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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出身 民境遇 “曺國, 말에 어울리는 責任을 져온 사람 아냐”|신동아

NL出身 民境遇 “曺國, 말에 어울리는 責任을 져온 사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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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석 記者

    jayko@donga.com

    入力 2019-08-26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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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文政權, 過大評價된 運動圈을 過剩 起用”

    • “386 이데올로기 탓에 靑年들이 世上을 陰謀論으로 봐”

    • “‘사랑도 名譽도 이름도 남김없이’ 싸운 사람 文政權에 없어”

    • “運動圈에 느슨히 묶여 있던 敎授들, 觀念的으로 過激”

    • “文 大統領은 386에 依해 拔擢된 사람”

    • “데모할 때 안철수·김택진·李海珍이 工夫해 産業化 일궈”

    • “運動圈, 便 가르기로 世上 몰아와”



    [박해윤 기자]

    [박해윤 記者]

    閔境遇 閔境遇數學敎育硏究所 所長은 1965年生이다. 1983年 서울대 醫豫科에 合格한 後 中退했고, 이듬해 같은 學校 國史學科에 再入學했다. 그는 “(醫大에) 入學하고 나니 칸트니 헤겔 같은 獨逸 哲學에 對한 學習 雰圍氣가 있었다. 또 第3世界 民族主義가 學生運動에 相當히 큰 影響을 미치고 있어 再修를 했다”고 回顧했다. 典型的인 386世代다. 

    스무 살 閔境遇는 學生運動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1987年 서울대 人文大 學生會長으로 6月 抗爭에 參與했다. 以後 그의 삶은 現在 權府(權府)를 주름잡고 있는 ‘運動圈 親舊들’과 사뭇 달랐다. 그는 學生會長 出身의 386 運動圈이 ‘젊은 피 輸血’ 名目으로 制度圈에 하나둘 吸收될 때도 運動 現場에 남았다. 

    NL(民族解放)系列 運動에 關한 한 386 中 그의 앞에서 勳章(勳章) 내밀 사람은 많지 않다. 閔 所長은 1995年부터 2005年까지 祖國統一汎民族聯合(범민련) 事務處長으로 일했다. 統一連帶에서도 活動했다. 그 期間 두 番에 걸쳐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로 拘束됐다. 2005年 出所한 뒤 民主勞動黨에서 活動했다. ‘閔境遇가 쓴 統一運動史’ ‘民族主義 그리고 우리들의 大韓民國’ 같은 冊도 냈다. 本人 表現대로 “野戰司令官 같은 運動家”의 삶을 살았다.

    386의 區別 짓기

    그러다 “NL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해 2007年부터 2012年까지 內部 子正活動”에 나섰다. 이것이 如意치 않자 2012年부터 運動家의 삶을 접고 協同組合 形態로 서울 衿川區에서 學院을 運營했다. 只今은 “數學敎育 革新에 人生 3期를 걸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韓國을 科學技術과 經濟·企業에 親和的인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主張한다. 十數 年 전 ‘韓美FTA沮止 汎國民運動本部 政策企劃팀長’으로 活動했던 그로서는 人生 反戰 드라마다. 8月 6日 서울市 中區의 한 카페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學院을 運營하면서 實物經濟 最前線에 선 事業主가 된 셈인데요. 運動家日 때와는 다른 깨달음을 얻은 게 있나요? 

    “저는 富者집에서 태어났어요. 한 番도 돈을 벌어보거나 돈이 없어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協同組合을 運營하니까 많을 때는 10名 程度 職員을 雇用해야 하잖아요. 그때 몇 가지 深刻한 問題를 느꼈어요. 먼저, 돈이 生産과 經營의 效率性을 나타내는 매우 重要한 指標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勞動者들에 對해 너무 過保護 狀態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勞動廳에도 여러 番 갔거든요.” 

    -勞動廳이요? 

