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歷史博物館長(최병구)은 29日 2023年 서울未來遺産 記錄 事業의 結果를 묶은 調査報告書 『서울의 印章舖』를 發刊했다고 밝혔다. 서울未來遺産記錄 事業은 2020年부터 近現代 市民들의 生活史를 主題別로 整理하는 作業이다. 이番에 發刊된 『서울의 印章舖』는 네 番째 作業이며 그 前에 發刊된 報告書는 ?낙원떡집 ?서울의 대장間 ?서울의 이용원이었다. 서울驛沙鉢물館에서 作成한 報道資料와 參考이미지를 바탕으로 하되, 東亞日報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寫眞을 追加해 近現代史의 한 斷面을 ‘圖章 가게’라는 키워드로 살펴보았다. ▶印章舖는 말 그대로 印章을 製作하는 가게이다. 只今은 ‘컴퓨터 圖章’이라고 불리는 機械 조각 印章이 登場했지만 그 前에는 사람이 直接 手作業으로 깍아서 圖章을 만들었었는데 그 作業을 했던 가게에 對한 記錄이다. ▶朝鮮時代 韓國의 印章은 크게 璽寶(璽寶), 관인(官印), 死因(私印)으로 區分된다. 個人이 使用하던 人丈人 死因(私印)은 書畫(書?)의 樂觀(落款)이나 書籍의 藏書印(藏書印) 程度에 그쳤다.인장이 普遍的으로 使用된 것은 日帝强占期 以後의 일이다. 朝鮮總督府가 朝鮮에서 日本人의 經濟活動을 合法的으로 保護하고, 朝鮮人들의 經濟活動을 統制하기 위한 手段으로 1914年에 「人間證明規則」을 頒布하며 强制 導入됐다. 國家次元에서 印鑑 使用을 强制하면서 印鑑 圖章을 만드는 가게도 成業하게 된 것이다. ▶ 1974年에는 「國家技術資格法」의 施行으로 引張工藝機能社(1級· 級·技能士補)資格試驗 制度가 導入됐다. 하지만 凝視 需要 減少로 인해 2004年에 廢止됐다. 2000年代 들어 컴퓨터 印章 製作과 署名 去來價 一般化되고, 公認認證書 導入 等을 거치며 印章業은 줄곧 斜陽産業의 길을 걷고 있다. 한便, 2000年代 以後 印章은 文化商品으로서의 價値를 擴張하고 있다. ‘胎줄 圖章’이나 ‘水制 圖章’이라 불리는 캘리그래피 디자인 한글 印章이 代表的이다.▶ 이番 서울역사박물관의 調査 結果, 서울에서 1950年代부터 活動해 온 오래된 印章舖 5곳과 印章 名將들이 새삼 照明을 받았다. 朴人當(博印堂), 거인당(巨印堂), 玉璽當(玉璽堂),餘原電人幇(如原篆印房), 인예랑(印藝廊) 等 5곳이다. ▶報告書는 서울 印章舖의 特性으로 첫째, 都市化 過程에서 손재주 있는 地方 사람이 서울에 定着하면서 擇한 業種 中에 하나라고 밝히고 있다. 6.25 戰爭이 끝나고 生計 手段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모였는데 이 中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 ‘社長님’이 될 수 있는 가장 쉬운 業種이 印章業이었던 것이다. 冊床만 있으면 創業할 수 있는 業種이기 때문이다. 이番에 調査한 서울의 引上抛 5곳 모두 1950年代 以後 上京한 志望民이 運營한다는 共通點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漢字를 工夫했고 손재주를 武器로 서울에 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 “서울에서 印章舖 하는 사람들은 5·16 以後에 다 地方에서 온 거예요. 그때부터 서울에 會社가 많이 생기고 일이 많았으니까요. 반도호텔 近方이 다 會社였어요. 옛날에는 官公署에서 文書를 處理하는 데 使用하는 印章이 300~400種에 달했어요. 그래서 技術을 가진 사람들이 좋았죠. 