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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健熙 會長은 윗사람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映像]|新東亞

“李健熙 會長은 윗사람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映像]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 李健熙 會長 別世 3年, 김인 前 三星SDS 社長 證言中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3-10-2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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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敎育은 아랫사람 아닌 윗사람부터 해야

    • 變化는 사람으로 始作된다는 믿음

    • 있는 그대로, 날것 그대로 記錄하라

    • 會長께서 가장 强調한 키워드는 ‘사람’

    [+映像] 김인 前 三星SDS 社長 "이건희 會長은 내게 스승이자 멘吐였다"



    [+映像] 半導體 戰爭 中인 只今은 '李健熙' 다시 읽을 때



    김인 前 三星SDS 社長의 證言 下篇을 始作하기 前에 지난 號 技士 맨 뒤에 紹介한 李健熙 會長이 내건 ‘複合化’ 槪念에 對해 배종렬 前 三星物産 社長의 證言이 있어 追加하려 한다.

    배 前 社長 이야기를 듣다 보면 生前 李 會長이 아랫사람들에게 일을 指示할 때 얼마나 꼼꼼하고 細心하게 했는지 느낄 수 있다.

    김인 전 삼성SDS 사장. [ 지호영 기자]

    김인 前 三星SDS 社長. [ 지호영 記者]

    타워팰리스와 삼성의료원에 내린 注文

    李 會長은 5年 뒤 10年 뒤 未來 비전을 내놓을 때 平凡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到底히 想像할 수 없는 엄청나게 큰 비전을 提示했지만 일을 하나하나 指示할 때 亦是 남들은 잘 생각할 수 없는 破格的이고 디테일한 想像力을 펼쳐 周邊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李健熙 생각法’의 一端을 배울 수 있다는 點에서 意味가 있는 證言으로 여겨져 追加하려 한다.



    배 前 社長에 따르면 이 會長은 複合化 槪念으로 도곡동 타워팰리스와 삼성의료원을 例로 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元來는 타워팰리스를 住商複合 建物로 지으려고 한 게 아니고 複合化 槪念의 102層짜리 三星타워를 지으려고 했어요. 會長님 집도 있고, 事務室도 있고, 社長團 집도 있고, 必要하면 모두 모여 會議하고 討論하자고까지 얘기하셨지요.

    그러면서 집안 構造까지 細心하게 指示하십니다. 제가 優先的으로 기억나는 말은 이를테면 室內 空氣의 質과 濕度를 美國 하와이에서 느끼는 水準까지 되도록 해봐라, 旣存 아파트들보다 層高를 높이고 層間騷音 없게 하고 振動도 막는 硏究를 해봐라, 廚房에서 料理하면 냄새가 배니 부엌에는 에어커튼을 달아라 이런 것들이었어요. 엘리베이터도 1秒에 몇 層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速度까지 물어보셨습니다.

    또 그때만 해도 아파트 室內 構造란 게 只今보다 더 千篇一律的이었는데 世代別로 집 構造를 2世代 子女들과 함께 사는 집, 祖父母까지 있는 3世代가 사는 집 式으로 設計를 다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시골에서 父母님이 올라오거나 外部 손님이 올 境遇 묵을 수 있게 게스트 룸을 따로 만들어라, 圖書館도 만들어 學生들이 利用할 수 있게 하라고도 하셨고요. 只今이야 많은 아파트가 一般的으로 試圖하는 것들이지만 當時만 해도 처음 試圖하는 破格的인 發想이었습니다.

