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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 將軍 評價는 좀 더 두고 본 다음에…”(1980년 6月號)|新東亞

‘신동아’ 報道로 본 전두환과 韓國 現代史

“全 將軍 評價는 좀 더 두고 본 다음에…”(1980년 6月號)

  • 이혜민 記者 | behappy@donga.com

    入力 2016-06-08 15: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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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州, 그 悲劇의 10日間’과 新東亞 製作 妨害
    • 光州 市民 受難史 끈질기게 報道
    • 5·18 眞相糾明 特別法 制定 促求
    • 全·盧 隱匿 疑惑 祕資金 追跡
    전두환 前 大統領 夫婦가 退任 後 30年 만의 첫 인터뷰를 ‘신동아’와 갖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專 前 大統領의 서슬 퍼런 新軍部가 言論에 재갈을 물렸을 때 신동아는 勇氣 있는 報道로 5·18民主化運動의 眞實을 알리려 奮鬪하면서 民主化의 熱望을 싹틔웠다.

    1985年 新東亞 7月號에 揭載된 ‘다큐멘터리-光州, 그 悲劇의 10日間’ 題下의 特輯記事와 關聯해 當時 동아일보 出版局長과 신동아部長, 取材記者가 保安司令部에 連行돼 調査를 받는 等 신동아는 1984年부터 1987年 9月까지 當局으로부터 苛酷行爲, 不法連行調査, 記事 全面 削除 및 部分 削除와 修正 等 20件에 이르는 彈壓을 받았다.

    1987年 10月號는 初有의 製作 彈壓 事態를 맞았다. 1973年 김대중 拉致事件에 對한 이후락 前 中央情報部長의 證言 記事와 關聯해 그해 9月 20日 밤 國家安全企劃部 搜査要員들이 新東亞 印刷處인 동아印刷工業 尹前室을 占據해 印刷를 中斷시켰다. 以後 7泊8日에 걸친 記者들의 抗議 籠城이 이어지며 國內外로 波紋이 擴散되자 政府는 結局 ‘이후락 氏 證言記事 揭載 與否는 言論社 自律에 맡긴다’는 聲明을 發表하기에 이른다.



    ‘光州事態’ 5年 뒤 記事化

    ‘요즘 世間에는 中央情報部長署理로 任命된 전두환 將軍에 對한 關心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歷史的인 ‘10·26 事件’ 後 가장 有名해진 사람이 바로 前 將軍이다. 그는 10·26 後 戒嚴司 合同搜査本部長으로 이 事件의 搜査 全貌를 直接 發表 , TV 畵面과 新聞紙上에 클로즈업됐다. 더욱이 지난 4月 14日 中央情報部長署理에 任命됨으로써 前 將軍에 對한 國內外의 關心은 한層 높아졌는데, “軍은 政治에 關與하지도 않으며 關與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나의 所信이다”라고 機會 있을 때마다 强調한다.’




    ‘全斗煥’(以下 呼稱 省略)은 1980年 6月號에 처음으로 登場했다. 〈그 話題 그 人物〉 ‘中央情報部長署理 전두환 中將’李 1쪽에 걸쳐 紹介됐다. 記者는 全斗煥의 執權 可能性이 높던 터라 ‘陸士 11基의 先頭走者요, 保安司令官 兼 중정部長署理인 前 將軍에 對한 評價는 좀 더 두고 본 다음에 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며 評價를 미뤘다.

    ‘全斗煥’은 1980年 10月號 전두환 大統領의 執權 後 課題를 묻기 위한 〈座談〉 ‘새 政府가 해야 할 일들’(배성동 서울大 政治學 敎授, 정범석 大韓敎育聯合會 會長, 한승조 고려대 政治學 敎授, 남시욱 동아일보 論說委員 參席)에서도 擧論된다.



