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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냉이 먹고 12時間 勞動…폴란드의 삶이 생각납니다”|주간동아

週刊東亞 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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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냉이 먹고 12時間 勞動…폴란드의 삶이 생각납니다”

폴란드로 갔다 歸國 6·25 北韓 孤兒들 스승에게 보낸 便紙 39通 發見

  • 신석호 東亞日報 워싱턴 特派員 kyle@donga.com

    入力 2014-09-15 11: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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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냉이 먹고 12시간 노동…폴란드의 삶이 생각납니다”
    6·25戰爭 直後인 1953年 7月 末부터 59年 7月 末까지 6年 동안 폴란드 南西部 작은 마을의 한 學校로 보내졌던 北韓 戰爭孤兒 26名이 歸國 後 폴란드 敎師 2名에게 보낸 便紙 39通이 發見됐다. 便紙에는 同族相殘 渦中에 父母를 잃고 어린 時節을 外國에서 보낸 崎嶇한 事緣과 이들 눈에 비친 戰後 再建 時期 北韓 社會의 表情이 담겨 있다.

    이 便紙들은 美國 冷戰史 硏究機關인 우드로윌슨센터 北韓國際文書硏究프로젝트(NKIDP)의 홍인택 硏究인턴이 지난해 폴란드 現地調査를 통해 發掘, 8月 27日 美國 學界에 公式 發表했다. 홍인택 硏究인턴은 美國 미네소타 州 칼턴칼리지 歷史學科를 卒業했다.

    “사랑하는 에드워드 先生님. 파란(폴란드)에 있을 때 學校食堂에 恒常 나왔던 라드(돼지기름)를 잘 안 먹었던 게 후회스러워요. 저희 朝鮮(北韓)에서는 라드를 찾을 수가 없어요. 도무지 기름진 것을 먹을 수가 없답니다.”

    “돼지기름 안 먹었던 것 後悔”

    “강냉이 먹고 12시간 노동…폴란드의 삶이 생각납니다”

    6·25戰爭 直後 폴란드에 갔던 北韓 戰爭孤兒들이 歸國 後 폴란드 敎師들에게 보낸 便紙.

    1960年 2月 14日. 北韓 平壤高等石炭工業專門學校에 다니던 오○○ 軍은 몇 달 前까지 폴란드에서 自身을 父母처럼 돌봐줬던 에드워드 제드랄 先生에게 飮食을 골라먹었던 自身을 反省하는 便紙를 보냈다. 6·25戰爭 當時 父母를 잃고 孤兒가 된 吳君은 戰爭이 끝난 53年 폴란드 孤兒院으로 보내졌고, 59年까지 滿 6年間 生活했다. 戰後 아직 復舊가 끝나지 않은 故鄕으로 돌아와 만난 첫 番째 現實은 極甚한 가난이었다.



    “只今 제가 있는 學校에서는 조금이라도 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어요. 甚至於 名節이나 公休日에도 고기를 안 준답니다. 저희는 普通 강냉이(옥수수)를 많이 먹어요. 폴란드에서도 옥수수를 먹나요? 이게 저희 曺國(fatherland)에서의 삶입니다.”

    不足한 것은 飮食만이 아니었다. 學生들은 누런 更紙 노트를 뜯어 쓴 便紙에다 辭典이나 空冊, 萬年筆 같은 學用品은 勿論이고 자주 便紙를 보낼 수 있게 郵票도 보내달라고 付託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切實했던 것은 外部 世界 消息이었다. 김일성 獨裁體制가 强化되고 情報에 對한 統制가 加해질수록 그들은 폴란드에서 맛봤던 바깥世上에 對한 시원한 情報를 渴望했다.

    “로마에서는 올림픽이 한창 열리고 있겠네요. 先生님! 폴란드에서 보던 스포츠 雜誌를 좀 보내주시겠어요. 여기서는 바깥世上 消息을 全혀 들을 수 없거든요. 스포츠 雜誌가 없으면 그냥 靑年雜誌(Sztandar Mlody)라도 좋아요.”

    폴란드에 있을 때부터 스포츠狂이었던 金○○ 軍(疆界考等電氣學校)은 같은 해 9月 29日 쿨리베르다 스타니슬라우 先生에게 第17回 로마올림픽 消息을 보내달라고 付託했다. 그림을 잘 그렸던 한 男學生은 “先生님이 只今 가르치는 폴란드 女學生 몇 名의 住所를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물었다. “그女들과 便紙를 주고받으면서 폴란드語를 練習할 수 있을 테니까요”라고 말한 그 亦是 답답한 北韓 社會主義 밖으로 난 唯一한 窓을 붙들고 싶은 마음이 歷歷했던 듯하다.

    “강냉이 먹고 12시간 노동…폴란드의 삶이 생각납니다”

    1959年 歸國 直前 孤兒들의 모습을 담은 記念앨범(危)과 北韓 ‘朝鮮民主女性同盟’李 孤兒院 敎師들에게 傳한 謝恩 旗발.

