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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첫 自家用’ 포니, 現代의 名作 되다|신동아

‘우리 집 첫 自家用’ 포니, 現代의 名作 되다

[名作의 祕密]

  • 이광표 西原大 휴머니티敎養學部 敎授

    kpleedonga@hanmail.net

    入力 2024-04-1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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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斷種 34年, 最近 다시 人氣 끌어

    • 2000年代 後半부터 博物館 人氣 展示品

    • 한 臺當 5000萬 원 들여 사들이기도

    • 녹아 있는 現代史, 젊은 層 感性 건드려

    울산 남구 울산박물관에 전시된 초기형 포니. [뉴시스]

    蔚山 南區 蔚山博物館에 展示된 初期型 포니. [뉴시스]

    2017年 映畫 ‘택시運轉士’(監督 張勳)가 劇場에 걸렸다. 緊迫하고 悲劇的이었던 1980年 5月 光州의 狀況을 感動的으로 그려내 1000萬 名이 넘는 觀客이 들었다. 評壇에서도 꽤 좋은 評을 받았다.

    映畫에는 두 名의 택시 運轉士가 나온다. 서울에서 光州로 내려간 김만섭(송강호 分)과 光州에서 일하는 황태술(유해진 분). 映畫 속에서 김만섭은 브리사 택시를 몰았고, 황태술은 포니 택시를 몰았다.

    브리사와 포니. 모두 1970~80年代를 代表하는 乘用車다. 브리사는 기아산업이 1974年 12月부터 生産한 自動車로, 日本 마쓰다의 파밀리아 車輛을 들여와 部分 變更한 것이다. 기아산업이 車를 生産하는 過程에서 一部 部品乙國酸化하기도 했다. ‘하루 維持費 2000원의 經濟型 세단’이라는 廣告 文句와 함께 1975, 1976年 큰 人氣를 끌었다. 當時만 해도 ‘國民 乘用車’였던 셈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포니에 자리를 내주었다. 포니는 1975年 12月부터 현대자동차가 生産한 國內 最初의 固有 모델 乘用車다. 當時 포니의 氣勢는 엄청났다. 포니는 한 時代를 風靡하며 1990年까지 生産됐다.

    영화 ‘택시운전사’에 등장한 포니 택시가 2017년 8월 20일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 5·18민주광장에 전시돼 시민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동아DB]

    映畫 ‘택시運轉士’에 登場한 포니 택시가 2017年 8月 20日 光州 東區 옛 全南道廳 앞 5·18민주광장에 展示돼 市民들이 記念 撮影을 하고 있다. [東亞DB]

    2023年 再照明한 ‘포니의 時間’

    단종된 지 34年 된 포니가 最近 다시 注目받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2023年 6~10月 서울 논현동 ‘現代 모터스튜디오 서울’에서 ‘포니의 時間’이란 展示를 열었다. 포니 5種(포니1, 포니왜건, 포니픽업, 포니3도어, 포니2)이 展示場에 자리를 잡았다. 1974年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 내놓았던 포니쿠페 콘셉트카를 實物로 製作한 것도 함께 선보였다. 展示場엔 많은 사람이 몰렸다. 實際 포니를 본 적 없어 보이는 젊은이들이 꽤 많이 展示場을 채우고 있었다. 當時 現場을 찾았을 때, 日本人 團體 觀覽客도 보였다. 1970年代 幾何學的 디자인의 單純 明快함, 낯선 듯한 獨特함이 젊은 感性을 건드렸다는 評價를 받았다.



    이 展示는 基本的으로 현대자동차가 옛 브랜드를 통해 自社의 이미지를 弘報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그러나 展示는 商業的 弘報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單純히 포니 自動車만을 선보인 것이 아니라 포니가 人氣를 누리던 1970~80年代의 日常과 文化에 關한 資料도 함께 展示했다. 포니의 製作 過程에 얽힌 逸話와 이를 보여주는 資料, 當時의 포니의 新聞廣告, 當時 人氣를 끌었던 雜誌 等等, 포니를 통해 1970~80年代를 만나는 機會였다.

    特히 서울의 大型 映畫館 앞 風景을 담은 映像이 흥미로웠다. 서울 충무로 大韓劇場 앞. ‘마지막 皇帝’(1988年 國內 開封), ‘구니스’(1986年 國內 開封) 等의 映畫 看板이 걸려 있고 映畫를 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道路에는 택시가 櫛比한데 大部分 抛니다. 當時 포니 택시의 人氣가 어느 程度였는지, 포니 乘用車가 어떻게 우리 日常이 됐는지를 보여주는 映像이었다.

