듭 휩쓸리는 一生이었고, 그 渦中에 自身의 몸과 親族을 지키기 위해 戰爭을 거듭한 結果 最高 權力者가 되어 버렸다.」며 「요리토모의 거病이 없었다면 一介 도고쿠 無事로써 一生을 마쳤을 것이다」라고 評하였다. [13]

各州 [ 編輯 ]

  1. 『私奴本(佐野本) 好調啓導(北條系圖)』
  2. 『아즈마카가미』는 요시토키가 이때 萬도코로벳토(政所別?)?싯켄에 就任했다고 하지만, 오카다 세이이치(岡田?一)는 兆겐(承元) 3年 12月 以前의 萬도코로 文書에 萬도코로벳토 卽 싯켄으로서의 요시토키의 書板(署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點을 指摘하고 있다. 겐큐 2年의 싯켄 就任記事는 『아즈마카가미』 編者의 脚色으로 實際로는 兆겐 3年에야 싯켄이 되었다는 것이다.
  3. 好調氏 도쿠소케(得宗家)의 權威를 讚揚하고 稱頌하는 立場에서 編纂된 『아즈마카가미』에서 술新(戌神)을 섬겨서 事件 1年 前에 野쿠시度(藥師堂)를 세워 約思想을 安置하고 供養한 功德에 對한 加護로서 요시토키가 無事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는데, 한便으로 『아즈마카가미』는 암살당한 料理理에 ? 사네토모 ? 잇벤(一幡)의 技士에 事件이 일어나기 前에 있었던 不吉한 前兆를 다룬 에피소드가 더해져 있다.
  4. 兆큐의 邊의 교토側 主謀者의 한 사람이었던 손쵸(尊長)는 도망쳤다가 요시토키가 죽고 3年만에 逮捕되어 로쿠하라 單다이에서 審問받을 때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요시토키의 아내가 요시토키에게 먹였던 그 藥으로 어서 나를 죽여다오」 라고 소리쳐 武士들을 떨게 했다고, 후지와라노 사다이에 (藤原定家)는 自身의 日記 《메이게쓰기》에 적고 있다. 손쵸는 요시토키 死後의 後繼者 問題 이가씨(伊賀氏)의 邊에서 쇼군 候補로까지 擧論되었던 이치조 社네마사(一條?雅)의 兄이었다.
  5. ?座勇一 2021 , 321쪽.
  6. 細川 , 83?85쪽.
  7. 山本みなみ 2020 , 12쪽.
  8. 建武式目??
  9. 神皇正統記
  10. 『北?義時』吉川弘文館。序章1頁 - 2頁。
  11. 『北?義時』吉川弘文館。序章3頁。
  12. 『北?義時』吉川弘文館。245頁 - 246頁。
  13. 細川 , 95쪽.
前任
好調 도키마사
第2代 가마쿠라 幕府 싯켄
1205年 ~ 1224年
後任
好調 야스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