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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寇의 本質 흐리는 ‘土着倭寇’|週刊東亞

원포인트 示唆 레슨

倭寇의 本質 흐리는 ‘土着倭寇’

‘倭寇 中 朝鮮人이 많았다’는 植民史觀에 捕獲된 表現

  • 권재현 記者

    confetti@donga.com

    入力 2020-03-25 13:4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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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몽연합군에 맞서 해전을 벌이는 일본군을 그린 ‘몽고습래회도(1293)’. 1350년 이후 고려를 침공한 왜구는 일본 남조 정부군이었다는 점에서 이와 비슷했을 가능성이 크다 [위키피디아]

    旅夢聯合軍에 맞서 海戰을 벌이는 日本軍을 그린 ‘蒙古襲來膾도(1293)’. 1350年 以後 考慮를 侵攻한 倭寇는 日本 南朝 政府軍이었다는 點에서 이와 비슷했을 可能性이 크다 [위키피디아]

    언제부터인가 ‘土着倭寇’라는 말이 人口에 膾炙되고 있다. ‘親日派’를 낮춰 부르는 用語로 ‘겉은 韓國人인데 속은 (韓國을 싫어하는) 日本人’이란 비아냥거림이 담겼다. 文在寅 政府 들어 韓日關係가 惡化되자 日本과 關係改善을 要求하는 이들을 狙擊할 때 많이 登場한다.

    歷史學者 전우용 氏는 1910年 大韓每日申報에 실린 ‘토왜天地(土倭天地)’라는 글에서 토왜를 ‘얼굴은 韓國人이나 창자는 倭놈人 도깨비 같은 者, 나라를 좀먹고 百姓을 병들게 하는 人種’으로 規定했다며 그 使用을 支持했다. 이에 힘입어 ‘日本과 잘 지내자’는 主張을 하는 사람을 土着倭寇로 낙인찍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나카무라 히데다카의 倭寇館

    중국 명대 원작을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왜구도권’ 중 명군(왼쪽)과 왜구의 해전도 [도쿄대사료편찬소]

    中國 明代 原作을 模寫한 것으로 推定되는 ‘왜구도권’ 中 名君(왼쪽)과 倭寇의 해顚倒 [도쿄大史料編纂所]

    하지만 이런 韓國人들을 지켜보며 地下에서 웃고 있을 사람이 따로 있다. 倭寇가 日本人과 朝鮮人으로 構成된 海賊 集團이란 主張을 처음 들고 나온 나카무라 히데다카(1902~1984)다.

    나카무라는 1926年 스물넷의 나이에 日本 도쿄帝國臺(日本史 專攻)를 卒業하고 韓半島로 건너와 朝鮮總督府 朝鮮史編修會의 一員으로 囑託이 됐다. 以後 1945年 日本 敗戰 때까지 無慮 19年間 朝鮮史編修會에서 皇國史觀과 植民史觀의 주구(走狗)로 活動한 人物이다. 朝鮮史編修會가 朝鮮總督府 直轄機關으로 創立된 時點이 1925年이니 朝鮮史編修會의 ‘살아있는 歷史’라 해도 過言이 아니다.

    勿論 當時 그의 나이가 젊었기에 朝鮮史編修會의 指導的 位置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搜査官 編修官 敎學官을 두루 거치고 마지막에는 幹事 役割까지 兼任했다. 게다가 朝鮮에서 이런 經歷을 발板 삼아 日本으로 돌아와 나고야大學과 덴리大學 敎授로 在職하며 ‘前後 朝鮮史 硏究의 1人者’로 불리게 된다.



    30年 가까이 倭寇를 硏究해온 이영 방송통신대 敎授(日本學)에 따르면 이 나카무라에 依해 歪曲된 왜舊官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倭寇는 日本 戰國時代 閨秀 一帶 다이묘들의 指示를 받고 움직인 正規軍事 集團이었으며 여기에 參與한 朝鮮人은 極少數였다. 나카무라는 이런 倭寇의 實體를 감추기 위해 高麗史와 造船社를 巧妙하게 짜깁기 해 歷史에 記錄된 倭寇의 相當數가 倭寇로 假裝한 朝鮮人이라는 學說을 流布한 主役이다. 그는 이를 指稱하기 위해 ‘假倭((假倭)’라는 用語를 썼다. ‘土着倭寇’라는 用語란 一脈相通하는 面이 있다.

    두 種類의 倭寇가 있다

    倭寇라는 漢字表現이 最初로 登場한 것은 高句麗 광개토太王鼻紋(414年)의 ‘倭寇神라(倭寇新羅)’란 表現이다. 여기서 舊(寇)는 ‘떼 지어 侵略하다’라는 動詞로 쓰였다. 高麗史에도 高宗10年(1223年) ‘倭가 金海를 侵略했다’는 ‘倭寇今週(倭寇金州)’를 筆頭로 主로 凍死로 쓰이다가 1300年代가 되면서 ‘倭寇’ 自體가 ‘日本 海賊’이란 뜻의 固有名詞로 굳어졌다. 高麗末 倭寇의 侵略 回數는 500回가 넘는다.