印章을 다 손으로 새길 때니까 印刷 技術者보다 印章 技術者가 훨씬 벌이가 좋았어요.” 유태흥(남, 1941年生, 거인당) 인터뷰.▶서울 印章舖의 두 番째 特性으로는 類似 業種과 空間을 共有한다는 點이다. 서울의 높은 賃貸料를 堪當하며 내 店鋪를 마련하기 어려운 狀況에서 印章舖는 다른 業種과 空間을 共有하는 方式을 積極的으로 活用해왔다. 引張 作業에는 넓은 空間이 必要하지 않기 때문에 可能했는 데 印章業에서는 이를 ‘겹살이’라 부른다. 特히 類似 業種인 印刷所, 文具店 等의 한쪽 空間을 利用해 營業하는 境遇가 많았다. 都心에 있는 大型 文具店이나 창신동과 인현동의 印刷所에는 ‘人帳簿’가 있었다.“1964년에 乙支路5街에 있는 印刷 가게 門 앞에 冊床 하나 빌려서 獨立을 했어요.”박호영(남, 1938年生, 朴人當) 인터뷰“가게에 冊床 하나씩 빌려주고 자릿貰를 받았어요. 우리 집에 많을 때는 彫刻社加한 5~6名 있었어요. 그래서 1970年代부터는 圖章은 안 새기고 그냥 세 받으면서재료만 取扱했죠.“ 박순옥(남, 1930年生, 靈光인재사) 인터뷰▶서울 印章舖의 세 番째 特徵은 都市 發展에 따라 浮沈을 겪었다는 點이다. 서울은 1960年代부터 1980年代까지 30年 동안 壓縮成長을 했다. 1970年代 江南開發이 本格化하기 以前 서울의 主要 施設과 企業體는 四大門 안쪽 地域에 密集했다.당연히 그 時期 서울의 印章舖는 代表的인 商店街인 鍾路와 충무로 一帶에 자리했다. 以後歐露工團, 汝矣島 開發 等 굵직한 都市 開發을 쫓아 印章舖度 移動해 營業을 이어갔다.“내가 印章 배우면서 처음 했던 곳은 다棟 58番地였어요. 거기서 先生님하고 같이 일하다가 그 옆으로 옮기고, 또 옮기고 그랬죠. 또 구로工團 韓日銀行 바로 옆에 있다가 軍隊 갔다 와서 1977年에 대일사를 開業했어요. 거기서 2年 있다가 汝矣島 국민은행 本店이 있는 中央빌딩으로 옮겼죠. 1980年에 汝矣島 처음 갔을 때만 해도 풀밭이었어요.” 조규호(남, 1957年生, 韓國人場協會 會長) 인터뷰 1960年代 後半부터 서울에서는 現代式 高層 建物과 넓은 道路를 建設하고,주차장과 公園을 만들어 都心을 現代化·高度化하는 ‘都心再開發’ 事業이 展開됐다.이에 따라 都心의 底層 苦蜜 建物의 商家를 賃借한 印章舖들은 都心再開發과 함께잦은 移轉을 하며 浮沈을 겪었다.“지금 영풍문고 짓기 前에 그 앞에 가게들이 쭉 있었어요. 그中 하나를 保證金 50萬 원에 얻었어요. 空間은 한 坪도 안 됐어요. 손님 하나 들어오면 꽉 車는 가게였어요. 그렇게 1年 半쯤 했는데 빌딩 짓는다고 가게를 비워달라고 하더라고요. 保證金 50萬 원에 위로비 150萬 원을 받아서 구몬빌딩에 480萬 원짜리 가게를 얻었어요. 거기서 한 10年 했죠. 그런데 또 빌딩 짓는다고 비워달라는 거예요.” 박호영(남, 1938年生, 朴人當) 인터뷰▶ 서울歷史博物館 최병구 館長은 “印章은 우리나라와 日本, 臺灣 等 東아시아 一部 國家의 특수한 文化임에도 不拘하고, 獨創性과 藝術性을 지닌 수조각(手彫刻) 印章의 戰勝 斷絶이 憂慮되는 狀況이다. 이番 調査를 통해 印章 細工 技術과 道具를 現場 調査 方式으로 생생하게 記錄해냈다는 點에서 앞으로 貴重한 資料가 될 것으로 期待한다.”라고 傳했다. 『 서 울 의 人 腸 抛 』 兆 사 步 故 서 는 서 울 驛 사 박 물 管 누 리 집(http://museum.seoul.go.kr)에서 閱覽할 수 있다. 購入은 서울冊房(https://store.seoul.go.kr) 또는 서울歷史博物館 내 記念品店에서 可能하다. (價格 14,000원, 問議 02-739-7033).변영욱 記者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