    “저는 줄 거 다 줬어요. 이 親舊들(學院 講師)이 나갈 때는 그냥 나가지 않고 뭔가 꼬투리를 잡아요. 例를 들어 어디에 安全裝置를 안 했다느니 이런 式으로 問題 삼습니다. 只今은 經濟 現場 雰圍氣가 勞動 優位의 法秩序下에 있어요. 奴僮廳에서, 氣分 탓인지 모르겠습니다만 罪人 取扱받았어요. 勿論 나중에는 無嫌疑 處理됐죠. 마치 ‘企業主는 勞動者를 搾取해서 뭔가 利得을 얻으려는 탐욕스러운 사람’이라는 社會 雰圍氣가 隱然中에 形成돼 있어요.” 

    -젊은 世代의 認識에서 말인가요? 

    “네. 協同組合이니까 實力이 조금 不足해도 웬만하면 講師로 쓰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一旦 雇傭이 되면 努力을 안 하더라고요. 150萬 원을 주는데, 150萬 원의 附加價値를 못 만들어내요. 386이 세팅해놓은 異常한 이데올로기가 特히 靑年들에게 宏壯히 많이 퍼져 있어요. 이 親舊들이 자꾸 社會를 陰謀論으로 봐요. 陰謀 없잖아요. 저 보고는 ‘저 사람은 協同組合 한다고 하면서 뒤로는 애들을 搾取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요. 오히려 저는 (學院 運營하다) 亡했어요.” 

    386은 民主化 世代라고도 불린다. 이 單語에는 妙한 ‘區別 짓기’ 欲望이 엿보인다. 物質과 價値를 선 가르듯 나눈 後 自身들은 價値를 좇아 살았다는 選民意識이 이들의 感受性을 支配한다. 故로 民主化 世代는 産業化 世代를 評價 切下한다. 정작 閔 所長은 “學院을 運營하며 깨달은 게 하나 더 있다”면서 ‘民主化 世代와 돈’을 話頭로 꺼냈다. 

    “저는 (學院에서) 民主化 世代의 子女들을 가르치고 싶었어요. 그런데 民主化 世代는 宏壯히 돈이 많더라고요. 내가 저 사람들에게 돈을 깎아주면서 가르쳐야 할 理由가 全혀 없는 거예요. 내가 (그들이 가난할 거라고) 錯覺하고 있었던 거죠. 정작 가난한 애들은 너무 어려워서 學院에 오지 않았어요.” 

    그는 學院을 運營할 때 “밑바닥에서 價値 衝突이 많이 發生했다”고 덧붙였다. “民主化 運動의 影響力下에 있던 사람들이 애들에게 數學 가르칠 생각은 안 하고 ‘歷史가 重要하다’ 뭐 이랬다”는 것이다.

    政權의 이너 서클

    386 世代는 不義한 世上을 告發하고 뜨겁게 鬪爭하던 世代였다. 이들이 목청껏 부르던 ‘임을 위한 行進曲’은 이런 歌詞로 始作한다. ‘사랑도 名譽도 이름도 남김없이 限平生 나가자던 뜨거운 盟誓….’ 그러나 이들은 벌써 20年 가까이 國會에서 名譽와 이름을 限껏 드높이고 있다. 文在寅 政府 出帆 後에는 靑瓦臺 祕書室長(任鍾晳)과 主要 首席祕書官(曺國, 鄭泰浩, 韓秉道 等) 자리를 꿰찼다. 公企業 社長(오영식 前 코레일 社長)이나 工團의 首長(金聖柱 國民年金公團 理事長)이 돼 經營者로 나서기도 했다. 只今 그들은 比較할 對象이 없는 政權의 ‘이너 서클’이다. 

    -‘사랑도 名譽도 이름도 남김없이’를 되뇌던 386들이 學生會長 經歷을 발板 삼아 30代 나이부터 國會議員이 됐습니다. 