    삼성의료원을 만들 때도 똑같았습니다. 患者를 이리저리 다니게 하지 말고 醫師들이 움직이는 動線으로 設計하되 어떻게 하면 效率的으로 移動할 수 있는지 苦悶하라고 하셨습니다. 造景, 倍數도 數十 年을 내다보고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 나중에 지루해지지 않을까?’ 窮理하라고 하셨어요. 디자인에 對한 强調는 늘 하셨고요. 어떻게 저런 것까지 다 생각하고 指示하시나 할 程度로 細心하고 꼼꼼하셨습니다. 그건 正말 엄청난 일에 對한 沒頭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삼성의 전직 CEO들은 한결같이 이건희 회장이 매크로한 비전과 매우 세세하고 꼼꼼한 마이크로 지시에 놀란 적이 많았다고 입을 모은다. 삼성의료원을 설립할 때에도 의사보다는 환자 위주의 병원을 만들라는 다양한 지시를 내렸다. 사진은 1993년 4월 의료원 건설 현장을 직접 찾은 이건희 회장 모습. [동아DB]

    三星의 前職 CEO들은 한결같이 李健熙 會長이 매크로한 비전과 매우 細細하고 꼼꼼한 마이크로 指示에 놀란 적이 많았다고 입을 모은다. 삼성의료원을 設立할 때에도 意思보다는 患者 爲主의 病院을 만들라는 다양한 指示를 내렸다. 寫眞은 1993年 4月 醫療院 建設 現場을 直接 찾은 李健熙 會長 모습. [東亞DB]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會長님이 每事 이렇게까지 파고든 것이 但只 三星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것이 ‘三星이 앞서서 나라 全體 水準을 한 段階 레벨 業시키자’ ‘三星에서 하는 모든 事業은 該當 分野 1等은 말할 나위가 없고 다른 곳의 標本이 돼야 한다’는 거였어요. 會長님은 三星을 통해 大韓民國 水準을 높이고 싶어 하셨습니다.”

    變化의 임팩트가 가장 큰 集團부터

    다시 김인 前 社長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李健熙 會長의 新經營 宣言은 宣言으로 끝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그 精神을 職員들에게 刻印시킬 것인지 汨沒했다. 그러다 보니 모든 改革 措置가 祕書室 任務로 떨어졌다. 金 前 社長 말이다.

    “新經營 宣言이 있었던 1993年 올림픽公園 體操競技場에서 열린 第2創業 5周年 記念式을 아주 크게 했어요. 正말 感動的이었죠. 會長님 記念사도 名演說이었습니다. 얼마나 神經을 쓰셨는지 午前에 리허설까지 하셨어요.

    신경영이 宣言된 以後 祕書室 業務는 그룹의 體質과 文化를 바꾸는 게 最優先 프로젝트가 됐습니다. 그中에서 特異할 만한 프로젝트가 會長께서 直接 指示하신 ‘21世紀 CEO課程’이었습니다.”

    그게 뭔가요.

    “會長님은 ‘現場에서 具體的이고 눈에 띄는 變化가 있으려면 社內 前 職員이 志向하는 바가 같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山으로 가야 하는데 바다로 가자고 하면 안 되고, 總論 贊成 各論 反對式으로 뒷다리 잡지 말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于先 누구부터 變化해야 하느냐, 變化의 임팩트가 가장 큰 集團이 어디냐, 바로 組織에서 가장 重要한 役割을 하지만 變化를 躊躇하는 사람들, 高位 任員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뀌어야 組織이 바뀐다면서 말이죠. 그렇게 해서 만든 게 社內(社內) ‘21世紀 CEO’ 過程입니다.

    會長님은 ‘그룹에서 가장 바뀌지 않는 사람들이 管理 쪽이다. 管理本部長들은 빠짐없이 다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분들은 系列社 살림을 책임지는 분들인데 大部分 祕書室에서 오래 일하다 내려간 분들입니다. 다들 누가 뭐래도 有能하고 會社에 對한 로열티가 剛한 분들인데 會長님은 이런 분들부터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신 거죠.

    흔히 變化라고 하면 맨 밑의 職員들부터 달달 볶아야 할 것 같은데(웃음) 그게 아니라 中間 管理, 그中에서도 맨 위 職級을 겨냥했으니 正말 卓越한 洞察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會長님은 管理本部長들을 包含해 理事·상무·專務에서부터 副社長·社長은 勿論 社長이 될 候補들, 祕書室에 오래 勤務하다 내려간 系列社 팀長들의 名單을 一一이 다 내려보내 주셨습니다.