    歷史學界에선 倭寇를 電氣 倭寇(高麗末 倭寇)와 後記 倭寇(朝鮮時代 倭寇)로 區分한다. 電氣 倭寇는 元나라 末期인 14世紀 韓半島와 中國 山東省 一帶에서 擄掠질을 일삼았다. 崔瑩과 李成桂, 최무선, 停止를 戰爭英雄으로 만들어준 바로 그 倭寇다. 後記 倭寇는 明나라 中期인 16世紀 週로 장쑤省, 저장省, 푸젠성 等 中國 南東部 海岸을 舞臺로 密貿易과 掠奪을 벌였다. 거기엔 中國人이 많았다.

    많은 專門家들은 이런 둘의 差異에 더 注目했다. 電氣 倭寇가 主로 食糧 掠奪에 置重했다면 後記 倭寇는 밀貿易業者의 性格이 더 剛했다. 明나라 調整은 外國과 民間貿易을 嚴禁했는데 當時 東南亞 一帶를 掌握한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商人들은 緋緞과 陶瓷器 같은 中國 工藝品이라면 四足을 못 썼다.

    땅이 瘠薄해 農事짓기가 어려웠던 푸젠성 사람들 中心으로 密貿易 從事者들이 늘어났다. 그들 中 名 朝廷의 追跡을 받게 된 一部는 南中國海와 가까운 日本 규슈 地域에 根據地를 마련했다. 규슈 地域의 日本 榮州(다이묘)들의 後援을 받아 密貿易과 掠奪 收益을 나눠가진 것이다. 그래서 後記 倭寇 中 相當數는 中國人이라는 게 定說이다.

    實際 日本 규슈에 가면 安徽省 出身이라고 ‘휘王(徽王)’ 또는 바다를 平定했다 하여 ‘정해왕(淨海王)’을 自處한 왕직(王直)과 ‘千次평해(天差平海)大將軍’을 僭稱한 西海(徐海) 같은 中國人 海賊王들의 遺跡이 남아있다. 甚至於 明나라 收復運動을 벌여 한족의 英雄으로 꼽히는 鄭成功(鄭成功·1624~1662年)도 푸젠성 出身 아버지와 日本人 어머니 사이에서 규슈 히라도섬에서 태어났다는 點에서 中國系 倭寇의 後孫일 可能性도 提起된다.

    倭寇가 多國籍 境界人이라고?

    일본 규슈 나가사키 북쪽 히라도섬에 있는 중국계 왜구 왕직(王直)의 동상 [중국 바이두백과]

    日本 규슈 나가사키 北쪽 히라도섬에 있는 中國系 倭寇 왕직(王直)의 銅像 [中國 바이두百科]

    後記 倭寇가 猖獗하던 16世紀는 海賊의 時代였다. 後날 英國 海軍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는 프랜시스 드레이크(1545?~1596)가 新大陸에서 海賊으로 猛活躍하던 時期도 이때였다. 世界 最大 規模 은광이었던 南아메리카 現在 페루의 포토시에서 植民本國人 스페인으로 실어 나르는 은 輸送艦隊를 노린 네덜란드와 英國의 海賊들이 國家的 英雄으로 身分轉換이 可能한 時代였다.

    그 當時 海賊들은 國籍과 身分, 宗敎 같은 正體性에서 自由論 存在였다. 어디에도 束縛되지 않고, 어디에도 충성하지 않는 存在라는 點에서 프랑스 思想家 자크 아탈 理가 規定한 ‘호모 노마드’로 規定되기도 한다. 아르헨티나 小說家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短篇集 ‘不汗黨들의 世界史’에 登場하는 中國 淸나라 때 女海賊 稱이나 재패니메이션 ‘원피스’ 亦是 이런 浪漫的 海賊館의 産物이다.

    日本에선 이런 浪漫的 海賊管을 倭寇에 適用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倭寇가 日本이란 特定 國家에 所屬되지 않은 自由로운 浪人集團의 無理였다는 ‘境界人론’이다. 그에 따르면 後記 倭寇의 主軸이 中國人+日本人이라면 電氣 倭寇의 主軸은 朝鮮人+日本人이 된다. 結局 朝鮮人 中에 土着倭寇가 많다는 소리가 되고 만다.