    “國政調査權으로 眞相 밝혀야”

    1980年 일어난 5·18 光州民主化運動 關聯 記事는 1985年 7月號에 처음 실렸다. 〈特別企劃 光州事態〉에 ‘다큐멘터리-光州, 그 悲劇의 10日間’은 事態의 推移를 32쪽에 걸쳐 紹介했다. 이 記事는 5·18의 眞實을 最初로 深層報道한 것으로 以後 신동아가 겪을 受難의 序幕이 됐다. 5·18 光州民主化運動은 1988年 名稱이 公式化하기 前까지 ‘光州事態’ ‘光州民衆抗爭’ ‘光州民衆蜂起’로 불렸기에 當時 신동아도 ‘光州事態’로 表記했다.

    1985年 7月號 톱기사는 ‘오늘의 問題를 診斷하는 新東亞 詩論-光州事態, 어떻게 해야 하나’(金榮作 민정당 國會議員, 朴燦鍾 신민당 國會議員, 강인섭 동아일보 論說委員 參席)다. 姜 委員이 “12代 國會(1985年 5月 13日 開院)는 禁忌로 돼 있던 光州事態가 本格的으로 論議된 最初의 國會”라고 評價하면서 ‘光州事態의 解決策’을 묻자 與野 議員은 ‘本質’을 다르게 짚었다.

    金 議員은 “光州事態를 調査하는 過程에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보이지 않는 流言蜚語의 威力이 傳統的으로 내려오는 光州 市民들의 地域感情에 불을 지르는 役割을 했다는 거예요”라며 ‘流言蜚語’를 事態의 中心에 뒀다. 反面 朴 議員은 “問題는 5·17 戒嚴擴大措置의 正當性에 있고, 5月 18日 새벽에 投入된 部隊가 나흘 동안에 찌르고 쏘지 않아도 될 良民들을 쏘고 했다는 데 있다”면서 “國政調査權을 發動해서 眞相을 糾明해야 한다”고 促求했다.

    신동아에 다시금 光州가 擧論된 것은 1987年 6月抗爭 즈음이다. 1987年 9月號는 ‘光州事態, 그날의 5가지 疑問點’을 통해 ‘왜 그토록 强勁한 鎭壓을 했나’ ‘왜 彗星처럼 나타난 示威隊 女性 指揮者는 사라졌을까’ ‘왜 21日에 戒嚴軍이 撤收했을까’ ‘示威隊의 武器 返納을 制止한 覆面部隊의 正體는 뭘까’ 等을 물으며 解決의 障礙物로 ‘死亡者 數에 對한 立場車’를 들었다



    1988年 1月號는 〈特輯〉 ‘새 大統領 選出 以後-‘光州事態’는 眞相부터 糾明해야’(한상진 서울대 社會學 敎授)를 통해 “光州事態 眞相 糾明이 次期 大統領의 最優先 課題”라고 主張한다. 當時는 第6共和國 出帆을 앞둔 時期로, 이때부터 第5共和國 分析 記事가 本格的으로 실렸다. ‘第5共和國 權力의 뿌리 하나회’ 記事는 ‘第5共和國 政權을 創出한 主導 勢力은 大部分 朴 大統領의 寵愛를 받은 하나회 멤버였다. 하나회를 통해 다져진 正規 陸士 出身 將校들의 結束이 12·12 事態의 命運을 가름했다’고 評價하며 하나회의 存在를 드러냈다.

    1988年 3月號에 실린 ‘爭點! 무엇이 ‘光州’의 眞相인가’는 民主和合推進委員會 證言, 空輸隊員 手記, 國防部 發表, 光州事態 文書 等을 總動員한, 眞相 糾明을 위한 質問書다. 이로써 “政權奪取 위해 故意 誘發한 것” “決코 流言蜚語만은 아니다!” “暗葬, 火葬 疑惑도 있다” “적어도 150餘 名 被殺” 等의 證言을 이끌어냈다.

    1988年 5月號엔 光州民主化運動 武裝市民軍의 手記 ‘光州市民은 왜 銃을 들었나’(광주 市民軍 박남선)가 실렸다. 市民軍 作戰狀況室에 모인 사람들의 ‘組織도’를 비롯해 鎭壓軍의 矯導所 隣近 無差別 亂射, 市民戰士 數百 名에 關한 ‘說明’李 收錄돼 當時 情況을 새로이 알렸다.