    이건 餘談입니다만, 21世紀 CEO課程은 1次的으로는 그분들에 對한 敎育이라는 側面도 있었지만 高位 任員 분들은 ‘내가 하루라도 없으면 會社가 宏壯히 어려워진다’고 생각하는 분들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한꺼번에 業務에서 빼서 敎育을 해도 아무 問題가 없으니(웃음) ‘當身들 생각이 틀렸다, 자리 지키는 것만이 能事가 아니다’라는 걸 보여주는 契機도 됐다고 봅니다.

    어떻든 會長님은 組織이 變하려면 먼저 윗사람들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任員들이야말로 新經營 宣言의 메시지를 몸과 마음에 裝着해 現場에서 實踐해야 될 사람들이니까 따로 敎育課程이 꼭 必要했다고 보신 거죠.”

    變化의 對象者를 아래가 아닌 位를 찍은 發想은 共感이 많이 갑니다. 敎育 內容은 뭐였고 效果는 있었나요.

    “6個月 過程이었는데 期間도 길었고 內容도 알찼습니다. 東大門 새벽市場, 鷺梁津水産市場度 가서 庶民들의 熾烈한 삶의 現場도 느껴보았습니다. 敎育 몇 番으로 사람이 當場 바뀌겠습니까만은 그런 過程을 통해 新經營 理念이 組織 內로 퍼지는 契機는 됐다고 봅니다.”

    21世紀 CEO 過程 말고 會長께서 指示하신 또 다른 具體的 措置가 있었나요.

    “그거 말고는 直接的으로 뭐를 어떻게 해라 이런 거는 없었습니다. 아, 디자인의 重要性을 宏壯히 많이 말씀하셨는데 그 結果 三星아트·디자인센터(사디·SADI)가 胎動하는 契機가 됩니다. 美國 名門 디자인 學校인 파슨스와 調印하는 準備 作業을 저희 祕書室에서 했으니까요.”

    (그가 言及한 사디는 ‘優秀 디자이너야말로 國家 資産’이라는 李健熙 會長 뜻에 따라 1995年 만들어진 機關이다. 以後 三星의 디자인 革命을 이끌어온 싱크탱크를 넘어 韓國 最初 디자인 스쿨로 자리매김한다.

    삼성 디자인 싱크탱크이자 한국 최초 디자인 스쿨 사디. 사디 [홈페이지]

    三星 디자인 싱크탱크이자 韓國 最初 디자인 스쿨 사디. 사디 [홈페이지]

    單一 敎育機關으로는 異例的으로 30餘 年間 卒業生 1600餘 名을 輩出했으며 世界 3代(IF·IEDA·레드닷) 國際 디자인 公募展에서 受賞한 作品만 100個가 넘는다. 1896年 設立된 뉴욕 私立 美術大學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 比肩될 만큼 國內外 디자인 業界에서 名聲이 높았다. 三星 側은 얼마 前 變化된 時代狀況에 맞춰 ‘2024年부터는 新入生 採用을 中斷하고 ‘三星디자인멤버십’ 프로그램으로 擴大·强化한다’고 했다.)

    新經營의 다양한 實踐 方案을 定着시키는 過程에서 第一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 7·4제였을 겁니다. 出勤 時間은 午前 7時로 두 時間이나 앞당겼는데 退勤 時間은 그대로이니 勤務 時間만 늘어났다며 不平 不滿이 많았지요.

    하지만 會長님 意志가 워낙 剛했습니다. 人事팀長人 저는 隨時로 事務室을 돌아다니며 不時 點檢까지 했는데 事實 저조차 ‘4時 칼退勤’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祕書室 일이 暴走하는 狀況에서 4時 退勤은 想像도 못 할 일이었죠.

    窮餘之策으로 會社 옆 建物 地下에 事務室을 따로 하나 얻었어요. 午後 4時가 되면 그곳으로 退勤해 일을 마무리하고 資料도 整理하고 저녁 食事도 解決하면서 몇 個月을 지냈습니다.”

    7·4祭는 以後 自律로 넘어가면서 失敗한 措置라는 말도 나왔지요.