    이런 論理의 土臺를 提供한 人物이 나카무라 히데다카다. 그는 自身의 代表作 ‘一線關係詞 硏究(1966)’에서 高麗史에 倭寇의 所行으로 記錄된 것 中 相當數가 倭寇를 假裝한 高麗社會 下層民의 叛亂이었으며 日本人들이었다 하더라도 對馬島나 규슈 海岸가 一帶 民間人들의 所行이라고 主張했다.

    皇國史觀의 아킬레스腱, 倭寇

    일본 남북조 시대 남조를 연 고다이고 일왕의 초상화(왼쪽). 일본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자신들과 동일시한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동상 [Monkan-bō Kōshin, David Moore]

    日本 南北朝 時代 南朝를 연 고다이고 日王의 肖像畫(왼쪽). 日本 메이지維新의 主役들이 自身들과 同一視한 구스盧키 마사시게의 銅像 [Monkan-b? K?shin, David Moore]

    이영 敎授는 ‘倭寇와 高麗·日 本關係社’ 및 ‘皇國史觀과 高麗末 倭寇’ 같은 著述을 통해 그 虛構性을 낱낱이 파헤쳤다. 그에 따르면 前後期 倭寇는 모두 日本 內亂期에 軍糧米 아니면 戰費 確保를 위한 正規軍 活動의 一環이었다. 西歐的 槪念에 따르면 倭寇는 自發的인 ‘非公認 海賊’으로서 파이어리츠(pirates)가 아니라 國家나 宗敎의 支援 아래 活動한 公認海賊 코르歲어즈(corsairs)였다.

    電氣 倭寇는 日本의 王室이 南朝와 北朝로 나뉜 南北朝時代(1333~1392) 南朝에 충성했던 규슈 地域 사무라이 勢力이 軍糧米 確保를 위해 元나라 勢力이 弱해진 틈을 타 韓半島와 中國 산둥省 一帶 海岸가를 掠奪한 것이었다. 高麗에서 倭寇의 擄掠질이 急增하고 大規模환 時點이 1350年 以後인데 日本 南朝와 北朝 間 鬪爭이 極甚해지는 時點과 一致한다. 또 倭寇 侵略이 激減한 時點 亦是 1392年 南朝의 沒落 直後라는 點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 無慮 500隻의 艦隊에 起兵 7000까지 帶同한 大規模 軍事集團을 民間 武力集團으로 糊塗할 수는 없다.

    이는 當時 교토를 掌握한 北朝와 高麗 調整 間에 오간 書信에서도 確認할 수 있다. 1376年 무로마치 幕府(북조)가 倭寇의 侵入을 抗議하는 高麗使臣을 通해 ‘(幕府) 朝廷에서 長壽를 보내 (南朝가 다스리는) 규슈 一帶 鎭壓作戰에 나섰으니 鎭壓이 完了되면 더 以上 海賊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書信을 보냈다.

    後記 倭寇 亦是 무로마치 幕府가 무너진 戰國時代(1493~1573) 규슈 一帶 다이묘들이 戰費 마련을 위해 中國 海賊과 손을 잡고 密貿易과 掠奪戰鬪를 벌인 것으로 봐야하다. 實際 왕직은 히라도番의 다이묘人 마쓰라 다카노富의 庇護를 받았고, 西海는 사쓰마번의 다이묘人 시마즈 家門의 傭兵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明나라 軍隊가 이들 倭寇와 벌인 戰鬪度를 淸나라 때 模寫한 것으로 推定되는 ‘왜구도권’에 登場하는 倭寇의 旗발을 擴大해본 結果 1555年에 該當하는 ‘高地(弘治) 4年’이란 日本의 年號가 確認된 點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나카무라는 왜 이런 倭寇의 正體를 감추려했을까. “에도 幕府를 무너뜨린 메이지 維新 勢力은 1333年 가마쿠라 幕府를 멸망시킨 南朝의 고다이고(1288~1239) 日王과 그를 도운 구스盧키 마사시게(1294~1336)를 自身들의 役割모델로 삼았습니다. 메이지日王 亦是 血統 上 北朝를 繼承했음에도 不拘하고 고다이고 日王의 正統을 繼承했다고 闡明했습니다. 그런데 擄掠질을 일삼은 倭寇의 背後가 고다이고 血統이 다스린 남조임이 밝혀지는 것이 곤혹스러웠던 겁니다. 그래서 倭寇를 日本 調整과 無關한 民間人集團으로 둔갑시키거나 多國籍 聯合勢力이라고 물타기를 하는 겁니다.”

    李 敎授의 이런 說明을 듣고도 土着倭寇라는 表現을 繼續 使用할 수 있을까. 皇國史觀과 植民史觀의 呪術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自制할 必要가 있다. 꼭 써야겠다면 親日派, 正確하게는 日本에 붙어 反逆하는 賦役(附逆)의 무리라는 뜻의 ‘夫日倍(附日輩)’라는 表現으로 足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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