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衝突과 抵抗 ‘關門’의 運命|新東亞

한 글字로 본 中國

衝突과 抵抗 ‘關門’의 運命

津 - 베이징의 ‘守護 巨人’

  • 글 · 寫眞 김용한 | 中國硏究가 yonghankim789@gmail.com

    入力 2016-09-22 15:5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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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톈진(天津)은 ‘천자의 나루터’였다. 名(明)나라 永樂帝가 톈진에서 배를 타고 上陸해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톈진은 베이징의 목줄이자 港口였다. 首都를 치려는 者와 막으려는 者, 西洋 列强과 中國이 衝突한 空間이다. 톈진은 베이징을 위해 存在하는 외눈박이 巨人이다. 그래서 톈진 사람들은 ‘톈진 無人(武人)’ 곽원갑을 그리워한다.
    姐姐講一下.
    中國語를 배우면서 中國人과 웬만한 意思疏通은 可能해졌지만, 아무래도 中國語의 微妙한 뉘앙스를 다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톈진 旅行 中 潑剌한 스무 살 아가씨를 만났다. 내가 人事次 “間摩耶(干??)?”라고 물어보자 그女는 내 表現이 語塞하다며 그 理由를 說明해줬다.

    “누나가 가르쳐줄게(姐姐講一下). ‘間摩耶(干??)?’는 어이없는 狀況에서 ‘都大體 뭐하는 거야?’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고, 一般的으로 ‘뭐해?’라고 물어볼 때는 ‘間마너(干??)?’라고 해.”

    내 나이의 半밖에 안 되는 어린 親舊가 천연덕스럽게 ‘누나’라고 自稱瑕疵 헛웃음이 나왔지만, 워낙 潑剌하고 귀여우니 모든 게 容恕가 됐다.

    自負心이 强해 20代 中盤 靑年도 나이 지긋한 사람에게 “이 어르신네가 어찌 네 말을 듣겠느냐”고 말하는 곳, 初等學校 꼬마 아가씨에게도 ‘누님(大姐)’이라고 불러줘야 하는 곳, 톈진이다.



    永樂帝의 루비콘

    톈진(天津)의 弱者는 ‘나루 陳(津)’ 자다. 톈진이란 ‘천자의 나루터’라는 뜻으로, 明나라 永樂帝가 여기서 배를 탄 것에서 由來한다. 로마의 시저가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말하며 루비콘 江을 건넜듯, 연왕(燕王) 主體(朱?)는 톈진에서 배를 타고 上陸해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永樂帝로 登極했다. 卽, 톈진은 永樂帝의 루비콘이다.

    톈진은 아홉 줄기 江물이 黃海로 흘러가는 交通의 要旨다. 일찍이 隋煬帝가 베이징과 항저우(杭州)를 잇는 大運河를 建設했을 때부터 베이징의 關門都市 톈진은 크게 發達했다. 特히 宋代(宋代) 北方 遊牧民族 國家들이 베이징을 重要 據點으로 삼으면서 톈진의 重要性도 急浮上했다. 톈진은 江南의 物資를 베이징에 끌어오기 위한 物流都市였다.

    톈진은 永樂帝와 因緣이 깊다. 朱元璋은 원을 물리치고 明을 建國하며 장쑤省 난징을 首都로 삼았다. 宋代부터 江南은 이미 中國 經濟의 中心이었으나, 北方 國家들이 베이징을 首都로 삼아 政治의 中心은 되지 못했다. 朱元璋은 明나라를 세우며 난징을 首都로 삼아 政治와 經濟의 中心을 一致시켰다. 朱元璋이 죽고 孫子 建文帝가 皇位를 繼承瑕疵, 建文帝의 三寸인 연왕 主體가 叛亂을 일으켰다. 主體는 톈진에서 水路를 따라 進軍해 ‘靖難의 便(靖難之變)’에 成功한다.

    主體가 쿠데타에 成功했으나 民心은 싸늘했다. 大義名分도 없이 皇帝가 되고 싶어 일으킨 政變이었다. 名分 없는 政變이라 當代의 官僚·知識人들도 協調的이지 않았다. 方孝孺는 當代 最高의 學者로 皇帝의 스승이었다. 永樂帝의 側近들은 “方孝孺를 죽이면 天下에 글 읽는 선비가 없어질 것”이라며 살려주길 請했고, 永樂帝 亦是 그의 재주와 名聲을 아껴 方孝孺를 懷柔하려 했다.