    新軍部 ‘光州 工作說’

    1988年 6月號는 ‘全斗煥 政權의 政經 癒着 非理’와 ‘전두환의 두 東西 金相球 홍순두와의 歲도’로 ‘到處에 散在한 絶對 權力의 7年 腐敗 現象’의 眞相을 追跡했다. 아울러 ‘颱風의 눈 ‘全斗煥 問題’, 그리고 光州’(한상범 東國大 憲法學 敎授)를 통해 “公職者의 過去 行跡에 對한 糾明은 民主化와 國家 發展을 위해 必要하다”고 强調했다. 1988年 7月號엔 ‘노태우 政府의 試驗臺, 全斗煥 調査와 光州問題’(조영래 辯護士)가 실렸다. 조 辯護士는 “光州事態, 全氏 非理 어물어물 넘길 수 없다”면서 “盧 政權은 낡은 胎줄을 斷乎히 끊어야 한다”고 要求했다.

    1988年 8月號엔 ‘國會 光州問題 攻防 爭點中繼-光州 發砲責任者는 누구인가’가 실렸다. 記者는 ‘7月 5日 13代 國會 本會議에서 光州 師團長 出身의 정웅 國會議員이 ‘光州事態’를 ‘執權을 노린 軍部의 陰謀’로 규정짓고 ‘12·12 事態 主動者들(場內 騷亂…), 다시 말해 軍部獨裁者들과 이 땅에 期必코 民主化를(장내 騷亂…) 꽃피우겠다는 光州 愛國市民들이 自身의 生命을 버리며 끝까지 맞서 鬪爭한 事實이 바로 光州民衆抗爭이라면서 이 行爲는 明白히 義擧였음을 闡明하는 바이다’라고 主張한 것을 契機로 國會 爭點-强勁鎭壓 指示者, 發砲命令權者, 정웅 師團長 責任 問題, 光州眞相 糾明 問題를 整理했다. ?

    1988年 12月號는 ‘물거품 된 전두환 永久執權 시나리오 : 88年 政權交替를 위한 準備硏究 專門’을 揭載했다. 2000年까지 全斗煥의 繼續 執權을 計劃한 極祕 文書의 內幕을 追跡했다.

    1989年 1月號엔 ‘前 光州 505保安隊 搜査官의 暴露手記 “내가 정웅 將軍을 逮捕 搜査했다”’(허장환)가 실렸다. 5·18光州民主化運動 當時 光州地區保安隊 上司이던 許氏가 12月 6日 평민당舍에서 良心 發言을 한 뒤 後暴風이 거세졌다. 許氏의 暴露는 ‘當時 實勢인 新軍部 勢力이 事態를 主導할 수밖에 없었다’는 論理로 ‘光州 工作說’의 根據를 提示했다는 點에서 關心을 끌었다.

    1989年 2月號는 〈深層特輯〉 ‘아직도 뜨거운 爭點, 全斗煥 處理’로 전두환에 對한 法的 責任 追窮을 强調했다. 같은 號에 실린 ‘光州의 眞相, 아직도 隱蔽되고 있다’는 “國會에 光州特委가 構成돼 文書檢證 및 現場 確認을 하는 한便 聽聞會를 열어 關係者들을 召喚·訊問했으나 國民이 期待한 眞相糾明에는 接近조차 못한 채 숱한 疑問만 부풀려 놨다”고 批判했다.



    김대중, 김영삼 寄稿

    1989年 7月號는 ‘전두환의 百潭寺 200日, 反擊說의 眞相’으로 ‘國會證言을 앞둔 전두환氏 캠프의 마지막 노림數’를 짚어봤다. 1989年 8月號 ‘證言拒否 최규하의 抗辯’은 “書面證言을 하겠다”는 崔 前 大統領과 “書面證言은 國民들의 알 權利와 公開政治原則에 違背되므로 聽聞會에 出席해 證言해야 한다”는 國會의 對立을 照明했다.