    最初의 國産 乘用車

    현대자동차는 1968年 設立됐다. 草創期 劣惡한 與件 속에서 유럽 모델을 가져와 組立 生産하던 현대자동차는 1973年부터 讀者 모델 開發을 推進했다. 國産 自動車를 꿈꾸는 것조차 쉽지 않은 時節이었지만 현대자동차는 蔚山에 自動車 工場을 세웠다. 遠大한 抱負였지만 많은 이들은 無謀한 挑戰이라고 여겼다.

    어려움 속에서도 方法을 찾았다. 디자인은 이탈리아의 도움을 받았고 엔진과 變速機 技術은 日本의 도움을 받았다. 全體 生産過程에 對해선 英國에 諮問했다. 이런 過程을 거쳐 현대자동차는 讀者 모델 開發을 決心한 지 1年 만인 1974年 6月 첫 프로토타입을 完成했다. 그리고 1975年 12月 드디어 포니를 大量 生産하기 始作했다. 이어 1976年 1月부터 市販에 들어갔다.

    韓國人의 趣向에 맞으면서 耐久性이 좋았고 國産化率 90%로 애프터서비스도 수월해 곧바로 人氣를 끌었다. 해치백 스타일에 角이 진 幾何學的 디자인도 好評을 받았다. 그 德分에 販賣 첫해에만 市場占有率 43%를 記錄했다. 1976年 7月엔 에콰도르로 포니를 輸出했다. 이어 978年에는 40個國에 1萬 臺를 輸出하는 成果를 냈다. 포니는 1990年까지 生産됐고 韓國 乘用車의 代名詞로 20世紀 後半 한 時代를 風靡했다.

    포니(pony)는 조랑말이라는 뜻이다. 그럼, 포니라는 이름은 어떻게 定했을까. 當時 현대자동차는 乘用車 한 臺를 負傷으로 내걸고 5週 동안 新聞廣告를 통해 이름을 公開 募集했다. 應募作은 6萬 통 가까이 됐다. 應募作 가운데 아리랑·도라지·無窮花라는 이름이 가장 많았고, 포니라는 이름은 100餘 名이 提出한 것이었다고 한다. 귀엽고 親熟한 그러면서도 力動的인 포니의 이름은 그렇게 태어났다,

    1976年 1月 市販이 始作될 무렵의 新聞廣告를 보자. “우리 힘으로 만든 韓國 最初의 固有 모델車 포니 誕生” “80馬力의 强力한 쌔턴 엔진, 燃料 消耗가 적은 뛰어난 經濟性, 堅固한 車體” “아름답고 經濟的인 포니” “아름답고 갖고 싶은 포니” “우리 分數에 꼭 맞는 車”…. 廣告 文句에서 드러나듯 大韓民國의 마이카 時代는 포니와 함께 始作했다. 포니가 있었기에 마이카 時代라는 用語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없어서 못 求하는 現代 遺物

    ‘브리사’ 복원 모델. 1974년 출시된 승용차 브리사는 마쓰다 플랫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나 부품 국산화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바탕으로 출시 2년 만인 1976년 약 90%의 국산화율을 달성한 모델이다. [뉴스1]

    ‘브리社’ 復元 모델. 1974年 出市된 乘用車 브리사는 마쓰다 플랫폼 基盤으로 만들어졌으나 部品 國産化를 위한 積極的인 努力을 바탕으로 出市 2年 만인 1976年 約 90%의 國産化率을 達成한 모델이다. [뉴스1]

    그런데 ‘포니의 時間’ 展示 以前에도 사람들은 이미 여러 番 포니를 불러냈다. 포니가 여러 博物館에서도 人氣 展示品이라는 事實이 이를 雄辯한다. 國立民俗博物館은 2009年 포니 픽업(뒷座席을 없애고 貨物칸을 만든 車輛)을 한 臺 購入해 博物館 野外에서 展示한 바 있다. 近現代 生活史와 産業社에서 빼놓을 수 없는 遺物이라고 判斷한 것이다. 只今은 收藏庫에 잘 保管돼 있다.