    “勿論 初期에는 雜音도 많았고 나중에는 各社 自律로 넘어가 廢止된 곳도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분들도 있지만 요즘 企業들마다 ‘柔軟 勤務制’가 擴散하고 있는 걸 보면 業務 肥效率을 指摘한 7·4題 精神은 只今도 살아 있다고 봅니다.”

    가장 强調한 키워드 ‘사람’

    그는 “新經營 宣言 이듬해인 1994年은 正말 바쁜 해였다”고 했다.

    “‘다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話頭였기 때문에 여러 試圖가 참으로 많았던 해였습니다. 時間 날 때마다 會長님 말씀도 다시 새겨들어야 했고 團地 새겨듣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具體的인 액션으로 나타나야 하는 거잖아요. 新經營을 어떻게 擴散시킬 것이냐, 어떻게 뿌리내릴 것이냐, 會長님의 各種 指示 事項을 어떻게 履行할 것이냐 하는 게 業務의 大部分이었죠.

    또 系列社마다 金融, 電子, 製造가 다르고 같은 製造業 中에서도 重化學, 電子가 다 달라 文化가 제各各인데 어떤 式으로 各社 事情에 맞게 新經營을 정착시킬 것이냐 하는 데 對한 苦悶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小그룹 制度도 施行됩니다.

    아시다시피 經營活動이란 게 어느 한 時點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繼續 連結, 連結돼 물려가는 거잖아요. 모든 걸 다 完全히 뒤엎는 거니까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以前에 試圖하려고 했던 改革 措置 中에도 方向 없이 묻혀 있던 것들이 있었는데 新經營 宣言이 나오니 빛을 發해 推進을 더 加速化할 수 있었습니다. 會長님의 强力한 改革 呪文으로 모든 것을 제로 베이스에 놓고 따져들어 갈 수 있었으니까요. ‘이런 規定을 둬야 할 理由가 뭐냐’ ‘이 일을 꼭 이런 方式으로 해야 하느냐’ 하는 式으로 根本부터 짚어나갔습니다.

    出勤하면 祕書팀長이 傳해주는 會長님 指示 事項이 最少 열 가지가 넘었어요. 뭐뭐를 콕 집어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會長님이 펼치신 이런저런 생각을 祕書팀長이 傳해주면 이걸 카테고리別로 묶어서 參考 事項, 바로 해야 할 事項 等으로 分類했습니다. 卽時 해야 할 것이 한두 個 程度라고 하면 大部分의 事項은 向後 苦悶하면서 實踐해야 할 것들이라 時間이 걸릴 수밖에 없는 그런 게 참 많았어요.”

    저는 平素 新經營 宣言은 但只 革新 程度가 아니라 굼벵이가 나비가 되는 程度의 트랜스포메이션을 向한 宣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但只 겉模樣의 變化가 아니라 內容의 變化, 行動樣式부터 想像力에 이르는 모든 것을 바꾸는 變化의 出發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只今까지 言及한 그 많은 改革 措置를 施行하는 過程에서 會長께서 가장 重要하게 强調한 키워드가 있다면 뭘까요.

    “사람,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키우라’ ‘S級, 天才級 人材 데려와라’ ‘年俸을 社長보다 많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迎入하라’는 말씀을 第一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結局 變化는 사람으로 始作되는 것이고, 그것은 組織에서 人事로 歸結되는 것 아니겠습니까”라며 “여러 人士 시스템의 改革도 있었지만 ‘地域專門가 制度’가 第一 記憶에 남는다”고 했다.

    좀 더 仔細한 說明이 必要해 보입니다.

    “아, 그前에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생각났어요. 地域專門家度 그랬지만 會長님은 改革을 위한 行步에 ‘費用’ 槪念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돈을 아끼지 않으신 거죠.

    프랑크푸르트 宣言만 해도 絶對 事前에 企劃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創業 會長님 돌아가시고 그룹을 맡아 三星을 바꾸는 일에 沒頭했지만 쉽지 않다는 걸 너무도 切感하고 있는 狀況에서 후쿠다 報告書, 洗濯機 뚜껑 組立 事件이 터진 거였거든요. 프랑크푸르트 飛行機 안에서 그 두 가지를 經驗하고 바로 前 任員들을 飛行機로 불러 高級 호텔에서 몇朴 며칠씩 宿食을 같이 한 것 아닙니까. 莫大한 돈이 들어갔지만, 會長님은 돈이 重要한 게 아니라 ‘只今 하지 않으면 三星은 永遠히 바뀌지 않는다’는 絶體絶命의 切迫感이 있었기 때문에 可能했던 거죠.