    1989年 12月號는 ‘12·12 10年, 兩金이 말하는 朴正熙, 전두환’ 企劃을 통해 當時 김대중 平和민주당 總裁, 金永三 統一民主黨 總裁의 글을 揭載했다. ‘그러나 歷史가 그들을 斷罪할 것이다’(김대중) ‘民族精氣를 위해 淸算해야 할 時代’(김영삼)가 當時 寄稿文의 題目이다.

    하지만 그해 12月 31日 聽聞會에 出席한 전두환 前 大統領이 5共 非理에 對한 直接 介入을 全面 否認하면서 5共非理特委는 幕을 내렸다. 5共 非理 事件은 1988年 12月 10日 發足한 5共非理 特別搜査部의 搜査를 통해 全 前 大統領의 친·인척 10名과 장세동 前 安企部長, 이학봉 前 大統領民政首席祕書官 等 47名을 拘束, 29名을 不拘束 立件하며 終結됐다.



    1990年 2月號는 ‘全斗煥 證言, 이것이 僞證이다’로 2時間 10分에 걸친 전두환 前 大統領 國會 證言, 野黨 側 意見 等을 綜合해 分析했다. 또한 ‘최규하氏에게 보내는 公開狀’(이수인 경남대 政治學과 敎授)을 통해 “최규하는 12·12 쿠데타의 下剋上 活劇을 가장 正確하게 解說할 수 있는 當事者이자 現場 目擊者, 光州판 인디언 討伐隊의 活躍 全貌와 命令 責任者를 밝힐 수 있는 最後의 證人”이라며 “證言臺에 나서라”고 促求했다.? ?

    1991年 2月號엔 ‘강창성 前 保安司令官 證言-전두환과 하나회 군麥’李 실렸다. 이 글은 1973年 윤필용 將軍 事件의 搜査責任者로서 말썽 많던 軍 私組織 하나회의 全貌를 最初로 밝힌 강창성 當時 陸軍保安司令官이 當時 搜査 過程과 結果를 처음으로 털어놓은 本格 證言으로서 價値가 있었다.

    이와 함께 〈特輯〉 ‘緊急同意, 이것만은 다시 생각하자 ‘光州補償 왜 何必 國民募金인가’’(이종오 계명대학교 社會學 敎授)가 실렸다. 1990年 12月 10日 강영훈 總理가 委員長으로 있던 光州補償支援委員會가 募金支援 談話文을 發表한 데 따른 批判이었다.?


    ‘光州抗爭 當時의 被害가 公權力의 濫用 或은 公權力을 使用한 犯罪였다는 事實이 糾明된다면 賠償責任은 當時의 責任者들과 國家에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를 一般 國民을 相對로 한 모금으로 充當한다는 것은 理解할 수 없는 일이다.’


    1991年 12月號는 ‘김용갑 前 總務處 長官 最初 本格 發言-전두환, 노태우 政權交替, 6·29 前後의 靑瓦臺’를 실었다. 金 前 總務處 長官이 1987年 6月 10日 示威 現場을 보고 나서 4·13 護憲措置(1987年 4月 13日 전두환 大統領이 國民의 民主化 要求를 拒否하고, 모든 改憲 論議를 中斷시킨 措置)의 撤廢와 民意의 受容만이 難局 打開의 處方이란 結論을 내리고 直選制 受容 等을 大統領에게 建議하기로 決心한 背景이 담겼다.

    이듬해 14代 大統領選擧(1992年 12月 18日)에서 民主自由黨 김영삼 候補가 민주당 김대중 候補를 누르고 大統領으로 選出됐다. YS의 大統領 就任 무렵인 1993年 2月號는 ‘이 光州의 絶望을 어찌할 것인가’(문순태 小說家, 全南日報 主筆)를 收錄했다. 다음은 이 寄稿文의 한 대목. ?