    그러나 方孝孺는 永樂帝의 提議를 單칼에 자르고 “硯滴(燕賊)李 位(位)를 簒奪했다”며 돌直球를 날렸다. 永樂帝는 方孝孺의 一家 親戚에다 知人들까지 873名을 方孝孺 앞에서 죽이고, 끝으로 方孝孺度 죽였다. 유배자는 셀 수도 없을 程度였다. 이 事件을 통해 明나라 初期 人材들이 大擧 사라졌다. 더욱이 當時 文化의 中心이 江南이기에 처형당한 사람은 大部分 江南의 名士들이었다. 江南의 民心은 더더욱 永樂帝에게 등을 돌렸다.



    租界地 톈진의 悲哀

    永樂帝의 策士 도연(道衍)은 靖難의 便 直後 故鄕 쑤저우(蘇州)를 찾았다. 20年 만의 錦衣還鄕이었으나 故鄕 사람들에게 冷待를 받았다. 여든 살에 가까운 徒然의 누이는 도연을 만나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그렇게 지체 높으신 분이 이런 초라한 집에 오실 用務가 있겠습니까. 무언가 잘못 아시고 오셨겠지요.”

    民心이 이렇게 차가워지자 永樂帝는 自身의 本據地 베이징을 首都로 삼으며, 江南의 物資를 끌어올리기 爲해 大運河를 改修했다. 톈진은 自然스럽게 交易·物流의 中心地가 됐다. 永樂帝가 皇帝가 되기 前에는 出兵基地, 皇帝가 되고 난 後에는 ‘物流센터’가 된 셈이다.

    베이징의 목줄로서, 軍事·經濟的 要地로서 톈진은 매우 重要했다. 베이징을 지키려면 톈진을 반드시 지켜야 했고, 베이징에 들어오려면 톈진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近代에 톈진을 지키려는 中國과, 톈진에 들어오려는 西洋 列强은 尖銳하게 맞부딪쳤고, 톈진은 中國과 西洋이 만나는 同時에 衝突하는 空間이 됐다.

    톈진의 젖줄 하이허(海河)는 걷기 좋은 길이다. 드넓은 江邊엔 最尖端 高層建物과 함께 近代 유럽式 建築物들이 늘어서 傳統과 현대가 잘 어우러진다. 유럽風 建築은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뽐낸다. 톈진에서 가장 큰 聖堂인 서개天主敎堂(西開天主敎堂)은 敬虔하게 祈禱하는 天主敎人과 놀러온 구경꾼들이 모두 즐겨 찾는다. 오늘날에는 西洋的 價値와 中國的 價値가 평화롭게 共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이 있기까지 歷史는 많은 피를 흘려야 했고, 特히 租界地 톈진은 커다란 苦痛을 견뎌내야 했다.

    예나 只今이나 中國은 巨大한 生産基地이자 탐나는 市場이다. 西洋 列强은 中國의 貴한 商品을 얻고 中國 市場에 物件을 팔려 했으나, 當時 世界經濟의 으뜸이던 中國은 閉鎖的 經濟體制를 維持하려 했다. 中國은 西洋人을 淺薄하게 돈만 밝히는 오랑캐 장사꾼으로 봤고, 西洋은 中國人을 時代의 흐름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로 봤다. 相互 輕蔑은 갈수록 甚해져 中國은 西洋人을 털북숭이 원숭이로 봤고, 西洋은 中國人을 阿片 피우는 東洋 원숭이로 봤다. 서로를 理解하지 못하고 輕蔑하니 衝突은 時間 問題였다.


    궁하면 變하고, 變하면 통한다던가(窮則變, 變則通). 가장 中國的인 方式으로 西洋을 물리치려 했으나 慘敗했다. 이제 남은 길은 果敢히 傳統을 버리고 西洋을 따르는 것뿐이었다. 신문물이 中國을 支配했다. 그림은 寫眞으로, 그림자劇(劇)은 映畫로, 靑銅거울은 琉璃거울로 變했다.

    더욱 重要한 것은 思考方式의 變化였다. 많은 中國人이 傳統 觀念을 버리고 西歐的 價値를 受容했다. 一例로 中國人은 傳統的으로 旅行을 두려워했다. 中國은 땅이 너무 넓고 別의別 사람이 워낙 많기에, 中國人은 집 떠나기를 겁냈고 꼭 가야 한다면 吉日(吉日)을 擇해 움직였다. 그러나 近代式 窓가(唱歌)는 이런 觀念을 嘲弄했다.

    “世上事 機構해도, 到處에 사람들이 다니네. 가다가 막다른 곳에 이르면, 다시 물러나면 되지 않는가. 萬若 迷路를 만나면, 입을 열어 물어보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힘써야지. 吉凶이란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 汽船은 물로 다니고, 馬車는 陸地를 다니네. 千里를 오가는데도 참으로 빠르도다. 갖가지 속된 禁忌(禁忌)들 모두 떨쳐내고, 오로지 西洋 사람들의 長點을 따라 배우세.”