    프랑크푸르트에서 講義한 內容을 모두 錄畫, 錄音하라고 한 것도 매우 특별한 意味가 있는 겁니다. 누구라도 자유롭게 말하다 보면 失手가 나올 수 있고, 이걸 記錄으로 남긴다고 하면 언제 어떻게 惡用될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하지만 會長님은 滿天下에 公開될지도 모를 內容을 말씀하시면서 거침이 없으셨어요. 하루 8時間, 9時間씩 瀑布水처럼 쏟아져 나오는 생각을 모두 있는 그대로 날것으로 錄畫 錄音해서 돌리라고 하셨으니 當身 스스로 얼마나 떳떳하고 自信感이 있으면 이런 膽大한 判斷을 할 수 있겠습니까. 只今 같으면 想像도 못 할 일이죠.”

    29年間 總 90餘 個國에 7000餘 名 보내

    金 前 社長은 李健熙 會長이 돈을 아끼지 않았던 代表的 改革 措置로 地域專門가 制度를 들었다.

    “地域專門가 制度는 新經營 宣言이 나오기 이미 몇 年 前에 指示한 措置입니다. ‘앞으로 海外에 1年씩 보내서 6個月은 語學硏修를 하고 6個月은 맘대로 돌아다니면서 該當 地域 文化와 文物을 배우고 익혀 돌아오도록 하라. 거기서 그냥 現地人 만나 結婚도 할 수 있으면 最高’라고까지 하셨어요. 이게 바로 ‘地域專門家’ 制度였죠.

    會長님은 三星이 地域專門家 2000名을 키우면 엄청난 힘이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當時로서는 너무나 實現 不可能한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于先, 費用을 어떻게 堪當할 것인가 하는 거였습니다. 現場마다 사람이 不足하다고 亂離들인데 일에서 빼주는 것은 勿論 그냥 놀게 하면서 學費며 生活費를 會社에서 다 대준다는 게 말이 되나 하는 反應이었죠.

    그렇게 했다가 나중에 이 사람들이 退社라도 하면 어떻게 하느냐, 그 돈이면 外國語 잘하는 留學 經歷者들을 뽑거나 現地人들을 經歷 社員으로 뽑는 게 낫지 않겠는가 하는 말도 많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會長님 귀에 안 들어갔겠습니까. 그럼에도 不拘하고 强行하신 거죠. 亦是 사람을 키워야 된다는 側面에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勿論 留學 갔다 와서 外國語도 잘하고 現地 生活 經驗이 많아 現地 文化를 잘 아는 사람을 뽑는 게 當場에는 유리할지 모르겠지만, 組織에서 必要한 人材라는 건 機能만 갖고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愛社心도 있어야 하고 人性도 좋아야 하며 폭넓게 思考할 줄도 알아야 하잖아요. 組織管理 能力도 重要하고요.

    會長님께서 一一이 그런 말씀을 하신 건 아닌데 地域專門가 制度를 생각하신 건 그런 意味로 받아들여졌어요. 그리고 ‘사람을 키워 써야 한다’고 할 때에는 職員들에 對한 愛情, 더 나아가 사람에 對한 사랑이 基盤되지 않으면 絶對 할 수 없는 생각입니다.

    草創期에는 反對 輿論이 많아 實踐하기가 相當히 어려웠지만 나중에는 자리를 잡았죠. 저는 三星이 地域專門家를 많이 養成한 結果가 우리 그룹은 말할 것도 없고, 나라 全體로도 큰 힘이 되는 程度까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三星의 地域專門家는 1~2年間 現地 言語와 文化를 익히도록 支援하는 海外 硏修 프로그램이다. 海外旅行이나 飛行機 타는 게 特權이던 時節과 比較하면 現在에는 무게感이 덜하다. 코로나 때문에 事業이 멈추기도 했다.