    賠償, 名譽回復, 記念事業會

    ‘湖南 사람들이 DJ에게 몰票를 던진 것은, 그가 꼭 當選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랜 地域霸權主義가 湖南 疏外를 낳았고, 세 次例의 大統領選擧 때마다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方法의 하나로 自身들의 恨을 풀어줄 代理人에게 票를 몰아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93年 5月號는 ‘光州抗爭, 眞相糾明 特別法 制定하라’(유남영 辯護士) 記事로 法案 制定을 促求했다. 柳 辯護士는 “YS 政府가 이를 어떻게 處理하는가는 5·6共 政權과의 差別性을 가름하는 尺度가 될 것”이라며 “光州 問題 解決을 위한 새로운 立法은 眞相 糾明과 責任者 處罰, 死傷者 等에 對한 賠償과 名譽回復, 記念事業會의 設立 等을 受容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

    1993年 7月號는 ‘12·12 出動 하나회 軍部 全名單’을 실었다. 12·12에 對해 황인성 總理는 ‘合憲’이라고 하고 김영삼 大統領은 ‘下剋上에 依한 쿠데타的 事件’으로 規定하는 狀況에서 하나회 軍部의 名單·寫眞을 비롯해 12·12 叛亂體系도, 光州鎭壓軍 指揮體系度를 公開했다. 뒤이어 ‘80年 國保委의 言論掌握 ‘對外祕’ 計劃-新軍部는 10·26 直後부터 執權 꿈꿨다’를 통해 ‘12·12 主導勢力들이 10·26 直後부터 當時 保安司 內에 言論對策班을 두고 言論 掌握을 探索한 實態’를 告發해 ‘12·12 主導勢力들이 執權을 摸索한 證票’를 提示했다.

    아울러 7月號에는 〈單獨入手 祕密資料〉 ‘流産된 盧泰愚 側 ‘光州’ 解決 構想’李 실렸다. 이 報告書는 1987年 7月 20日 現代社會硏究所가 作成해 上部에 報告한 것으로, 靑瓦臺와 安企部 側의 反撥로 配布 卽時 回收, 廢棄됐다. 光州 問題 解決이 歷史的 當爲라는 立場과 함께 大選(1987年 12月 16日)에서 노태우 候補의 짐을 덜자는 意圖로 만들어진 것으로, 文書 公開를 통해 그 時期에 光州 問題를 正面으로 다룬 ‘試圖’가 있었다는 事實을 알렸다.

    1993年 10月號는 ‘전두환 합수部側 最初 本格 反論 “정승화 側이 叛亂軍이다”’, 1994年 11月號는 앞의 記事에 對한 反論 格인 ‘정승화 인터뷰 “全斗煥, 10·26 때 職務遺棄했다”’를 收錄했다. 鄭氏는 “저 사람들(新軍部)도 그때는 내가 罪 없다는 걸 認定하고 別의別 좋은 소리를 다 하다가 엉뚱한 陰謀를 꾸미고 그것을 施行해놓고는 原點부터 잘못됐다고 虛僞 造作한 것이오”라고 밝히며 正面으로 反駁했다.?



    1995年 5月號는 ‘衝擊證言 美 宣敎師 피터슨의 光州抗爭 現場記錄-新軍部, 光州 爆擊까지 計劃했다’를 실었다. 筆者인 아놀드 피터슨 牧師는 1980年 光州民主化運動 當時 내내 現場에 있으면서 重要 場面을 지켜봤기 때문에 그의 證言錄은 眞相을 밝히는 데 重要 資料로 여겨졌다. 그는 美 空軍이 美國人 救出을 위해 兵力特派를 準備했고, 事件 直後 軍 當局 調査 結果 死亡者는 832名이며, 當時 軍이 헬기 機銃掃射를 했다는 證據 寫眞을 提示했다. 아울러 ‘5·18 光州民主化運動 搜査實錄-檢察 確認, 新軍部 ‘全斗煥 擁立計劃’’을 통해 5個月餘 進行된 檢察 搜査 막바지 推移를 報道하면서 ‘集團發砲 經緯’가 論爭의 核心임을 알렸다.