    西洋을 追從하는 雰圍氣는 近代 俗談에 더욱 明確하게 드러난다.

    “留學生은 屬性 3年 工夫面 天下를 다닐 수 있으나, 水災는 3年을 더 工夫한다 한들 寸步도 움직일 수 없네.”

    이 말은 漢나라의 大學者 董仲舒의 故事를 빗댄 말이다. 董仲舒가 하도 熱心히 工夫하느라 ‘3年 동안 집안의 庭園도 보지 못했다(三年不窺園)’는 故事는 數千 年間 中國 知識人의 龜鑑이 됐으나, 이제는 ‘退物 선비’의 象徵으로 여겨졌다. 知識人이라면 마땅히 西洋 文物을 배우고 世界를 두루 다니는 留學生이 돼야 했다.

    톈진 租界地는 世界 各國의 銀行이 들어차 國際金融 中心地가 됐다. 9個國 租界地답게 다양한 風格의 建築物이 들어서 ‘萬國 建築博物館’이라는 別名을 얻었다. 淸末의 實力者 위안스카이는 톈진에 中國 最初의 新式 警察을 만들었고, 中國 最初의 民主的 地域議會 選擧를 監督했다.

    近代 톈진은 中國 第2의 工業都市였고, 1949年 以前만 해도 상하이에 이어 中國에서 두 番째로 큰 都市였다. 오늘날에도 톈진은 1546萬 名이 사는 大都市다. 人口密度는 상하이, 베이징에 이어 中國 本土(홍콩, 마카오, 臺灣 除外) 3位이고, 1人當 GDP는 1位(2014年 1萬6874달러)다. 中國에 4個뿐인 直轄市 中 하나임에 부끄럽지 않은 實績이다.



    ‘베이징의 무엇’

    톈진은 中國 政治의 中心 베이징, 經濟의 中心 상하이, 內陸 第一의 메트로폴리스 충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톈진이 이만큼 成長한 것은 베이징과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逆說的으로 톈진의 成長에 限界가 있는 것도 베이징과 가깝기 때문이다.

    톈진은 베이징과 不過 117km 距離에 있다. 自動車로 한두 時間밖에 걸리지 않고, 時速 300km의 高速鐵을 타면 30分 만에 到着한다. 中國이 閉鎖的이고 交通이 不便할 때 톈진은 베이징에 進出하기 위한 橋頭堡로서 매우 重要했지만, 베이징으로의 接近性이 높아진 只今은 重要性이 크게 떨어졌다.

    톈진은 톈진 그 自體로 認定받지 못하고 恒常 ‘베이징의 무엇’으로서만 存在한다. 톈진은 베이징이 바다로 오갈 수 있는 베이징의 港口다. 톈진은 베이징에 비해 人口가 적고 生活環境이 快適하며 物價가 싸다. 그래서 베이징인은 週末에 톈진에 와서 바람을 쐬거나 쇼핑을 하고, 結婚式을 올리기도 한다. 卽, 톈진은 베이징의 休息處이자 割引 쇼핑센터다.

    베이징, 톈진, 허베이를 묶어서 ‘징진지(京津冀)’ 地域이라 한다. 首都圈이긴 하되 江南의 經濟力에 밀려 體面이 서지 않자 政府는 首都圈을 발전시키기 위해 ‘징진지 프로젝트’를 稼動했다. 그런데 세 地域이 서로 協力해 上昇作用을 일으키기보다는 限定된 資源을 나눠 먹는 제로섬 게임처럼 競爭하는 탓에 成果가 遲遲不進한 便이다.

    首都 베이징은 돈 되고 폼 나는 3次 産業으로 가려고 ‘3高(高)1低(低)’ 企業(勞動力·資本 投入, 에너지 消耗, 汚染 物質 排出은 많고 效率은 낮은 企業)들을 톈진과 허베이가 가져가길 願한다. 톈진과 허베이는 當然히 부루퉁하다. 베이징이 그間 징진지 一帶의 人材, 自願, 優秀 企業, 高附加價値 産業들을 몽땅 獨차지하고도 이제 와서 힘들고 돈 안 되는 것들만 떠넘기려 한다고 怨望한다.