    “1995年을 境界로 해서 ‘87年 運動’했던 사람들이 세 그룹으로 나뉘어요. 한便에 저처럼 繼續 運動을 한 사람들이 있죠. 저 같은 사람들은 制度圈에 갈 수 없는 狀態가 됐어요. ‘사랑도 名譽도 이름도 남김없이’ 싸운 사람들은 現在 문재인 政權에 없어요. 唯一한 例外는 殷秀美 城南市長 程度? 은 市場이 社勞盟(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活動으로 6年 服役했거든요. 저는 서울대 人文大 學生會長 할 때 政治하라는 提案을 받았지만 繼續 運動을 했습니다. 反面 여러 사람이 1990年代 後半~2000年代 初盤부터 政治權으로 가기 始作했어요.” 

    -그때 政治權에 進出한 분들이…. 

    “李仁榮, 송영길, 任鍾晳, 오영식 이런 親舊들이죠. 그들이 主로 2000~2004年 國會에 入城하는데, 이미 1990年代 中盤부터 移動하고 있었어요. 그때부터 運動圈에서 빠지면서 制度圈에 進出하기 위한 基礎 作業들을 해놓은 겁니다, 그러니 繼續 運動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構造的으로도 只今 文在寅 政權에 있기 어려워요. 制度圈에 進出한 또 다른 386 系列은 辯護士, 敎授 그리고 私敎育 市場에서 돈을 充分히 벌고 2004~2008年에 合流한 사람들이죠.” 

    -鄭鳳柱, 鄭淸來 氏 같은…. 

    “네. 鄭淸來 氏가 麻布에서 學院 運營하면서 돈을 充分히 번 뒤 政治權에 간 케이스죠. 曺國 前 民政首席도 일찍 運動 그만두고 敎授를 하면서 참여연대에서 活動했죠. 또 辯護士들이 있고요. 卽 韓國 經濟成長 過程의 受惠者로서 相當한 財産을 얻은 뒤 政治權으로 進入한 거예요. ‘사랑도 名譽도 이름도 남김없이’? 그거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은 制度圈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制度圈 386은 自身들이 歷史를 이끌었다는 宏壯한 自負心을 갖고 있는 듯한데요. 

    “元來 運動을 適當히 한 사람들이 第一 過激합니다. 저만 해도 1987年 6月 抗爭 때 내가 죽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1996年 ‘連帶 事態’ 때는 제가 리더 中 한 名이었어요. 苦悶 많이 했어요. ‘高(go)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요. 勞動 現場에서 ‘뻥 罷業’이라고 생각하면 罷業 贊成率이 매우 높습니다. 實際 罷業이라고 생각하면 贊成率이 낮아져요. 그러니 運動圈 最前線에 있던 사람들은 愼重히 決定해요. (反面) 運動圈에 느슨하게 묶여 있던 사람들, 特히 敎授들이 第一 過激합니다.” 

    -말과 主張만 過激하다? 

    “제가 2006~2007年 敎授들하고 일을 좀 해봤어요. 이 사람들은 現場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저는 現場에서 싸우는 사람이니 신중해야 해요. 잘못됐다가 자칫 돈이 나가고, 監獄도 살아야 하고, 또 맞기도 하거든요. 敎授들은 그런 負擔이 없으니까 막 질러요. 過激함은 그 사람들이 熾烈하게 運動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熾烈하게 運動을 ‘案’ 했기 때문에 나오는 거예요. 運命을 걸고 싸워야 할 때는 다 버려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깨끗해져요. 그런데 저들은(교수들은) 뭐 다 챙겨놓고 말로만 하는 건데….” 

    그러면서 閔 所長은 “386世代가 말과 行動이 다르다”고 했다. 그는 “나는 우리 아들을 科學高나 특목高에 보내지 않았고 課外도 안 시켰다. 甚至於 再修學院도 問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大部分 386 子女들이 特目高·外高 갔더라. 荒唐했다”고 했다.