    “舊勢力과 손잡고 權力 庇護”

    하지만 民間 次元의 告訴告發事件이 쏟아지는데도 檢察이 起訴猶豫, 公訴權 없음 決定을 내리자 김영삼 大統領은 1995年 11月 5·18 特別法 制定을 指示하고 ‘歷史 바로 세우기’를 宣言했다. 以後 檢察은 再搜査에 着手해 12月 3日 軍刑法上의 叛亂首魁罪를 適用해 新軍部 側 核心 人士 11名을 拘束起訴하면서 5共 非理 搜査를 始作했다.

    1996年 1月號는 〈特輯〉 YS 統治行態, 決斷이냐 政略이냐-‘5·18 特別法’ ‘YS式 決斷 그 背後와 波長’李 실렸다. 記者는 “全 國民的 大義名分이 될 수 있었던 5·18 事件 關聯者 斷罪 問題를 김영삼 大統領 또는 檢察이 思慮 깊지 못한 方法으로 處理함으로써 또다시 地域 間 反目을 낳는, 5·18의 國民的 名分을 毁損하는 結果가 돼버렸다”며 “舊勢力과 손잡고 權力을 掌握하고 庇護해온 現 政權도 例外일 수 없다”고 批判했다. ?



    ‘世紀의 裁判 詳報’

    아울러 〈特別企劃〉 ‘12·12, 5·18 斷罪’에서는 “전두환은 空輸部隊長에게 鎭壓激勵金을 내려보냈다”(5·18 當時 情報部 全南支部長 정석환 備忘錄)는 證言을 통해 全斗煥이 ‘初期’부터 鎭壓作戰 狀況을 챙기고, 在京 全南人士들로 特別 民心 醇化 活動팀을 構成해 急派했다는 疑惑을 傳했다. ‘完全公開/檢察作成 ·· 死亡者 165名 剖檢資料-戒嚴軍’ ‘市民사냥’ 決定的 證據 찾았다’도 실었다. 剖檢資料를 確保·引用함으로써 流言蜚語의 一部가 事實일 수도 있다는 可能性을 提起했다.


    ‘妊娠服을 입고 거리에 나온 妊娠 8個月 婦女子를 戒嚴軍은 銃으로 쏘아 죽였다. 19살 젊은 女子의 젖가슴도 大檢으로 찔렀다. 31살 靑年은 大檢으로 推定되는 凶器를 맞아 머리가 부서진 채 光州矯導所 앞에서 發見됐다. 還甲도 훨씬 지난 老人이 棍棒에 맞아서 死亡했다. M16(戒嚴軍 使用)과 카빈(示威隊 使用) 小銃으로 分類된 剖檢記錄은 當時 醫師들이 아닌 檢察이 作成했다.’ ?

    마침내 12·12 및 5·18 事件 裁判에서 전두환, 노태우 두 前職 大統領 等 쿠데타 主役에게 法의 斷罪가 내려졌다. 1996年 8月 26日 서울地法(1審)에서 歷史的 裁判이 열린 것이다. ?

    1996年 9月號는 〈人物硏究〉 ‘12·12, 5·18 裁判長 김영일 깐깐하고 꼼꼼한 原則主義者’를 통해 ‘世紀의 裁判’ 雰圍氣를 傳하는 한便 ‘光州抗爭 街頭放送의 女人, 전옥주의 衝擊告白手記-“間諜造作 性拷問度 버텨냈다”를 收錄해 光州 市民의 苛酷한 受難史를 다시 照明했다.

    1996年 10月號와 11月號는 ‘12·12 5·18 ‘1審’ 宣告 判決文 專門’을 分割해 收錄했다. 신동아는 入手한 判決文을 紹介하며 “前職 大統領의 判決 記錄은 우리 後孫과 後世 史家들에게 오늘의 現場을 傳해줄 생생한 歷史의 記錄으로 남을 것”이라고 밝혔다.