    그러나 如前히 人材 育成 側面에서 意味가 깊다고 判斷한 三星電子는 올해 9月, 코로나 以後 4年 만에 中斷된 地域專門家 募集을 다시 始作했다고 밝혔다.

    三星 側에 따르면 地域專門家는 1990年부터 2019年까지 總 90餘 個國에 7000餘 名이 派遣됐다고 한다. 年俸과 滯在費를 합쳐 大略 1人當 1億 원이 든다고 하면 最小 7000億 원이 投入된 프로젝트다.

    地域專門가 制度는 企業의 特定한 사내 人材 育成 方案이다 보니 바깥에는 그냥 두루뭉술하게 알려진 側面이 있다. 그런데 金 前 社長뿐 아니라 三星의 退任 任員들을 만나 新經營 宣言 戰後 가장 破格的 措置를 물어보면 7·4制와 함께 地域專門가 制度를 꼽는 이들이 많았다. 그 理由는 뭐고, 이 會長은 왜 이런 걸 생각하게 된 걸까.

    國際化를 해야겠는데 사람이 없다

    地域專門가 制度는 김인 前 社長이 앞에서 言及했듯이 新經營 宣言 以前부터 企劃됐다는 證言이 있다. 김석 前 三星證券 社長의 記憶이다.

    “1989年에 會長님이 김순택 常務, 진대제 理事님과 함께 臺灣을 訪問했을 때 現場에 함께 있었습니다. 이때 ‘地域專門家’ 制度를 導入하라는 指示를 내립니다. 入社 後 3年 乃至 4年 되는 사람을 獨身으로 派遣해서 1年 동안 硏修를 시키고 復歸를 시킨 다음 誇張이 될 때쯤 該當 地域에 正式 駐在員으로 다시 派遣하라 이런 內容이었죠. ‘내가 예전부터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結局 이듬해인 1990年 始作됐습니다.”

    記者가 만난 多數의 三星 任員은 “地域專門가 制度는 이 會長이 國際化를 처음 始作하는 때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狀況에서 먼 未來를 보고 着眼한 사람 키우기 戰略이었다”고 했다.

    이와 關聯, 손욱 前 三星綜合技術院長은 이런 體驗談을 紹介했다.

    “1980年쯤 三星電子 美國法人이 만들어집니다. 모든 게 다 처음 經驗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相異한 法과 制度를 익히는 것도 그렇지만 美國 사람들은 어떻게 管理하고 어떻게 動機附與를 해야 할지 안팎에서 助言을 들을 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냥 ‘能力 있는 사람을 잘 뽑아 일을 잘 시키면 된다’는 程度의 마인드였죠. 그렇게 해서 美國 電子業界에서 일했던 분을 拔擢해 첫 美洲 法人長을 시켰습니다.”

    삼성전자 DS 미국법인 사옥. [동아DB]

    三星電子 DS 美國法人 社屋. [東亞DB]

    하지만 施行錯誤가 많았다고 했다.

    “제가 삼성전자 企劃室에 있을 때인데 어느 날 텔렉스(Telex, 팩스나 컴퓨터가 나오기 前 企業 間 通信 必需品. 다이얼을 돌려 텔레타이프를 두드리면 文字가 送信돼 文書 證明書, 書類를 보내거나 保管하는 데 有用했다)가 1m 넘게 들어오는데 美洲 法人長 候補로 內定된 그 美國人으로부터 온 거였어요.

    給與는 얼마를 받아야 하고 信用카드는 비자카드 外에 또 무슨 카드도 必要하고 골프클럽 會員券도 있어야 한다 等等 要求 事項이 仔細히 죽 적혀 있는 거예요.