    2011年 蔚山 南區에 蔚山博物館이 開館할 때 이런 일도 있었다. 蔚山博物館은 20世紀 蔚山의 象徵物을 展示하고자 했다. 硏究陣이 모여 아이디어 會議를 했다. 그 結果 현대자동차가 直接 生産한 自動車가 좋겠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中에서도 韓國 自動車 國産化의 始發點인 포니가 가장 적합하다는 데 意見이 모였다. 어쩌면 그건 當然한 結果였다. 현대自動車를 빼고, 포니를 빼고 어떻게 韓國 自動車産業의 수도 蔚山의 20世紀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포니를 求하는 것이 普通 일이 아니었다. 當時에 남아 있는 포니 自體도 드문 데다 所有者들이 값을 너무 비싸게 불렀다. 蔚山博物館은 外國에 輸出된 포니를 救하려고 알아봤으나 그것도 如意치 않았다. 迂餘曲折 끝에 博物館은 1980年型 紫朱色 포니 한 臺를 5000萬 원에 購入했다. 當時 현대自動車의 新型 高級 세단 제네시스의 價格이 한 臺當 4000萬~5000萬 원 水準이었다. 이런 消息이 알려지자 현대자동차는 네덜란드에서 포니 한 臺를 購入해 2011年 博物館에 寄贈했다. 1981年 生産돼 네덜란드로 輸出한 포니였다. 엔진 等 主要 部品이 出庫 當時의 狀態를 維持하고 있고, 走行이 可能할 程度로 狀態가 良好한 便이었다.

    2017年엔 한 企業人이 1986年型 포니2를 直接 몰고 와 蔚山博物館에 寄贈하기도 했다. 寄贈者는 蔚山 地域의 아너소사이어티 會員인 최영수 氏였다. 當時 그는 “韓國과 蔚山의 自動車産業을 代表하는 포니2를 市民과 함께 共有하고 싶어 寄贈했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포니 픽업 한 대를 더 寄贈받아 蔚山博物館은 現在 4代의 포니를 所藏하고 있다. 이런저런 努力과 周邊의 도움 德分에 蔚山의 象徵物, 現代自動車의 뿌리를 제대로 保有하고 있다.

    2012年 서울 종로구에 開館한 大韓民國歷史博物館에도 1982年型 포니가 展示室 한篇을 차지하고 있다. 포니 앞은 觀覽客들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다. 特히 壯年層 觀覽客들은 저마다 포니에 對한 追憶을 하나둘 풀어놓는다. 2022年 3月 大韓民國歷史博物館은 開館 10周年을 맞아 觀覽客 設問調査를 통해 人氣 展示 遺物 10點을 選定해 發表한 바 있다. 여기에 포니가 首位權에 들었다. 포니 外에는 國內 最初 國産 라디오(1959年産 錦城 라디오 A-501), 1960年 4·19革命 當時의 女高生 日記, 1983年 離散家族찾기 피켓 等이 함께 選定됐다.

    이 밖에 서울 蘆原區 서울生活史博物館, 京畿 龍仁市 삼성화재 交通博物館에서도 포니를 만날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019年 옛 서울北部地方法院 建物을 리모델링해 分館人 서울生活史博物館을 造成했다. 이 博物館은 포니, 브리사를 한자리에서 함께 展示하고 있다. 포니와 브리사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보면 映畫 ‘택시運轉士’의 김만섭과 황태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韓國 壓縮成長 痕跡

    현대차의 콘셉트카 ‘포니쿠페’. [현대차]

    現代車의 콘셉트카 ‘포니쿠페’. [現代車]

    포니는 이렇게 곳곳에서 大衆을 만나고 있다. 韓國 自動車産業이 發展하고 有名 브랜드가 續續 誕生했다. 斷種된 車輛은 自然히 잊혀져간다. 그런데도 오래된 포니에는 關心이 몰린다. 흥미로운 現象이다. 自動車 마니아나 好事家들의 復古 趣味일 수도 있고, 올드카에 對한 好奇心일 수도 있다. 한便으로는 自動車産業의 成長에 對한 自負心의 表現일 수도 있다.

    또한 포니에 對한 關心은 最近의 레트로, 뉴트로 트렌드와 密接한 關聯이 있다. 레트로는 追憶을 意味하는 Retrospect의 준말로, 흔히 復古로 받아들여진다. 最近엔 過去의 追憶이나 流行을 불러내 다시 享有하고 消費하는 文化를 일컫는다. 그 때 그 時節 그대로를 똑같이 즐기며 그것을 통해 過去에 對한 鄕愁를 느끼는 것이다.

    뉴트로는 New와 Retro의 合成語로, 旣存의 레트路를 創意的이고 새롭게 受容하고 消費하는 것을 말한다. 主로 只今의 젊은 世代가 經驗해 보지 못한 過去(過去의 痕跡이나 콘텐츠)에서 새로움을 느끼고 그것을 一種의 ‘新商品’으로 받아들여 享有하고 消費하는 것이다. 過去의 것을 똑같이 再現하기보다는 現代的으로 再解釋하는 傾向이 强하다.

