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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植民地 侵略으로 電波|新東亞

테이스터 朴英淳의 커피 人文學

유럽의 植民地 侵略으로 電波

奴隸 慘酷社 부른 커피

  • 朴英淳|경민대 호텔外食調理學科 兼任敎授 twitnews@naver.com

    入力 2017-05-19 10: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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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國家의 登場과 더불어 비롯된 奴隸制는 유럽 列强의 植民地 侵略 루트를 따라 傳播된 커피로 因해 慘劇을 더했다. 世界 各地로 뻗어간 커피 밭은 곧 그들에 對한 搾取의 結果物이었다.
    人類는 集團生活을 通해 ‘協力의 偉大한 價値’를 깨달았다. 氏族과 血族으로 構成된 原始 共同體 社會는 農耕文化를 꽃피웠고, 集團이 모여 마침내 國家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이 過程에서 ‘權力’이 생겨나면서 協力을 强制하는 橫暴가 氣勝을 부리게 된다. 權力者들은 다른 나라를 侵略해 財産과 勞動力을 强奪함으로써 勢力을 빠르게 불려나갔다. 權力과 부는 人類愛를 오염시켰다. 戰爭 捕虜와 植民地 사람들은 權力을 쥔 側엔 손쉽게 富를 불리는 道具에 不過했다. 人類가 저지른 가장 殘忍한 짓으로 꼽히는 奴隸制(Slavery)는 이렇게 始作됐다. 커피의 歷史도 殘酷한 노例事로 點綴돼 있다.

    奴隸는 自由와 權利를 빼앗기고 다른 사람의 所有가 되는 者 또는 階層을 말한다. 그 뿌리는 人類 最初의 國家가 形成된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文明에까지 닿는다. 古代 이집트는 巨大한 피라미드를 지을 奴隸를 確保하려 戰爭까지 치렀다. 古代 그리스 時代엔 아테네 人口의 40%가 奴隸였다는 記錄도 있다. 紀元前 4世紀 아리스토텔레스는 異邦人을 그리스인의 胎生的 奴隸로 規定했다. 그는 特히 “그리스인들은 다른 民族을 支配할 使命을 받았다”며 奴隸制度에 哲學的 正當性을 附與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最初의 人種差別的 思想家라는 汚名을 입기도 하는데, 이러한 主張이 人類史에 얼마나 끔찍한 일을 招來할지를 想像조차 못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妄言

    로마에 이르러서는 奴隸가 制度로 굳어졌다. 共和政 時代의 로마가 勢力을 擴張하면서 支配한 地域의 民族들이 奴隸로서 로마에 大量 供給됐다. 奴隸와 그 所有主인 市民 間 階級關係는 이 時代를 規定하는 하나의 指標라고 할 만하다. 帝政時代 로마에만 奴隸가 40萬 名이 넘었던 것으로 傳한다. 로마 建國부터 衰退期까지 거의 1000年 동안 奴隸로 팔리거나 잡힌 사람이 最少 1億 名에 達했다는 見解도 있다.



    커피의 貿易商品化

    5 世紀 로마帝國이 沒落하면서 싹트기 始作한 中世 國家들은 王과 榮州 間 契約에 依해 이뤄진 封建社會였다. 下層階級인 ‘農奴’는 事實上 奴隸의 다른 이름이었을 뿐이다. 이 時期 奴隸의 歷史는 무슬림과 基督敎 間 戰爭으로 인한 捕虜의 歷史이기도 하다. 中世 初期 奴隸 供給處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校歌 맞닥뜨린 中部 유럽과 東유럽이었다. 셀주크 튀르크族이 차지한 예루살렘을 두고 1096年부터 1270年까지 170餘 年間 持續된 十字軍戰爭은, 한便으로는 兩 陣營이 주거니 받거니 한 奴隸의 慘酷史이기도 했다. 十字軍戰爭 初期, 잉글랜드 人口의 約 10%가 奴隸였다는 記錄은 그 悽慘함을 雄辯하는 듯하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奴隸制를 禁止하면서 最小限 基督敎도 奴隸를 非基督敎 地域으로 輸出하는 行爲만은 强力히 막았다. 그러나 富를 안겨주는 奴隸는 그들에게 決코 떨칠 수 없는 誘惑이었다. 카를 마르크스가 規定한 奴隸制 社會(古代)-封建制 社會(中世)-資本主義 社會(近代) 等 歷史發展 段階를 貫通하는 共通된 키워드가 奴隸다.

    十字軍戰爭을 치르는 동안 이슬람의 飮料인 커피가 유럽의 基督敎 國家들로 傳해졌다는 一角의 主張은, 記錄은 且置하더라도 情況 證據조차 不足한 소리다. 커피가 유럽에 傳해진 건 十字軍戰爭이 끝나고도 350年쯤 더 지난 17世紀 初였기 때문이다.

    유럽의 戰爭史에서 커피는 오스만帝國 全盛期에 登場한다. 수니派 이슬람 王朝인 셀주크 튀르크는 十字軍戰爭 以後 勢力이 弱해지고 內部 混亂을 겪게 된다. 이 틈을 타서 셀주크의 支配를 받던 오스만 튀르크가 1299年 터키를 中心으로 帝國을 樹立한다. 오스만제국은 터키共和國 樹立을 앞둔 1922年까지 623年間 勢力을 떨치면서 에스파냐와 합스부르크 王家의 領土를 비롯한 相當 部分의 유럽 땅과 아라비아 半島, 北아프리카를 支配하기도 했다.