    戰爭 통에 父母를 잃고 異域萬里 外國에서 어린 時節을 보낸 이들이 다시 故鄕에 돌아와 보낸 便紙 안에는 戰後 復舊를 넘어 김일성 獨裁體制로 치닫던 北韓 社會主義의 社會相이 間間이 녹아 있다. 北韓 當局이 갓 歸國한 아이들에게 黨과 首領에 盲目的 忠誠을 强要하는 特有의 意識化 敎育을 펼친 것을 確認할 수 있는 대목도 드러난다. 1960年 8月 15日 光復節을 앞두고 한 學生이 쓴 便紙가 代表的이다.

    “日本에서 獨立한 以後 朝鮮은 美國과 싸움을 始作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앗아갔고 우리는 그것을 再建하는 데 餘念이 없습니다. 只今까지 아주 빠르게 많은 것을 세웠습니다. 높은 하늘 아래 共産主義라는 塔을 세울 겁니다. 우리 黨과 김일성 首領 同志가 이끌고 있지요. 우리의 삶을 위해 最善을 다하고 있어요.”

    빡빡한 社會主義 敎育과 勤勞奉仕 活動에 動員돼야 했던 팍팍한 삶이 그들의 鄕愁를 더욱 剛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희는 3月 27日 平壤 工事場 現場에 投入됐어요. 엄청나게 큰 돌을 옮겼어요. 5月 16日엔 더 많이 옮겨야 할 거예요. 잠도 못 자고 36時間이나 일했답니다. 하루에 가장 조금 일한 것이 12時間입니다. 여기서 힘들수록 폴란드의 삶이 더욱 생각납니다.”(날짜와 이름이 正確지 않은 한 男學生의 便紙)

    西歐式 ‘보살핌’과 팍팍한 삶

    便紙 大部分은 이처럼 ‘폴란드에서는 좋았는데 이곳에서는 힘들다’는 文章이 主를 이룬다. 홍인택 硏究인턴은 “6·25戰爭 孤兒들에게 폴란드 先生님들은 ‘보살핌(care)’의 意味를 깨닫게 해준 父母 以上의 存在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第2次 世界大戰 以後 유럽 國家들은 窮極的인 國家 正體性 再確立에 앞서 戰爭에 시달린 個人들의 心理的 安定을 優先視하는 敎育에 힘을 쏟았지만, 北韓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 홍인택 硏究인턴은 “孤兒들은 黨과 國家에 對한 個人의 獻身과 服從을 强調하는 北韓 社會에서 思春期를 보내는 동안 個人 사이의 感情的 交流를 强調하는 西歐式 보살핌의 價値를 새삼 깨달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폴란드 敎師들이 回顧하는 北韓 戰爭孤兒들

    1953年부터 6年間 總 1200名…1962年 갑자기 連絡杜絶


    “강냉이 먹고 12시간 노동…폴란드의 삶이 생각납니다”

    ‘파란 第1愛育院’에서 함께 勤務했던 폴란드 敎師와 北韓 敎師들.

    戰後 北韓은 靑少年들의 海外留學 事業을 活潑하게 推進했다. 蘇聯과 東獨, 폴란드 等 東유럽 社會主義 兄弟國家들은 ‘社會主義 블록 人道的 支援 事業’의 一環으로 다양한 留學 機會를 提供했고, 北韓은 戰後 復舊 人力 養成 次元에서 이에 積極 和答했다. 폴란드 南西部 르보벡 슬라스키 地域에 세워진 ‘파란 第2愛育院’(愛育院)에는 北韓 戰爭孤兒 1200名이 遊學 形態로 보내졌다. 7歲에서 15歲 사이 孤兒는 大部分 文盲이어서 主로 初等學校 低學年 過程에 配置됐다. 이들은 營養失調와 各種 疾病에 시달리던 狀態였다.

    폴란드 政府는 이들의 몸과 마음을 治癒하기 위해 精神的·物質的 支援을 아끼지 않았다고 當時 敎師들은 回顧했다. 第2次 世界大戰 當時 精神病院으로 利用됐던 120에이커(藥 48萬5623㎡) 넓이의 愛育院에는 寄宿舍 15洞과 함께 病院, 講義室, 映畫館, 講堂, 蹴球場 等 當時로서는 最新式 施設이 들어섰다.

    敎師 等 폴란드 管理 人力도 600餘 名이나 配置됐다. 폴란드 敎師들은 師範學校를 갓 卒業한 新參들이었다. 敎師와 學生들의 語塞한 同居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먼저 말이 통하지 않았다. 西歐式 個人主義 敎育을 하려는 폴란드 敎師들과 北韓式 民族主義·集團主義 敎育을 願하는 北韓 敎師 40餘 名 사이에 葛藤이 빚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6年 동안 愛育院에서는 學生과 敎師, 폴란드 敎師와 北韓 敎師 사이에 友情과 信賴가 形成됐다. 1959年 北韓 當局 要請으로 1200名이 歸國할 때 바르샤바 空港은 울음바다로 變했다.

    歸國 後 學生들은 學歷에 따라 職級은 달랐지만 機械, 化學, 農業, 藥學 等 技術 分野의 高等敎育 機關으로 平壤과 地方을 가리지 않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 後에도 學生들은 폴란드 敎師들에게 便紙를 썼지만, 1962年 10月이 되면서 便紙가 一齊히 끊겼다. 이는 北韓 當局이 西歐人과 文物을 排擊하기 始作한 時期와 一致한다. 김일성 獨裁體制 强化와 함께 나타난 措置였다.

    홍인택 우드로윌슨센터 硏究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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