    1980年代 後半의 情緖

    [박해윤 기자]

    [박해윤 記者]

    閔 所長이 2007年 出刊한 ‘民族主義 그리고 우리들의 大韓民國’은 NL 陣營에서 적잖은 話題를 낳았다. 當時는 學界를 中心으로 民族主義 批判 談論이 洑물처럼 쏟아질 때였다. NL의 이데올로그였던 그는 ‘抵抗的 民族主義’의 可能性을 肯定 評價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竹槍을 들자’(조국 前 首席), ‘第2의 獨立運動 精神으로 勝利하겠다’(이인영 民主黨 院內代表) 等 韓日 葛藤 局面에서 與圈에 橫行하는 ‘레토릭’과 결이 通한다.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曺國 前 首席이 “只今 重要한 것은 ‘愛國이냐 移籍이냐’이다”라고 했습니다. 李榮薰 서울대 名譽敎授 等이 쓴 ‘反日 種族主義’를 두고는 “(著書에) 同調하는 一部 政治人과 記者를 ‘附逆·賣國 親日派’라는 呼稱 外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고도 했고요. 

    “荒唐하죠. 韓日 葛藤은 正말 深刻한 局面으로 가겠다는 危機感을 많이 느끼거든요. 그렇다면 危機에 맞게 對應해야죠. 正말 竹槍을 들고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祖國 程度의 位置에 있는 리더는 ‘내가 責任지고 싸우겠다’는 態度를 보여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아니라고 봐요. 그가 하는 말이 거짓은 아니겠지만 그냥 되는 대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本人은 現場에서 싸우지 않으니까요. 살아온 人生을 보면 그런 마인드 自體가 아니에요. 本人 말에 어울리는 責任을 져온 사람이 아니에요.” 

    -민주당은 韓日葛藤 對策위를 ‘經濟侵略對策特別委員會’라 명명하고 委員長으로 386人 최재성 議員을 임명했습니다. 마치 抗日運動을 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주는데요. 

    “1980年代 後半에 形成된 패러다임을 只今도 갖고 있을 걸로 推定됩니다. 崔宰誠, 薛勳, 曺國 이런 사람들이 하는 말은 高度의 政務的 戰略에 따른 것이 아니에요. 그냥 80年代 後半의 情緖가 배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분들이 30餘 年 前 20代 靑年으로 되돌아간 거네요?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代替 왜 이분들이 抗日鬪爭의 感性을 只今까지 갖고 있나요? 386이 實際로 日本과 싸운 世代도 아닌데요. 

    “親日은 朴正熙를 攻擊하기 위한 手段이었어요. 卽 光州나 獨裁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니까 軍部政權을 두고 ‘너희는 親日派’라고 規定하면서 自身들의 歷史觀을 만들어온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現實과 密着된 삶을 살지 않았어요. 主로 私敎育 先生이나 敎授였잖아요. 企業에서 일하거나 科學技術을 조금 더 알았다면 韓國과 日本의 關係가 얼마나 密着돼 있는지, 韓日 間 經濟 네트워크가 얼마나 緊密하게 엮여 있는지 理解하잖아요. 그런데 옛날에 日帝가 우리나라를 侵略했고, 우리나라는 如前히 買辦資本이라고 보는 거죠. 그들은 아직도 三星을 買辦資本이라고 생각할걸요?”


    “土着倭寇? 장난 같은 얘기잖아요”

    -문재인 大統領은 386이 아닌데도 “다시는 日本에 지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하거든요. 

    “文 大統領이 代表的으로 觀念的 過激性을 갖고 있는 분입니다. 盧武鉉 前 大統領은 民主化運動 때 一線에서 싸운 사람이에요. 盧 前 大統領이 싸우는 場面들이 있잖아요. 白骨團 앞에 두고 혼자 맨 앞에 앉았는데, 그거 쉬운 일 아니거든요. (反面) 文 大統領은 實際로 一線에서 싸운 사람이 아니에요.” 

    -文 大統領도 當時 釜山 等地에서 民主化運動을 하지 않았습니까? 