    오스만제국은 1453年엔 비잔티움帝國을 征服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고쳐 首都로 삼았다.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地政學的 位置 德分에 兩側 間 貿易이 旺盛했던 곳이다. 이 時期쯤 에티오피아에서 發見된 커피가 예멘을 거쳐 이스탄불에 到着했다. 오스만제국이 예멘을 支配한 16世紀부터 커피가 大量 이스탄불에 들어오면서 터키 사람들이 즐기는 方式이라는 意味의 ‘터키시 커피(Turkish coffee)’가 周邊 國家에까지 퍼져 크게 流行한다.


    三角貿易의 한 軸

    奴隸貿易이 富를 約束하는 아이템이 된 것은 三角貿易(Triangular Trade) 때문이기도 했다. 유럽은 綿織物이나 銃, 火藥을 싣고 아프리카 西海岸에 이르러 黑人 奴隸와 交換했다. 다시 그 배를 타고 아메리카 大陸으로 건너가서는 勞動力이 必要한 農莊에 奴隸를 팔고 빈 배에 雪糖, 커피, 담배, 綿花를 싣고 돌아왔다. 한 番의 航海에서 3個 品目을 大量 去來하는 三角貿易 技法은 最高 500%의 엄청난 利益을 안겨줬다. 奴隸貿易이 가장 甚했던 時期가 啓蒙主義의 싹이 터 프랑스革命과 美國 獨立運動의 기운이 充滿했던 18世紀라는 事實 또한 歷史的 아이러니다. 이 時期에 아메리카 大陸으로 끌려간 아프리카 原住民은 한 해 8萬 名에 達했던 것으로 傳한다.

    노 예 勞動이 必要한 沙糖수수 農事가 沙糖무에서 雪糖을 抽出하는 技術 開發로 그 氣勢가 잦아질 수 있는 機會가 찾아왔다.

    1805年 스페인 南部 트라팔가 海戰에서 英國의 넬슨艦隊에 敗한 나폴레옹은 大陸 封鎖令을 내려 英國을 고립시키려 했다. 이로 인해 英國의 船舶이 묶이면서 오히려 프랑스를 비롯한 大陸 國家들이 여러 가지 困難을 겪게 된다. 배便이 不足해 西印度諸島에서 싣고 오던 雪糖 流入이 遮斷된 것도 그中 하나다. 이때 나폴레옹이 沙糖무로 雪糖을 만들도록 한 것이 結果的으로 沙糖수수를 둘러싸고 벌어진 熾烈한 貿易競爭을 차분하게 만든 契機가 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奴隸의 受難史는 멈추지 않았다. 커피가 沙糖수수를 代身해 유럽 國家들에 富를 안겨주는 새로운 商品으로 急浮上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선 이제 커피 밭에 보내기 위한 黑人 사냥이 예전보다 더 慘酷하게 進行됐다.

    貿易商品으로서 커피의 存在感은 빠르게 커졌다. 베니스 商人들이 1615年 커피를 처음 유럽으로 들여갈 때는 터키를 통한 間接貿易 方式이었다. 中東 商人들이 터키에 傳한 커피를 받아오는 形式이었다. 그러나 以後 半世紀 만에 네덜란드 商人들이 예멘의 모카 項에서 定期船을 띄워 커피를 直接 輸入하게 된다. 런던(1652年), 파리, 빈(1683년), 프라하, 뉘른베르크(1686年), 함부르크(1687年), 라이프치히(1694年) 等 都市마다 最初의 카페들이 門을 열면서 유럽人은 커피에 빠져들었다. 需要量이 暴增하는 狀況에서도 커피 供給源은 如前히 예멘뿐이었다.

    유럽 各國은 커피가 한때의 流行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確信이 서자 아예 植民地에 커피나무를 심게 된다. 네덜란드가 1658年 실론에 커피나무를 옮겨 심은 것을 信號로 유럽 强國들의 커피 栽培 競爭이 始作됐다. 1680年부터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커피를 栽培한 네덜란드는 1712年 처음으로 커피 400kg假量을 自國으로 들여온다. 아라비아 商人을 통하지 않고 自給自足한 이른바 ‘植民地 커피’가 誕生한 瞬間이었다. 그러나 15年 뒤 자바커피 流入量은 700t, 1855年엔 7萬7000t에 達했다. 자바 住民이 食糧難을 겪을 程度로 現地는 온통 커피 밭으로 바뀌었다. 프랑스는 네덜란드에서 커피 苗木을 받아 1723年 西印度諸島의 마르티니크 섬에서 栽培를 始作한다. 여기서 자란 나무가 브라질로 옮겨지고 연이어 퍼져나가면서 事實上 아메리카 大陸에 퍼지는 커피의 元祖가 된다.

    16~19世紀 노예선에 실려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大陸의 農場으로 끌려간 黑人은 4000萬 名에 達했다. 이들을 搾取해 西유럽과 美國은 큰돈을 벌었다. 英國에서 始作된 産業革命의 動力은 三角貿易에서 調達됐고, 三角貿易은 아프리카 黑人들에겐 人權蹂躪과 慘酷함의 象徵이었다. 

    노 예 이야기는 아메리카 大陸에서 끝나지 않는다. 19世紀 英國과 獨逸이 아프리카 開拓에 나서면서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等地에서 커피 밭을 일군다. 아프리카 本土에서도 그곳 黑人들의 悽慘한 아픔이 새겨진다. 아프리카 奴隸는 人類가 만들어낸 最惡의 慘狀이었다.




    朴 英 順
    ● 충북대 微生物學科 卒業, 고려대 言論大學院 碩士
    ● 세계일보 記者, 메트로新聞社 取材部長, 포커스新聞社 編輯局長  
    ● 現 인터넷新聞 커피데일리 發行人, 커피批評家協會長, 경민대 호텔外食調理學科 兼任敎授, 경민대 平生大學院 바리스타過程 專擔敎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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