    빈하이 大爆發

    허베이는 워낙 落後돼 있기에 協議에 따라 여러 産業을 받아들여 發展을 꾀할 餘地가 있다. 그러나 톈진은 이미 相當히 發展했고, 베이징과 産業·經濟路線度 비슷하며, 市民들의 要求 水準도 높다. 베이징과 허베이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格이다. 톈진시의 한 幹部는 “베이징과의 合倂 以外에 톈진을 發展시킬 方道가 없다”고 歎息했다. 숱한 低發展 地域에 비하면 배부른 엄살이긴 해도, 베이징에 치여 사는 톈진의 苦衷을 端的으로 보여준다.

    東北亞 國際物流·航運의 中心으로 거듭나려는 톈진의 野望은 빈하이 新舊(濱海新區)에서 드러난다. 톈진 빈하이 新舊는 1980年代 광둥省 經濟特區, 1990年代 상하이 푸둥 新舊를 잇는 核心 經濟特區로, 환渤海經濟開發區의 中心이다. 2010年 末 이미 ‘포춘’地 選定 500大 企業 中 285個 會社가 投資하고 事務室을 여는 等 外國人 直接投資(FDI) 成果도 눈부셨다. 美國 보잉사와 함께 世界 航空市場을 兩分하는 유럽 에어버스 航空社는 빈하이에 工場을 세웠다. 원자바오 當時 總理가 高級 製造業을 성장시키고 싶어 하던 故鄕 톈진의 宿願을 풀어준 셈이다.

    그러나 華麗하게만 보이던 빈하이의 裏面을 赤裸裸하게 보여준 事件이 일어났다. 지난해 8月 12日 밤 빈하이에서 發生한 大爆發 事故가 그것이다. 近處 빌딩에서 爆發 動映像을 撮影하던 사람은 暫時 後 두 番째 大爆發이 일어나자 그 衝擊波로 쓰러졌다. 바닥에 나뒹군 채 天障만 보여주던 携帶電話는 옆에서 多急하게 외치는 소리를 들려줬다.



    “사람이 쓰러졌어!”

    巨大한 火焰은 불의 神이 降臨한 것 같았고, 시커먼 버섯구름은 核爆彈이 떨어진 듯했다. 다음 날 아침, 톈진항 野積場에 빽빽하게 駐車돼 있던 새 車들은 불에 타 殘骸만 남았다. 火災 現場의 검은 잿더미는 地球의 深淵으로 통하는 구멍처럼 보였다. 여기에 故人 물웅덩이는 시안화나트륨이 基準値의 40倍를 超過했고, 一部 支店에서는 800倍를 超過했다. 事故 現場에서 1.8km 떨어진 韓國 僑民 아파트의 窓門이 박살 난 場面이 韓國 뉴스에 報道됐다. 톈진의 젖줄 하이허(海河)에는 떼죽음을 當한 물고기들이 둥둥 떠올랐다.

    시안화나트륨은 비를 만나 시안화수소가 된다. 시안화수소는 나치가 유대人 虐殺에 使用한 猛毒性 氣體다. 中國發(發) 微細먼지에 시달리던 韓國 亦是 시안화나트륨이 微細먼지와 함께 바람을 타고 와서 毒劇物 비가 되어 내릴 것이라는 恐怖에 휩싸였다.

    中國 規定에 따르면, 住居 地域 半徑 1km 內에서는 危險物 倉庫를 設置할 수 없고, 시안화나트륨은 24t만 取扱할 수 있다. 그러나 루이하이 物流會社는 이 모든 規定을 어겼다. 애初에 許可도 없이 倉庫를 運營했고, 아파트 團地가 事故 現場에서 不過 600m 안에 있었으며, 시안화나트륨을 700t이나 쌓아뒀다. 規定을 이렇게까지 어긴 背景에 危險物을 監督·規制하는 孔安國의 默認이 있을 것이라는 疑惑이 불거졌다.

    腸멍판(張夢凡)은 當時 事件 現場에서 不過 1km 距離에 있는 消防署에서 通信館으로 勤務했다. 그는 最近 BBC 뉴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밤 10時 53分에 申告 電話가 걸려왔고, 同僚들은 10分 만에 現場에 到着했다. 첫 爆發 後 同僚들의 連絡을 기다리던 中 열暴風이 느껴졌다. 地震인가 했는데 두 番째 爆發이 일어났고, 消防署의 門, 지붕, 窓門이 날아가버렸다. 同僚들과 連絡을 取하기 위해 모든 手段을 取해 2名의 運轉士와 交信이 됐으나 곧 連絡이 끊겼다. 同僚들의 携帶電話는 모두 끊겼고 아무도 應答하지 않았다.”