    1996年 10月號는 ‘5·18 殺傷 眞實糾明은 이제부터’(한인섭 서울大 法大 敎授)를 실었다. “1審 裁判은 끝이 아니라 始作이다. 新軍部로 대표되는 勢力들이 만들어낸 어두운 過去를 淸算하는 宿題는 그야말로 只今부터 풀어나가야 한다”는 理由에서다.

    大法院은 1997年 4月 17日 全斗煥에게 無期懲役 및 追徵金 2205億 원, 노태우에게 懲役 17年 追徵金 2628億9600萬 원을 最終 確定했다.

    1997年 6月號 ‘5·18 民主化運動 17周年-아직 깊은 地域 間 骨 記念日만으로 메워지나’는 “4月 22日 關係部處 長官會議에서 記念日 指定을 비롯한 5·18 關聯 政府 方針을 決定한 것만으로는 問題가 解決되지 않았다”고 指摘했다.



    “赦免은 罪를 씻어준 게 아니다”

    1998年 2月號에는 〈集中取材〉 ‘文民檢察 25時③ 12·12, 5·18 事件 決定의 屈曲社-政治權力 風向 따라 뒤집고 또 뒤집고’가 실렸다. 第15代 大統領選擧(1997年 12月 18日) 直後인 1997年 12月 22日, 大統領 김영삼이 國民 大和合을 名分으로 關聯者를 모두 特別赦免해 두 前職 大統領은 拘束 2年餘 만에 出所했는데, 이 記事는 이런 背景에서 나왔다.

    記者는 “12·12 및 5·18 事件에 對한 檢察 決定의 屈曲社는 政治權力 風向에 따라 흔들리는 ‘해바라기 檢察’의 白眉”라며 12·12 및 5·18事件 無嫌疑 處分 決定 라인, 12·12事件 起訴猶豫 處分 決定 라인 等의 實名과 寫眞을 公開했다. 아울러 祕密에 부쳐진 檢察의 無嫌疑 處分 決定文 寫本을 單獨 報道했다. 또한 〈追跡〉 ‘追徵金 非常 檢察首腦部의 特級指令! 숨겨진 全斗煥 財産을 찾아라’로 전두환, 노태우 前 大統領이 各各 隱匿한 1000億 원臺 祕資金을 追跡했다.

    한便 美國의 12·12, 光州 解明에 對해 疑惑을 提起하는 記事도 꾸준히 나왔다. 1985年 7月號에서는 ‘光州事態 當時의 駐韓 美國大使 ‘글라이스틴’ 特別 인터뷰 “美國은 謝過할 일이 없다”’에서 밝힌 美國 側의 解明을 批判했다. 1989年 9月號는 ‘美國의 12·12, ‘光州’ 解明에 疑惑 있다’를 실었다. 이 記事는 當時 美 國務省이 國會 光州特委의 質問에 對한 答辯書 ‘光州에서 일어난 事件에 關한 美國 政府 聲明書’ 等을 分析해 問題點을 提起한 것이다.

    2004年 5月號부터는 ‘美 祕密文書로 본 激動의 80年代’ 連載를 進行하며 發掘된 美 祕密文書 가운데 光州民主化抗爭 初期 글라이스틴 大使의 誤判, 5·18을 전후한 美國의 沈默과 憤怒, 글라이스틴 大使가 ‘가장 均衡 잡힌 鑛主 보고’라고 評價한 報告書를 照明해 疑問 解消를 試圖했다.

    2002年 11月號는 한상범 疑問詞眞相糾明委員會 委員長 인터뷰를 실었다. 이 委員會는 軍事政權 時節 恣行된 人權 彈壓을 追跡했다. 한 委員長의 發言엔 전두환에 對한 國民의 認識이 담겨 있다. ?


    ‘전두환, 노태우는 1997年 大法院에서 軍事叛亂罪로 有罪判決이 確定됐습니다. 그 사람들이 軍事叛亂을 일으켜 大統領이 됐던 것 自體가 잘못입니다. 軍事叛亂 및 內亂罪 有罪 確定이 됐고 나중에 赦免받았지만, 赦免은 再審을 통해 罪를 클린하게 해준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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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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