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팔용
(崔八鎔,
1891年
7月 13日
~
1922年
9月 14日
)은
韓國
의 獨立運動家이다. 本貫은
全州
(全州). 雅號는 黨남(塘南).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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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鏡南道
弘遠
出生이다. 그가 나중에 雅號를 따온 黨남숙(塘南塾)이라는 書堂에서 漢學을 배운 뒤
오성中學校
를 卒業하고
日本
으로 留學했다.
와세다 大學校
에서 受學하였으며, 韓人 留學生學友會에 加入하여 機關紙 《
學之光
》 編輯局長으로 일했다.
와세다 大學에 在學 中이던
1919年
,
도쿄
에서의
2·8 獨立宣言
에 實行委員 11人이子 9人 代表 中 한 사람으로 參加했다. 그는 처음부터 主導的으로 이 運動을 企劃했으며, 東京과 서울에서 同時에 獨立運動을 일으키기 위하여 와世代大學의
송계백
을 서울로 보냈다. 行事 當日에도
조선청년독립단
의 結成을 宣布했하였다.
그는 逮捕되어 禁錮 9個月型을 宣告받고 服役했다. 그러나 出獄 直前
송계백
이 獄死하는 等 이들이 갇혔던 스가모刑務所(
日本語
:
巢鴨刑務所
)의 受刑 生活은 苛酷했던 것으로 推定된다.
최팔용
도 獄中 後遺症을 앓으며 健康이 急激히 衰弱해져, 出獄 後 2年 餘가 지난
1922年
32歲의 나이로
京城府
에서 死亡했다.
1962年
建國訓長
독립장이 追敍되었다.
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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