    레트로, 뉴트로 콘텐츠의 對象은 主로 ‘最近의 過去’ 또는 ‘가까운 過去’이다. 數百 年 前 朝鮮 時代 以前이 아니라 20世紀 韓國 文化와 日常에 對한 鄕愁를 드러내고 즐기는 것이다. 우리 社會에서 그 가까운 過去는 1970~80年代를 中心으로 한 20世紀 中後半이다.

    뉴트로는 數十 年 前 過去의 痕跡을 새로운 方式으로 즐기는 것이다. 胎生부터 디지털과 함께한 젊은 世代에게 數十 年 前 아날로그의 痕跡은 新鮮하고 낯선 對象이다. 그런데 그 오래되고 낯선 것을 젊은 世代가 日常 속에서 熱心히 즐긴다. 單純한 復古가 아니라 젊은 層 特有의 消費 트렌드라고 할 수 있다. 多少 오래된 듯한 1970年代의 포니 디자인을 좋아하는 것도 이런 脈絡에서 說明할 수 있다. 2023年 ‘포니의 時間’ 展示에서 콘셉트카 포니 쿠페가 좋은 反應을 이끌어낸 것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레트로 뉴트로의 主要 對象이 되는 20世紀 中後半은 分斷과 戰爭, 獨裁, 壓縮成長과 産業化, 民主化 等을 겪은 激變의 時代였다. 그 痕跡이 只今 콘텐츠로 活用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狀況 속에서 大韓民國 最初의 固有 모델 乘用車 포니는 매우 象徵的이고 意味深長하다. 젊은 層의 感性을 건드림과 同時에 歷史的 文化的 脈絡을 함께 지니고 있는 獨特한 近代遺産이라고 할 수 있다.

    1970~80年代를 만나는 法

    1976년 1월 2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포니 광고. [동아DB]

    1976年 1月 27日子 동아일보에 실린 포니 廣告. [東亞DB]

    現在 道路를 달리는 포니 乘用車는 10餘 臺, 픽업은 100代 程度라고 한다. 運轉者들은 포니를 사랑하는 올드카 마니아일 可能性이 높다. 그건 個人 趣向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別途로 포니의 歷史와 來歷 等에 對한 關心은 레트로·뉴트로 트렌드와 맞물려 있고, 그렇기에 歷史的이고 文化的이다. 그 關心은 個人의 趣向을 넘어선다.

    지난해 ‘포니의 時間’ 展示를 위해 현대자동차가 製作한 弘報物에는 이런 文句가 있다. “‘우리 집 첫 自家用.’ 포니를 追憶하는 사람 열이면 열 빼놓지 않는 文句다. (…) 포니가 길 위에 새겨놓은 追憶의 溫度는 愉快하고 따뜻했다. 벚꽃이 滿開한 慶州 普門團地 길 위에서, 新婚旅行 中인 濟州道 中山間 國道에서, 아들 軍 入隊를 위해 찾은 論山訓鍊所 앞에서, 名節 歸鄕길에 들른 高速道路 休憩所에서, 駐車 空間이 따로 없던 집 앞에서 찍은 家族寫眞에는 恒常 포니가 있었다.”

    포니는 히트 商品이었지만 當時에는 乘用車는 어느 程度 奢侈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위의 弘報物 文案은 多少 誇張된 대목도 들어 있다. 그럼에도 포니에는 1970~80年代의 追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이카의 純粹함, 適當한 奢侈에 對한 欲望, 포니 택시 運轉士의 日常과 勞動, 그리고 ‘1980年 5月 光州’의 쓰라린 記憶까지 포니, 조랑말에 담겨 있다. 포니는 映畫 ‘1987’에도 나오고, 드라마 ‘應答하라 1988’에도 나왔다. ‘1987’에서 윤상삼 동아일보 記者(이희준 分)는 포니2를 運轉했다.

    이렇게 우리는 포니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 1970~80年代를 記憶하고 享有하고 消費하는 데 포니보다 더 象徵的인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이보다 더 意味 있는 日常用品이 또 어디 있을까. 어느 辭典을 보니 조랑말(포니)을 이렇게 說明해 놓았다. “말의 한 品種. 몸이 작고 튼튼하다. 忍耐力이 强하다.” 現代自動車 포니와 참 잘 어울리는 說明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이제 포니를 名作이라 불러도 充分하지 않을까.

    이광표
    ● 1965年 忠南 豫算 出生
    ● 서울대 考古美術史學科 卒業
    ● 高麗大 大學院 文化遺産學協同過程 卒業(博士)
    ● 前 동아일보 論說委員
    ● 著書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博物館’ ‘韓國의 國寶’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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