    統制와 不信

    結局 그의 同僚 8名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中에는 19歲 消防官도 있었다. 173名의 死亡者 中 104名이 消防官이었다. 그러나 消防官 家族들은 政府가 事件 發生 後 며칠이 지나도록 生死조차 알려주지 않는다며 嗚咽했다.

    事件이 터지자 루이하이의 즈펑(只峰) 社長은 精神的 衝擊으로 쓰러져 入院했으며 말을 하지 못한다는 內容의 記事가 寫眞과 함께 報道됐다. 事件 調査 中 交通運輸委員會 行政審鄙處 둥융춘(董永存) 處長이 墜落死한 것도 疑惑을 增幅시켰다.

    政府의 公式 發表에 따르면, 톈진 빈하이 大爆發 事件으로 173名이 죽었고(8명은 失踪), 797名이 負傷을 當했다. 建物 304채, 車輛 1萬2428代, 컨테이너 7533個가 破壞됐고, 11億 달러의 損害를 입었다.

    그러나 많은 中國人이 政府의 發表를 믿지 않았다. 애初에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人材(人災)였으며, 主要 關係者들은 規定을 어기고 眞相을 隱蔽했다. 事件 調査는 透明하지 않았고, 處理 方式은 매우 미적지근했다. 言論 報道뿐만 아니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徹底히 統制됐다. 事件 處理가 속 시원하지 않은데 言路를 막아놓으니 온갖 流言蜚語와 怪談이 橫行했다. 現地 公營放送 톈진衛星TV가 뉴스 報道는 하지 않고 韓國 드라마 ‘糟糠之妻 클럽’을 放映한 것은 뭇 사람의 公憤을 샀다.

    旅行 中 만난 中國人 親舊는 “外國 言論은 톈진 爆發事故 犧牲者를 몇 名이라고 報道했느냐”고 내게 물었다. 外國 言論도 中國의 公式 發表를 引用해 報道했다고 말하자, 그는 釋然치 않다는 듯 말했다.

    “現場 近處엔 많은 居住民이 있었고, 세 次例나 投入된 消防手들은 제대로 살아남지 못했어. 그런데 죽은 사람이 200名도 안 되겠니? 中國人들은 言論에 報道된 死亡者 數보다 5倍쯤 많을 거라고 생각해. 내 親舊 한 名은 消防官으로 2~3年 일했는데, 톈진 爆發事故가 일어난 後 退職하고 딴 일자리를 求하더군.”

    그의 말은 正確한 情報와 事實에 根據하지 않은 推測에 不過해 信憑性은 떨어진다. 그러나 緋緞 톈진 爆發事故만이 아닌 다른 事件·事故에 對해서도 政府와 言論이 信賴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雰圍氣만큼은 確實히 알 수 있었다.



    高速成長의 그림자

    톈진 빈下이신구 爆發事故는 中國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中國은 外見上 華麗하고 힘차게 發展하고 있다. 하지만 그 裏面에는 온갖 不淨腐敗를 저지르고 法規를 無視하며, 莫大한 被害를 내고서도 眞相을 隱蔽하고 言論을 統制한다. 勿論 中國은 아직도 發展 道上에 있고 成長痛을 겪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事件·事故들이 成長의 밑거름이 되려면 徹底하게 原因을 糾明하고 不合理를 是正하는 한便, 죄지은 者를 嚴格하게 벌하고 人民들과 疏通·合意하는 過程이 必要하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런 事件이 繼續 再發할 것이다.

    中國의 2015年은 大型 人材(人災)의 해였다. 광둥省 선전에서는 山비탈에 違法으로 쌓은 建築·産業 廢棄物이 무너져 7名이 죽고 70餘 名이 失踪됐으며, 상하이 황푸江에서는 새해맞이 레이저쇼를 보려고 31萬 名의 人波가 몰렸다가 35名이 죽고 43名이 다치는 壓死 事故가 일어났다. 主張 三角洲의 中心 宣傳, 長江 三角洲의 中心 상하이, 渙發해의 中心 톈진에서 벌어진 人材는 中國 成長의 그림자를 드러냈다.

    톈진 爆發事故 1周年이 돼가던 지난 8月 11日 후베이省 當陽(當陽)詩에서는 火力發電所의 高壓 蒸氣管이 爆發해 21名이 죽고 5名이 부상당했다. 首都의 關門이며 渙發海經濟圈의 中心으로 成長해온 톈진. 그러나 高速成長 裏面에 수많은 宿題가 山積한 中國의 現實을 톈진 亦是 共有하고 있다.



    金 龍 한

    ● 1976年 서울 出生
    ● 연세대 物理學科, 카이스트 Techno-MBA 專攻
    ● 前 하이닉스반도체, 國防技術品質院 硏究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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