    “文 大統領이 示威하는 場面을 담은 寫眞 한 張이라도 보셨어요? 제가 記憶하는 건 空輸部隊 寫眞 程度밖에 없는데요. 文 大統領은 盧 前 大統領처럼 意味 있게 民主化運動을 한 분이 아니에요. 저는 文 大統領이 386에 依해 拔擢된 사람이라고 봐요. 盧 前 大統領은 3黨 合黨 以後 自己만의 領域을 開拓하며 滋養分을 얻었잖아요. 또 勝負師的 氣質이 있으니 柔軟했어요. 前 이라크 派兵이나 韓美FTA에 反對했어요. 只今은 大統領으로서의 노무현을 認定합니다. 運動圈 一線에서 政策·政務 判斷을 한 經驗이 있기 때문에 그런 決斷을 내릴 수 있었을 겁니다. 文 大統領은 그런 經驗이 없어요.” 

    그러면서 그가 親和性이 높은 세 政權(金大中·노무현·文在寅)을 이렇게 比較했다. 

    “김대중·노무현 政權은 座·右派의 均衡을 맞추려고 했어요. (反面) 文在寅 政權은 過大評價된 運動圈을 過剩 起用하고 있어요. 文 政權에 있는 運動圈 리더들은 專門性에 對한 經驗이 不足하거나 없는 사람들이에요. 科學技術 知識은 全無할 것으로 보입니다. 글로벌 感覺은 거의 없겠죠. 金大中, 노무현 두 분은 民主化 運動과 現代化된 專門家들을 結合하면서 캠프를 構成했는데, (文在寅 政權은) 靑年, 企業, 科學技術人, 專門家 集團을 排斥하면서 擡頭한 集團 같습니다. 그러니까 相當히 思辨的이잖아요. 觀念的 過激性이 거기서 나타나죠.” 

    -與圈에서는 曺國 前 首席이나 78學番이지만 386時代를 代表하는 柳時敏 氏가 大權 下馬評에 오르내리는데요. 그들이 執權하면 그야말로 ‘386時代’가 到來할 텐데요. 

    “그렇게 되면 宏壯히 深刻한 局面으로 간다고 봐요. 美國의 汎(汎)世界戰略이 變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政府가 太平洋司令部를 印度·太平洋司令部로 改編했잖습니까. 意味深長한 대목이에요. 또 글로벌 自由貿易主義가 保護貿易主義로 回歸하고 있고, 北韓의 核威脅이 如前하죠. 科學技術의 發展과 低出産, 高齡化 等 엄청난 이슈가 散在해 있어요. 하지만 只今의 386 權力集團은 그런 이슈를 다룰 能力이 缺如돼 있어요. 그들이 正말 時代 變化에 맞게 思考하는지 저는 深刻한 疑問을 갖고 있습니다. ‘親日派 淸算’ ‘土着倭寇’ 이런 말은, 뭐 할 수야 있는데 장난 같은 얘기잖아요, 國內用이고.”

    管制 民族主義

    민경우 민경우수학교육연구소 소장은 “문재인 정권의 운동권 리더들은 전문성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거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박해윤 기자]

    閔境遇 閔境遇數學敎育硏究所 所長은 “文在寅 政權의 運動圈 리더들은 專門性에 對한 經驗이 不足하거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박해윤 記者]

    -최장집 敎授는 ‘官製(官製) 民族主義’라고도 하더군요. 

    “같은 생각입니다. 저는 (敎育) 現場에서 正말 많이 봐요. 數學科 尖端 技術을 배워야 할 아이들이 親日派 淸算을 해야 한다고 말해요.” 

    -只今 學生들이요? 모두 2000年 以後 出生日 텐데요? 

    “네. 그래서 ‘어떤 데서 親日派 淸算을 하면 좋겠니’라고 물었더니 對答을 못해요. 事實 親日派 淸算할 게 別로 없거든요. 反日運動을 하려고 해도 뭐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러니) 日本 나무를 베겠다느니 뭐 이런 式의 허황된 얘기를 합니다. 그게 一線 (敎育) 現場에서의 民族主義죠. 學生들이 ‘暗殺’ 같은 映畫 보고 와서 그런 얘기를 해요. 또 全敎組 敎師들이 實體가 別로 없는 陰謀論 같은 얘기를 해요. 特히 올해 正말 問題라고 느꼈던 건 ‘3·1運動 100周年’을 記念해서 地域에 플래카드가 붙는데, 거기에 重慶 臨時政府 얘기가 나와요. 왜 저러지 했어요. 政權과 386世代가 人爲的으로 (民族主義를) 부추긴 겁니다.” 

