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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要시즈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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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要시즈美

아시카가 要시즈美 ( 日本語 : 足利義澄 , 1481年 ~ 1511年 )은 무로마치 幕府 의 第 11代 쇼군 (在位: 1495年 ~ 1508年 )이다.

父親은 第 8代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 의 異服兄인 호리고에 驅步 아시카가 마사토모 (足利政知)이다. 本來 出家하여 세이코 (?晃)라는 法名을 얻고, 還屬하여 요시토 (義遐), 요시타카 (義高), 最終的으로는 要시즈美 로 改名하였다. 情實은 히노 도미코 (日野富子)의 조카딸인 히노 아코 (日野阿子).

메이오 2年( 1493年 )에 호소카와 마사모토 (細川政元)가 第 10代 쇼군 아시카가 요시키 (足利義材, 後의 요시打네)를 追放한 메이오 政變 으로 第 11代 쇼군으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에이쇼 5年( 1508年 )에 스誤 의 有力 슈고 다이묘 오우치 요시오키 (大?義興)가 前任 쇼군 요시打네를 擁立하여 軍을 이끌고 上洛瑕疵, 쇼군 職을 빼앗기고 오미 로 亡命하여 復位되지 못한 채로 死亡하였다.

生涯 [ 編輯 ]

分메이 12年( 1481年 ) 12月 15日, 호리고에 驅步 아시카가 마사토毛의 子息으로 태어났다. 當時, 마사모토의 嫡男으로 異服兄인 아시카가 自車마루 (足利茶?丸)가 호리고에 驅步 後繼者로 指名되어 있었기 때문에, 分메이 17年( 1486年 ) 1月, 叔父 요시마사의 뜻으로 덴류地 (天?寺) 가겐人(香?院)의 後繼者로 指名되었고, 分메이 19年( 1487年 )에 上洛하여 가겐人을 繼承, 세이코라는 法名을 얻고 出嫁하였다. 第 9代 쇼군이자 요시마사의 아들인 아시카가 요시히사 (足利義?)가 死亡하고 연이어 요시마사度 死亡하여 무로마치 幕府의 首長인 地位가 空席이 되자 세이코度 後繼者 候補로 擧論되었으나, 이 때는 요시마사의 未亡人 히노 도미코 의 支持를 받은 아시카가 요시미 (足利義視)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키 가 新任 쇼군으로 就任하게 되었다. 엔吐쿠 2年( 1490年 ), 도미코는 세이코에게 自身과 前任 쇼군 요시히사가 살던 高카와 邸宅(小川殿)을 물려주려고 하였는데, 쇼군 요시키의 父親 요시미가 이를 세이코를 쇼군으로 卽位시키려는 準備로 誤解하고 高카와 邸宅을 破壞해버렸다. 이를 契機로 요시키와 도미코의 關係가 惡化되기 始作하였다.

그 뒤, 메이오 2年( 1493年 )에 間레이 호소카와 마사모토 와 히노 도미코, 二世 社다무네 (伊勢貞宗) 메이오 政變 을 일으켜 第 10代 쇼군 요시키를 追放하고 요시즈미를 쇼군으로 擁立하였다. 要시즈미는 叔父 요시마사의 兩者로서 第 11代 쇼군으로 就任하였다. 그러나, 實權은 마사모토와 도미코, 사다무네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런데, 도미코가 死亡한 뒤 成長限 要시즈미는 스스로 政務를 보려고 하여 마사모토와 對立, 分키 2年( 1502年 ) 2月에 마사모토가 間레이 職 辭任 意思를 밝히고 단바國 으로 落鄕하자 要시즈미는 이를 挽留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그러자, 같은 해 8月에 도리어 요시즈미가 교토 이와쿠라 (岩倉)의 긴류지 (金龍寺)에 틀어박혔다. 호소카와 마사모토와 二世 사다무네가 自身의 復歸를 歎願하자 要시즈미는 側近 다케다 모토노部 (武田元信)의 小盤슈 (相伴衆) 登用과 교토 에 머무르고 있던 요시키의 異腹同生 騎芻 (義忠)의 處刑을 要求하고 이를 認定받았다.

그러나, 騎芻의 殺害로 마사모토는 요시즈미를 代身할 쇼군 候補를 잃어버리게 되어 요시즈미를 廢位할 수 없게 되어, 以後 當分間 요시즈미와 마사모토는 政治的으로 對立하면서도 協力關係를 維持하였다. 또한, 에이쇼 元年( 1504年 )에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가신 셋쓰國 슈고다이 야쿠시지 모토카즈 (?師寺元一)를 更迭하려고 했을 때, 요시즈미가 마사모토에게 解任 中止를 命했다.

에이쇼 4年( 1507年 )에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暗殺되고 호소카와 家門 (細川氏) 本家의 家督을 둘러싼 內紛이 發生하자( 에이쇼의 錯亂 ), 그 이듬해 4月 前任 쇼군 요시키를 擁立한 오우치 요시오키 가 軍을 이끌고 上洛하자 要시즈미는 롯카쿠 다카料理 (六角高?)를 依支하여 오미로 달아났다. 그해 7月, 要시즈미는 쇼군 職에서 廢位되고, 要視키가 요시打네로 改名하고 쇼군으로 復位되었다.

그 後, 要시즈미는 勢力을 되찾고자 호소카와 스美貌土 (細川澄元])와 미요시 유키나가 (三好之長)· 미요시 나街히데 (三好長秀) 父子에게 교토로 侵攻을 命하였으나, 호소카와 다카쿠니 (細川高?)와 오우치 요시오키의 聯合軍에 敗退하였다. 또한, 요시打네의 暗殺도 꾀하였으나 이도 失敗하였다. 에이쇼 7年( 1510年 )에는 요시打네의 命을 받은 다카쿠니·요시오키가 요시즈미가 머물고 있는 오미로 侵攻해오자, 要시즈미는 오미 高쿠진 을 糾合하여 勝利를 거두었다. 나아가 要시즈미는 奔告 오우치 지카하루 (大友親治)와 하리마 아카마쓰 요시무라 (赤松義村) 等에게 援助를 要請하는 密書를 보내는 等 쇼軍職 復位를 위하여 奮鬪하였다.

그러나, 에이쇼 8年 8月 14日( 1511年 9月 6日 ), 要시즈미는 요시打네·다카쿠니·요시오키와의 決戰( 後네오카야마 戰鬪 (船岡山の?い)) 直後에 오미에서 病死하였다. 享年 32歲.

요시즈미의 헨키 (偏諱)를 받은 사람 [ 編輯 ]

前任
아시카가 요시키
第11代 무로마치 幕府 쇼군
1428年 ~ 1441年
後任
아시카가 요시打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