    아니 이런 것까지 들어줘야 하나, 우리로서는 生疏한 經驗이었습니다만 比較할 만한 經驗이나 事例도 없고, 優先은 美國 市場에 進出하는 게 重要하다는 생각이 强했기 때문에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자’는 心情으로 다 들어줬습니다. 多幸히 期待했던 만큼 輸出도 잘됐고 每年 成長勢였습니다. 同時에 不實도 커져서 나중에는 그분을 解雇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社長의 일이란 것은 成長도 成長이지만 管理가 重要하지 않습니까. 賣出이 아무리 늘면 뭐합니까, 不實이 늘면 안 되죠. 全體的으로 營業利益을 플러스로 만들어야 하는 게 當然하잖아요.

    그 兩班이 1m 以上 길이의 텔렉스 종이에 自己 要求 事項을 條目條目 써서 보냈듯이 우리도 ‘賣出은 얼마, 利益은 얼마, 會社 構造는 어떻게 할 것’ 等等 細細한 注文을 다 적어 넣었어야 했어요. 그런데 그저 ‘잘 付託합니다’ 하고 말았던 거죠.

    只今 보면 좀 荒唐한 에피소드 같긴 하지만 글로벌 舞臺에 새로 進出하는 저희 같은 立場에서 法的인 知識이나 經驗이 제대로 있을리 萬無한 狀況이니 施行錯誤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몰라서 當하는 일도 많았고요.

    當時 李健熙 會長님은 副會長 時節인데 “該當 地域 文化를 알고 接近해야 하는데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러니 사람을 키워야 된다”고 여러 番 말씀하셨어요. 저는 이런 問題意識이 ‘地域專門家’ 制度를 생각하신 契機가 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普通은 不實이 나면 處罰을 强化하고 監査를 하는 式으로 가지 않겠어요. 사람을 키우는 것이 根本 解決策인 것은 맞는데 돈과 時間이 들어가니 問題이지요. 하지만 會長님은 根本的인 解決策을 擇했습니다.”

    只今이야 國際化, 現地化라는 말이 當然하게 들리지만 남보다 앞서서 世界 一流 舞臺에 進出하고자 했던 三星의 施行錯誤는 多種多樣한 形態로 많았을 것이라는 건 능히 斟酌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들 國內市場만 바라보며 競爭하던 時節 李健熙 會長은 일찍이 國際化를 說破하면서 가는 곳마다 職員들에게 다양한 메시지를 남긴다. 이와 關聯해서 황영기 前 KB金融持株 會長의 이런 證言도 있다.

    “1994年 싱가포르 出張 가셨을 때 제가 모시고 갔어요. 그때 現地 支社長이 派遣된 지 5年 程度 됐을 때예요. 空港에서 市內로 들어오는 車 안에서 會長님이 갑자기 싱가포르 初·中·高校에서는 뭘 가르치느냐, 家庭敎育에서 重視하는 건 뭐냐 仔細하게 물어보시는데 저도 그랬지만 支社長으로서도 全혀 豫想하지 못한 質問이었죠.

    支社長은 主로 政治, 經濟와 關聯한 內容만 準備했을 텐데 會長께서 實際 現地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到底히 答할 수 없는 質問들을 하시니 얼마나 唐慌했겠습니까. 結局 호텔까지 쩔쩔매면서 모시고 왔지요.

    호텔에서 會長님이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싱가포르에서 일한 지가 5年이나 됐다는 사람이 겉만 훑고 다니고 內部 事情은 하나도 모른다. 이렇게 해서 國際化, 現地化가 되겠느냐’며 그 자리에서 막 惹端을 치셨습니다. 事實 三星 같은 文化에서 會長으로부터 現場에서 惹端을 맞으면 거의 魂이 나갑니다(웃음).

    돌이켜 보면 그때 會長의 意圖는 다른 곳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나중에 CEO가 돼서야 조금 理解할 수 있었어요. 제가 解釋하는 當時 會長의 意中은 이랬던 것 같아요.”

    어떤 건가요.

    “‘冊에 있는 資料 달달 외워서 묻는 말에 答하는 게 駐在員으로 있는 目的이 아니다, 여러분이 이 나라를 깊이 理解하면 그 爆發力은 100倍, 200倍가 될 것이다’ 하는 가르침이죠. 會長께서 國際化나 現地化에 對해 어떤 생각을 갖고 世界를 바라보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던 經驗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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