    -‘새로운 保守의 아이콘’이라는 冊에 우리 社會에는 柳時敏·金於俊 같은 論客은 待接하고, 안철수·김택진·李海珍 같은 IT 企業家는 貶下하는 雰圍氣가 蔓延해 있다고 썼던데요. 

    “正말 荒唐해요. 1980年代에 제가 데모했잖아요. 저는 데모 안 하고 工夫하고 싶었어요. (反面) 그 當時 안철수(80學番)나 김택진(85學番), 李海珍(86學番) 같은 사람들이 熱心히 工夫해서 韓國의 産業化를 일궜잖아요. 386 政治人들이 그 사람들 데려다가 ‘내가 工夫 못했으니까 當身의 專門性을 빌릴 테니 나라를 더 크게 키워보자’ 이렇게 얘기해도 시원치 않을 판이에요. 그런데 國會議員들이 李海珍을 데려다가 完全히 바보를 만들어버리잖아요. ‘구글의 優勢 속에서 네이버를 이끄는 當身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이런 얘기를 묻고 같이 討論하는 게 政治人들이 할 일이잖아요. 그런데 네이버 檢索이 어떻다는 둥 얘기하는 水準이란 게 참….”

    柳時敏과 李海珍

    閔 所長은 유시민 前 保健福祉部 長官을 두고 “워낙 똑똑한 분”이라면서도 “現場感 있는 말과 사람들을 사로잡는 글솜씨를 갖고 只今의 位置를 차지했지만 專門性이랄지 政務 感覺은 없다. 國民參與糖度 失敗하지 않았나”라고 했다. 그러면서 敷衍했다. 

    “2012年 以後 저는 科學技術을 통해 어떻게든 韓國을 再構成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柳時敏, 金於俊)들은 歷史와 팬덤, 陰謀論, 便 가르기, 觀念的 過激性 같은 걸로 6~7年間 世上을 몰아왔어요. 젊은 親舊들이 거기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많이 包攝돼왔어요. (그런 데서) 精神的인 慰安을 가질 수는 있을지 몰라도 結局 實力이 말해주는 겁니다. ‘韓國에 科學技術이 있어?’ ‘스스로 安保를 지킬 수 있어?’ ‘새로운 産業構造를 創出할 能力이 있어?’라고 물었을 때 비전으로 立證해야죠.” 

    -只今 생각하는 進步는 무엇인가요? 

    “一旦 팩트에 忠實했으면 좋겠어요. 狂牛病, 베네수엘라 事態, 드루킹 事件 같은 데서 (進步陣營이 하는 말을 듣고) 衝擊을 받았어요. 팩트가 드러나면 認定해야 하는데 우리는(386은) 그렇게 배우지 않았던 것 같아요. 또 專門性에 忠實해야 합니다. 原子力이면 原子力 發展 專門家들, 韓日 문제면 外交 專門家가 있잖아요. 무엇보다 實用主義 觀點에서 國益에 充實해야 해요. 그러려면 科學技術人과 企業人의 役割이 重要해요. 386 主流는 大部分 門과 出身들이에요. 이제는 科學技術人들이 發言해야 합니다.”



    고재석 기자

    고재석 記者

    1986年 濟州 出生. 學部에서 歷史學, 政治學을 工夫했고 大學院에서 映像커뮤니케이션을 專攻해 碩士學位를 받았습니다. 2015年 下半期에 象牙塔 바깥으로 나와 記者生活을 始作했습니다. 流通, 電子, 미디어業界와 財界를 取材하며 經濟記者의 文法을 익혔습니다. 2018年 6月 동아일보에 入社해 新東亞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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